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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그 고독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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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린>
 
내시는 궁녀와 함께 궐내에서 상주하는 집단이다. 내시라고도 하고 환관이라고도 하지만 내시는 정식 관직명이고 환관은 고려시대 이래 궁중에서 일을 담당한 고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들이 담당하는 일은 음식물 감독, 궐문 수위 등이었다.
 
업무 자체는 중요하지 않지만 이들은 항상 궁궐에 거주하며 국왕 측근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엄격한 자격이 요구되었다. 무엇보다 고자여야 했다. 늘 궁녀들과 접촉하며 일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내시들 중 다수는 선천적 고자였지만 일부는 수술하여 거세한 자들도 있었다. 일부러 거세하는 풍조는 고려 말기에 환관들이 득세하여 권세와 부를 누리던 시기에 생겨났다.
 
이들은 처나 첩도 거느리고 가계 계승을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일반인의 경우 양자는 반드시 동성에서 들이도록 돼 있지만 이들에게는 특별히 이성의 양자도 들일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내시들은 주로 지금의 효자동과 잠실에 살았는데, 효자동은 환관의 별칭인 화자를 따서 화자동이라고도 했다. 또한 잠실은 나라에서 양잠을 하던 지역으로 일꾼이 모두 여성이라 조정에서 내시들을 감독관으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내시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한일합방이 있기 두 해 전인 1908년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관부를 없애면서 내시부도 폐지되었다.
 
내시들이 담당한 업무는 주로 네 가지로 궁중의 음식을 감독하는 대내감선, 왕명을 전하는 왕명출납, 궁중의 문을 지키는 수문, 궁궐내의 청소를 담당하는 소제였다. 하지만 내시들은 궁중의 제사는 물론이고, 왕실의 재산과 각종 공사관리, 궁녀의 감독 등 궁중의 대소사를 주관했다.
 
품계는 종2품의 상선이 우두머리였으며, 가장 낮은 직급이 종9품의 상원이었고, 인원은 통상 140여명으로 대규모 조직이었다. 왜냐하면 병조나 이조와 같은 부서도 판서에서 좌랑에 이르기 까지 고작 10여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내시가 되기 위한 일종의 사설 양성소도 있었는데, 귀가 커서 쇠귀라고 불렸던 노파가 성불구자들을 모아 놓고 합숙 교육을 시켰다. 해서 내시들은 쇠귀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며, 매년 우이동의 묘소를 참배했다고 한다.
 
내시들은 지위를 이용해 재산을 모아 거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시의 양자가 되기를 다투었을 정도라고 하는데, 나이가 환갑이 넘어도 피부가 희고 목소리가 가늘었다고 한다. 한편 내시들은 부와 권력을 얻었지만 성적 욕망을 풀 수 없었기에 동성애를 하거나, 돈을 주고 산 어린 처녀들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음양의 도를 체험하지 못하고 고자라는 콤플렉스로 인해 괴팍스러운 성격의 소유자가 많았다고 한다.
김재영 원장
퍼스트 비뇨기과 원장
ISSM(세계성의학회) 정회원 / KBS, MBC, SBS 방송 다수 출연
http://www.firstclin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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