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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다이어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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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엽기적인 그녀]

버스의 문이 열리고, 나는 피곤에 절어 있는 다른 승객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얼굴 표정으로 터덜터덜 내렸다. 늦은 시간이라, 이 시간대에 버스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회식 혹은 야근을 한 직장인 이겠지. 나는 그대로 걸어가지 않고 정류장의 의자에 털썩 하고 주저 앉았다. 
 
(아마도) 직장인 듯한 그들은 모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 옆을 스쳐가 사라져갔다. 이 정류장에서 단 3분만 걸어가면 우리 집인데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제법 쌀쌀해 지기 시작한 날씨에 나는 입고 있던 자켓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매연이 섞여 더 컴컴한 서울의 밤에 뜬 달이 왠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다. 조금씩 옷깃안으로 스며드는 찬바람에 나는 몸을 움츠리며 내 기분만큼 텁텁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근본적인 의문에 도달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서울에 올라온 지 3년이 되었고, 나는 하나도 이뤄 놓은 것이 없었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열망과 나는 음악을 할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주머니 속 구겨진 지폐처럼 초라하게 한 켠에 찌그러진 지 오래 였고, 나는 어쩌면 내 옆을 스쳐간, 매일 똑 같은 일상을 보내는 직장인들을 부러워 해야 할 처지였다. 그들과 달리 이뤄 놓은 것이 단 하나도 없으니까. 
 
차라리 학교를 다니면서 취미로 음악을 만들고, 그것을 아마추어 음악 동호회에 올릴 때는 즐겁기라도 했었는데, 그 것이 생계가 되다 보니 마냥 즐겁기만 한 음악이 날카로운 화살촉이 되어 나를 겨누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부자가 되기 위해서 음악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음악을 하기 위해선 최소 생활이 가능해야 하고 생활을 위한 필수 조건은 돈이라는 것을 나는 최근에 깨달았다. 취미와 직업,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는 냉엄하고 참혹하다. 
 
그러니까, 돈이 없으면 음악이고 예술이고 하는 낭만 놀이를 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사람이 없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집에 가봐야 나 혼자 사는 그 방에는 날 반겨줄 사람 따위는 없으며, 아마도 낡은 책상위에 있는 작업용 컴퓨터와 음향 장비 몇 개만 또 시야에 들어올 것이며, 나는 또 기계적으로 그 앞에 앉아서 악상이 나오기를 기다리겠지.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다시 오늘 하루를 복기해 보았다. 돈 몇 푼을 벌기 위해서 귀에 땀띠날 때가지 헤드폰을 쓰고 있었던, 혹사당한 고막만큼 피곤한 오늘 하루의 일을. 
 
문득 인기척이 들려 옆을 바라보았다. 어둠속에서 작은 인영 하나가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은 비틀 거리는 듯한, 그리고 체구가 작은 듯한 그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녀가 달빛 아래 온전히 자신의 몸을 내밀고 나서야 인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조금 취한 듯한 얼굴이었다. 긴 머리에 하얀 얼굴, 강아지를 닮은 동그란 두 눈에 작고 반짝이는 입술을 가진, 달빛보다 더 하얗고 동그란 이마를 자신의 손으로 살짝 어루 만지며 정류장에 있는 배차 정보를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직장인인 모양인지, 브라우스에 허리를 타이트하게 조이는 스커트, 그리고 얇은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하얀 손목에 있는 갈색줄의 시계와, 오른쪽 어깨에 위태하게 걸려있는 핸드백. 키는 조금 작은 편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오피스룩 위로 드러난 볼륨이 확 하고 강조되는 모습이었다. 
 
예쁘다. 
 
나는 순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가 있는 눈코입이 너무나 조화롭게 자리한 여성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타입의 ‘예쁨’이 있지만, 그녀는 마치 조신하고 정숙한, 그리고 지적인 미녀의 모습에 매우 가까웠다. 그녀는 서 있기가 조금 힘들었는지, 버스 정류장 기둥에 잠시 기대어 이마에 손을 짚었다. 하얗고 얇은 손가락 사이로 쏟아지는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거린다. 여자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내가, 왠일인지 그녀가 서있는 모습을 한참이나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냥 문득, 그녀가 기다리는 버스가 조금 늦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하고 일어났다. 정류장 광고판에 기대어 시소처럼 몸을 흔들던 그녀가 심하게 비틀거렸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고, 그 순간 그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듯이 쏠렸다. 눈을 잠시 감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드는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고, 나는 고민할 틈도 없이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의 앞을 막아 섰다. 그녀의 구두가 지면과 세게 맞닿으며 딱! 하는 소리를 내었고, 내 어정쩡한 몸에 어깨를 부딪힌 그녀는 가까스로 넘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내 질문에 그녀는 그제서야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내 팔을 손잡이 처럼 잡고 있던 그녀에게서 여자 특유의 향기에 술 냄새가 섞인 향이 풍겨 내 코를 확 하고 간지럽혔다. 나도 모르게 술을 한 잔 마신 것 처럼 눈 앞이 아찔했다. 
 
“아……음……미안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놓았다. 나는 괜찮다는 말도, 괜찮냐는 말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거기 서 있었고, 그녀는 다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버스가 와서……”
 
나는 그제서야, 넘어지는 그녀를 잡아주는 사이에 내 뒤로 버스가 하나 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황급히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굉장히 서두르는 듯한 발걸음으로, 하지만 굉장히 느릿느릿 버스에 올라탔다. 그녀가 버스에 타자 마자 다시 도시의 밤공기 냄새가 내 목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나는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어, 멀리 사라져가는 버스를 바라보았다. 그냥 넘어지는 사람 앞에 서 있었을 뿐이었고, 그녀와 나의 몸이 맞닿은 곳은 팔과 어깨 뿐이었는데도 그녀가 잠시 잡았던 팔에서 지릿지릿한 느낌이 들어오는 것 같아서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정류장에 서 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마치 내가 술을 마신 것처럼 알딸딸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음?”
 
몸을 돌려 집으로 가려던 내 발에 무언가 툭 하고 부딪혔다. 내 발에 부딪힌 그것은 몇 십센티 앞으로 밀려 나며 벤치 다리부분에 한 번 더 툭 하고 부딪혔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것을 주워 들었다. 표지가 꽤 고급스러운, 갈색의 다이어리였다. 
 
“이거……”
 
아까 그녀가 넘어지려 할 때 그녀의 가방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급작스런 상황이라 그녀도 나도 인지를 하지 못한 걸까? 나는 급히 버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신호에 라도 걸려 있으면 뛰어가서 건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버스의 미등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의 다이어리를 들고 안절부절 하다가, 이윽고 그것을 내 자켓품안에 숨기듯 넣고는 집으로 향했다. 무슨 중학교 때 야한 잡지를 숨겨서 가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그 다이어리가 어디에 닿으면 부숴져 버리는 유리장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품 안에 안 듯 들고서 나는 집으로 향했다. 
 
나는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지하철 역처럼 유실물 센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것을 어디다가 맡겨 놔야 하나? 라는 생각부터, 이걸 집에 가서 내가 봐도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 그리고 만약 그녀가 흘린 다이어리가 아니면 어쩌지? 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생각까지. 
 
내 등 뒤로 현관문이 닫혔고, 내가 예상한 것처럼 내 방은 한 쪽에 있는 컴퓨터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린 옷가지들과, 지난 밤에 마셨던 것으로 추정되는 빈 맥주캔들이 나를 반겼다. 나는 침대에 앉아 후드를 벗고, 다이어리를 꺼내 약간 더러워진 표지를 손바닥으로 탈탈 털었다. 다이어리 똑딱이 부분을 풀려고 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막 뛰었다. 달빛 아래에서 본 그녀의 얼굴만이 내가 가진 그녀의 모든 정보인데, 이 것을 열면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왠지 목이 타서, 테이블 위에 놓인, 이제는 미지근해 져버린 생수통의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나는 다이어리를 열어 보았다. 
 
처음에 나온 몇 장은 다른 다이어리들과 다를 바 없는, 스케쥴을 적을 수 있는 캘린더가 있었다. 나는 그 칸에 빼곡히 채워진 앙증맞은 글씨를 보며 순간적으로 안심했다. 왠지 그녀의 다이어리가 맞을 것 같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녀의 스케쥴러는, 정말 빼곡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주로 업무에 관한 스케쥴이 많았고, 어디를 봐도 ‘회의’ , ‘미팅’ 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오늘 날짜에 해당되는 칸에 ‘팀 회식’ 이라는 단어가 써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녀의 다이어리임을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차마 페이지를 뒤로 넘기지는 못했다. 왠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 그 다이어리안에 가득 들어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그녀와 다시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스쳐 지나간 사람인데, 왜 그녀가 미래에 불쾌해 할 것을 고려하고 있는지 나 조차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Liz Kim]
 
다이어리의 맨 앞 부분에는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명함이 꽂혀 있었다. 리즈라는 것이 영문 이름인가? 그 이름의 어원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의 얼굴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명함을 뽑아서, 명함에 적힌 그녀의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전화를 건 것도 아닌데 또 한 번 가슴이 뛰어서, 나는 그것을 내 휴대폰에 입력하고는, SEND버튼을 눌렀다가 곧 바로 꺼 버렸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전화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핸드폰에 그녀의 이름을 LIZ라고 저장하고는, 다시 그 명함을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원래 있던 자리에 끼워 넣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자기 전에 의무감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음악을 만들려고 깔짝대고 있었겠지만, 그날은 샤워를 하고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다이어리 표지를 만지작 거리다가, 마치 영화의 스냅샷처럼 머릿속에 강하게 저장된 그녀의 얼굴과, 미안하다는 단 한마디에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음표가 되어 귓가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음악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궁금해 하지 않던 내가 단 3분 동안 만났던 누군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한 의미를, 그 때 나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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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카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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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홀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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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소사동 2019-01-04 15:09:53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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