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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다이어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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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2]

날씨는 쌀쌀한데 왜 나는 춥지 않은 것인가. 아니, 왜 난 이렇게 여기 서서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날씨가 너무 지나치게 좋아서, 밤이 되어도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평일의 저녁에 말이다. 아니, 근본적으로 난 여기서 뭘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며칠 전 리즈와 함께 모텔에 있던 날로 돌아가야 한다. 
 
“나 계속 좋아해도 돼?”
 
내 질문에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름 엄청난 용기를 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아니. 알 지 못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말을 용기 내어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실없어 보일까. 
 
“고마워. 미안하고.”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얼어 있는 내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난 네꺼잖아.”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이 공간이라는 선이 그어지는 것이, 마치 내 가슴에 칼을 대고 긋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삶의 일부라도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욕심만 부리지 말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리즈는 내 허리를 꽉 안아 주었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네 꺼인 이 순간을 활용하지 않고 뭐하고 있어?’라고 나를 다그치는 것 같았다. 맞다. 조금이라도 네 것일 때 그녀를 느끼고 안아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나를 이어준 다이어리라는 매개체에 감사하며. 
 
나는 다시 사춘기 소년처럼 건강해진 몸으로 그녀를 덮쳤다. 리즈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나를 독려하듯 이끌었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하면 할수록 느는 것만 같았다. 점점 격해지는 그녀의 반응이 증거였다. 
 
리즈는 정말 금방 준비가 되는 여자였다. 내 작은 스킨십에도 그녀는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젖었다. 그것이 여자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정말 엄청난 자극이라는 것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야동을 보고 했던 이미지 트레이닝이 무색하게, 나는 또 급하게 그녀의 위에 올라타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바로 그 때 그 사건이 일어났다. 한창 그녀와 하나가 되어 있을 때, 리즈의 휴대폰에 메시지 도착 알람이 울렸던 것이다. 물론 리즈는 나와의 섹스에 온 정신을 몰두하고 있었고, 그녀는 섹스가 끝나고 나서야 그것을 열고 확인했다.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던 나는, 씻으러 다녀오라는 그녀의 말에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뭔데?”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묻지 말았어야 했다. 어두운 모텔 방안에, 그녀의 액정 불빛이 리즈의 얼굴을 밝혔을 때, 그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물어본 것이었다. 그녀는 나를 살짝 바라보더니 물었다. 
 
“왜? 궁금해?”
“아니 뭐 메시지 보고 웃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왜 내가 기가 죽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리즈의 되물음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즈는 뭐라고 답장을 쓰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친구가 보낸 톡이야. 나 소개팅 하라고.”
“아……응.”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그녀의 옆에 누워 있는 것은 나인데, 갑자기 긴 거리감이 느껴졌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 지 몰라 마음속으로 발만 구르며 아직도 카톡 중인 그녀를 바라보다가, 겨우 물었다. 
 
“그……소개팅 하려고?”
“요새 들어서 소개팅이 계속 들어오네. 내가 외로워 보이나 봐.”
“그래서 소개팅 하려고?”
 
나는 다급하게 또 물었다. 리즈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왜? 안 했으면 좋겠어?”
 
바보같이, 바로 응! 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생겨먹었나 괴리감을 느낄 틈도 없이, 그녀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나쁜 여자라서 나에게 소개팅 사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리즈는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잘 하지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물어본 내가 잘못한 거다. 
 
“친구가 계속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직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바빠서 미뤘거든. 그러다가……아무튼 그래서 또 거절하기가 좀 그렇네.”
 
그러다가……라는 말의 뒤에는 ‘너를 만났어.’ 라는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모르지. 그녀가 원래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말을 흐렸는지는. 
 
“음…다음주 수요일……괜찮으려나.”
 
그리고 그녀가 무심코 한 혼잣말을 내가 들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차라리 거기서 끝났으면 괜찮은데, 그녀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에 침대위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휴대폰에 답장 카톡이 미리보기로 떠 버린 것도 화근이었다.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그게 마침 내 눈 바로 앞에서 화면이 밝아지며 메시지가 떠 버린 것이었다. 
 
-그럼 수요일 니네 회사 앞 스타벅스에서 7시 20분. 오케이?-
 
그 톡을 봐 버린 이상, 화요일 저녁까지, 아니, 수요일 그녀의 퇴근 시간 까지 나는 쉴 새 없이 고민하고 생각에 잠겼다. 리즈의 소개팅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그녀와 같은 여자는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은 늘 했지만, 소개팅은 그녀도 동의하고 나가서 남자를 만나는 자리니까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결국 수요일 7시 20분에, 그녀의 회사 앞 스타벅스 뒤에 숨어있는 찐따짓을 하고야 말았다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것 보다 더 원망스러운 것은, 그녀에게 소개팅을 하지 말아달라고 말도 한 마디 못하는 내 찌질함이었다. 리즈 역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이런 내 모습에 답답해 하지는 않을까? 나 자신도 답답한데 그녀는 오죽할까 싶었다. 
 
내 눈에, 이제는 눈을 반쯤 감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리즈가 보였고, 그녀는 약속 장소인 스타벅스에 나타났다. 젠장. 오늘은 왜 저렇게 예쁜 걸까. 숨어서 그것을 지켜보는 내 모습보다 내 마음도 모르고 한껏 치장한 그녀가 원망스럽다. 치마며 자켓이며, 노출은 없어도 몸매가 드러나는 그런 오피스 룩의 그녀가 나타나자 몇몇 시선이 그녀를 향해 꽂히는 것이 나도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저 멀리서 멀끔히 차려 입은 한 사내가 등장했다. 
 
나는 상대편이 자유투를 할 때 들어가지 마라고 주문을 외우는 슬램덩크의 강백호처럼, 그를 향해 ‘제발 저 녀석이 아니어라……제발……’ 이라고 주문을 외웠다. 정말 욕이 나올 정도로 잘 생기고, 깔끔하고, 남자인 내가 봐도 멋있는 그 놈이 리즈의 앞에 다가갔고, 리즈가 꾸벅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이자 창 밖의 나는 절망에 사로잡혔다 
 
리즈는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리즈와 아이컨택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리즈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고, 대화를 이끌어가는 저 모습은 내게서 절대 없는 모습들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표정도 왠지 모르게 설레어 보인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대화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 둘 몰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그냥 갔으면 덜 바보 같았을 텐데, 바보짓인지 알면서도 본능이 나를 잡아 끌었다. 내가 그 남자를 바라보는 것은 질투가 아닌 부러움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면서.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종업원의 말이 괜히 우렁차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다행히 그녀의 시선 방향은 음료 픽업대가 보이지 않는 방향이었다. 나는 음료를 받아들고, 그녀의 뒤 쪽 방향에 조금 떨어진 곳에 걸터 앉았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그녀를 향해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매장이 시끄러웠지만, 한층 예민해져 있는 내 감각 덕분인지 나는 어렴풋이 둘의 대화가 들렸다. 둘은 사회인 답게, 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직업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고 맞장구도 쳐주거나, 혹은 적극적인 질문을 하거나 한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말을 할 때 ‘아……이쁘다……’ 라며 입이나 헤벌쭉 벌리고 있는 나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찻잔으로 내 얼굴을 반쯤 가리며, 차를 마시는 척 하면서 내 눈 앞에 보이는 그를 응시했다. 너무 포멀하지도 않은, 하지만 너무 사복같지도 않은 그냥 깔끔한 옷차림에,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그는 리즈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서, 단 1초의 어색함도 만들지 않고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리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환하게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아팠다. 가끔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할 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적막이 흐를 때가 있었다. 리즈는 나에게 그렇게 말을 해주었다. 
 
-난 사실 아무런 말이 없는 어색한 분위기를 엄청 못 견뎌하는데, 이상하게 너랑은 이런 적막도 편해. –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행복해 했었고, 또 그것이 나를 향한 칭찬이라는 생각을 하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어색한 침묵이 싫지 않다는 것이지 좋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리즈는 즐거워 보였다. 
 
둘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영화 이야기를 하고, 책 이야기를 했다. 곧이어 음악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는 나와 리즈가 공감대를 쌓았던 음악 장르에 대해서는 무지한 듯했다. ‘그래요? 들어 봐야 겠네요.’ 등의 이야기만 했으니까. 하하. 봤지? 난 리즈랑 심도 있는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그녀가 좋아할 법한 음악을 추천해 줄 수 도 있다고! 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보았지만, 언뜻 봐도 나는 그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 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리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거릴 때마다 내 가슴도 조금씩 아려왔다. 같은 남자인 나는 알 수 있다. 그는 굉장히 리즈를 마음에 들어했다. 남자라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의 밑에 알몸으로 안겨있는 리즈의 모습이 상상되는 내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누군가가 나의 감정을 훤히 들여다 본다면, 내 병신스러움에 한 바가지 욕을 퍼부어 줄 것만 같았다.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손을 잡아 끌고 저 문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곧 남자는 식사를 제안했다. 자신이 근처에 예약을 해 두었다고 했다. 리즈는 고맙다며 인사를 했고, 그는 매너 있는 몸짓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물론, 둘이 일어나자마자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핸드폰을 보는 척했다. 내 등뒤에서 또각또각 하는 그녀의 구두소리가 들렸다. 나는 속으로 백 정도까지 세고 나서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고, 당연하게도 둘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는 것은 이미 많이 겪어본 일이었지만, 내가 정말 힘든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 리즈와 연락을 하고, 가끔 만나서 그녀를 안는 이 시간들이, 그녀가 연인이 생기면 물에 부은 소금처럼 아예 사라져 버릴까봐 두려웠다. 
 
다이어리를 줍기 전 처럼, 우리가 그냥 남이 되어 버릴까 봐.
 
그 날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정말 많은 술을 혼자 마셨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 내가, 그것도 혼술을 그렇게 대량으로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원망스럽게도 리즈로부터의 연락은 그날 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뭐해? 라고 물어볼 법도 했는데. 나는 결국 술을 마시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쓰러지듯 선잠이 들었고, 그녀가 한창 출근하는 시간이 되자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뭐해? 출근하는 길이야?-
 
남녀사이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다. 그녀 앞에서 영원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나는 또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굿모닝! 지금 가는 중-
 
그녀의 대답에 휴대폰 자판 위의 내 손가락은 갈 곳을 잃고 잠시 흔들렸다. 뭐라고 보내야 할까. 전날 마신 술로 머리가 지끈 거리듯이 아파왔다. 무언가 무거운 돌덩이가 내 뇌를 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미치도록 궁금했다. 어제의 소개팅은 어땠는지.
 
-어제는 뭐 했어?- 
 
나는 결국 이렇게 보내고 말았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수상한 문자가 아닐 수 없었다. 어제가 주말도 아니었는데, 그냥 일상적인 평일이었는데 뜬금없이 어제는 뭐 했냐니. 그녀가 백수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보내고 나서야 바보 같은 질문인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그녀가 내 메시지를 읽은 뒤였다. 그리고 그녀의 답은 내 예상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거 너 맞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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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카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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