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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종이가방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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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남에 있어 시작점이 중요할까.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이미 와르르 엎지른 물인데, 어디부터인지는 알 바 아니다.


그 날은 너와 내가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고, 예정에 없던 회식이 잡혀 미안함에 쩔쩔거리던 네 모습이 휴대폰 화면을 뚫고 나온 날이었다. 약속시간을 5시간 미뤄 만난 너는 우산을 쓰고 오기는 한 건지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이 절로 생각나리만치 젖어있었으며, 헤롱거리는 표정을 하고 알콜을 눈에 찰랑찰랑 담고 있더라.
자신의 취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내가 그 모습을 싫어한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연신 ‘나 짓짜 안 취햇더어-’ 하는 모습이 썩 귀엽지만은 않았다.
너도 그리 생각하듯, 나 역시 네가 고주망태가 되는 모습이 싫어, 타르 함량이 1mg인 담배 조차도 거듭 만류했다. 너의 조금은 불룩해진 배에 과연 우산이 걸쳐질까, 나의 가벼운 장난에 넌 들고 있던 음료를 쏟았으며, 애써 내색하고 싶지 않아 하는 짜증이 내 눈엔 고스란히 비쳤다. 아- 잘 알긴 아는구나,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민망하고 뿌듯했고, 미안하고 언짢았다. 그리고 고마웠다. 만감이 교차했다. 결국 넌 내 눈 앞에서 보란 듯 가느다란 담배를 물었고, 깊은 한숨을 통해 짜증을 뿜어댔다.
왜 같이 샀던 신발을 신고 오지 않았냐며 가볍게 툴툴거리는 너였다. 나와 함께 샀던 그 신발을 신고서 군데군데에 고인 물웅덩이를 일부러 밟는 건지, 조심하라는 나의 말에 반발심이 든 건지는 아직까지 모르겠다.
거센 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든 쇼핑백은 이미 흠뻑 젖어있더라. 차라리 내가 안고 갔으면 됐는데, 왜 너에게 맡겼을까. 들고 있던 브리프케이스가 가벼워 보여 ‘안에 넣어줄 공간 있냐’는 내 물음을 외면하던 너는 결국, 젖어버려 찢어진 바닥 아래로 우리의 소중함을 와르르 쏟아내었다. 주워 담고 싶어도 주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참고 버티던 나 또한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담고 싶었는데 주울 수 없었다.
소의 껍질로 만들어진 내 신발은 이미 왕창 젖어있었고, 어느 정도 더 걸어야 하냐고 물었는데 너는 ‘쫌’이란 말로 일관했다. 쫑알거리는 내가 귀찮을만도.
금요일 이미 22시. 대실이 가능한 숙박업소는 그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넌 취하면 눈꺼풀이 살짝 칙칙해지는데, 그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우리 아빠도 무지 화가 날 때 비슷한 표정을 했었던 것 같다. 오기였는지 가장 비싼 방에서 숙박을 하겠노라 으름장을 놓는 네가 무서웠다. 어쩌면 너를 만나러 가는 길부터 나에겐 두려운 발걸음이었을지도.
꼬부라진 혀로 씨부리는 그 욕지거리가 하나도 흥분이 되지 않았다. 너의 손바닥은 아리기만 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넌 나를 품에 꼬옥 안고 미안하다며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모르겠어. 미안해.

어긋남에 있어 시작점이 중요할까.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이미 와르르 엎지른 물인데, 어디부터인지는 알 바 아니다.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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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8-11-09 03:39:02
하.. 깊은 한숨만 자꾸 나오네요
익명 / 토닥토닥토닥.. 쓰담쓰담... 향기로운 주말 보내셔요 :)
익명 2018-11-09 03:38:23
지친 심신 따뜻한 이불속에서 가득가득 충전되는 밤이길 바랍니다 쓰니님
익명 / 충전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따스한 겨울 보내시길 바라요.
익명 2018-11-09 02:53:50
발라드곡의 뮤비를 보는 것 같네요. 편안한 밤 되시기를...
익명 / 감사합니다. 박정현님의 곡 <사랑은 이런 게 아닌데> 두고 갈게요.
익명 2018-11-09 02:45:50
어쩜 이렇게나 와닿는 글일까요. "젖은 종이가방 때문이었다." 제목부터 너무나 공감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화자가 제가 된 듯, 너무나도 이입되는 글입니다. 모든 어긋난 인연의 경험에 바치고 싶은 그런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익명 / 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계시나봅니다.
익명 / 비슷할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경험이 있네요. 어느샌지 모르게 와르르 젖은 종이가방 속 내용물처럼 그렇게, 젖어버린 어긋남의 경험이. 저에게 있어서요.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경험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감정과 경험의 공유 감사드립니다.
익명 / 모든 것은 시나브로.. 그렇게 찾아오지 않던가요, 새롭고 즐거울 또 다른 시나브로를 맞이하시길 바라요.
익명 / 맞아요. 누구실지 모를 분...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에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는 싯구가 떠오르네요. 말씀과 같이, 시나브로 그렇게 모든 것들이 가고, 또 시나브로 찾아올 테지요.
익명 / 몰라서 더 기다려지는 게 아닐까 해요. 사계절처럼 지고 또 오고, 아니면 겨울꽃처럼 청초하게 피어날 수도 있겠죠. 비가 왔더니 단풍이 다 졌네요, 기쁜 날들 보내셔요 :-]
익명 / 모름이 또 이렇게 긍정적으로 이해되기도 할 수 있네요. 겨울꽃처럼 청초하게 기쁜 인연이 또 피어나길 바랍니다.
익명 2018-11-09 01:43:57
소가죽 구두가 만신창이 되서 슬프셨군요..그래서 비오는 날엔 슬리퍼 추천
익명 / 덕분에 갬성 와장창 감사합니다
익명 / 나쁜사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 / 비오는날 슬리퍼 미끄러지면 발목에 껴요
익명 / 아 나느 발목에 낀적 많은데... 초라했지 ... 쪽팔려서 빨리 가려 할수록 더 꼈지
익명 / 슬리퍼도 비가오면 미끄러워지니 장화 추천합니다 ㅋㅋ
익명 / 까죽 쓰레빠였습니다만...^~^
익명 2018-11-09 01:39:18
아프군요
곧 평안해지길 바랍니다
익명 / 괜찮아요 늘 평안할 수만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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