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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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함과 분주함 속에 나를 가두는 것 외에 헛헛함을 떨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 했다. ‘인싸’라는 평은 이러한 이유에서 붙여지는 호칭이겠지. 모두가 그럴 것이라는 속단은 아니고, 나 한정. 헛헛했더니 인싸. 결국 개똥벌레. 매번 같은 말만 늘어놓게 된다. 바쁘고 싶지 않다, 허둥대고 싶지 않다, 여유 가지고 싶다. 부지런함과 바쁨 그 둘은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다른 거라서.
특별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닌데 이런 저런 일들이 모이고 겹쳐서 집이 좀 지겨운 공간이 됐다. 나를 자꾸 가라앉게 만드는 기분을 나는 즐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라는 데에 거절한 적 없었다. 이번의 만남도 그 일환. 최근 5년 새의 거처는 네 군데고 주민등록을 하지 않은 곳까지 포함하면 세 곳을 더해야겠다. 재작년, 신점을 보면서 역마살이 있느냐 물었을 때에, “움직이고 싶은 게 아닌데 자꾸 움직여지지?” 하던 되물음을 떠올리면, 전술한 분주함이나 소란함까지도 내다 본 걸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나에게 신점은 일기예보 같은 것이라 비가 예고된 날에 우산을 준비하기 위하는 정도이지, 예고되지 않은 날에도 우리는 언제고 비도 해도 맞지 않던가. 맹신하고 싶지는 않다. 신점도, 일기예보도. 새로운 거처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몸이 맞는 건 쉬웠다. 내 쪽에서 그 어떤 기대를 가지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사귈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ㅡ내 거절 의사를 무시한 한 명을 제외하면ㅡ지금까지는 몸이 맞는 친구 모두가 마음까지도 맞았다. 아빠는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내가 가진 인복을 나는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한 번의 만남에 모든 것을 단정하기는 무리겠지만, 지금의 친구들을 나는 그런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 집에 텔레비 없어.” “그럼 유투브 봐?” “유투브도 안 봐.” “넷플릭스는?” “집에서 저녁 먹는 날에는 봐. 15분 정도씩? 매일은 아니고.” “그럼 책 같은 거 읽어?” “나 책 안 좋아해.” “혹시 자연인이야? 산에서 내려왔어?” 짐짓 진지한 표정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종종 ‘집에서 혼자일 땐 뭐하면서 놀아?’ 하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턱 막히는 내가 나는 조금 싫었다. 그래서 집이 지겨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전엔 그래도 공예처럼 사부작거리는 걸 좀 하긴 했는데 요즘엔 아주 가끔의 요리, 잠깐잠깐의 식물 돌보는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항상 와식생활. 누워 있는 대부분은 휴대폰을 내내 붙잡고 있다. 읽거나, 적거나. 아님 그 둘을 동시에. 그래서 그냥 나갈 일을 기어이 만들고야 만다. 나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아니면 나 같은 인간들에 의해서 소셜 데이팅 앱이 나날이 발달해 가는 걸까. 당근 커뮤니티도 그렇고. 뭔가를 하고 싶기는 한데 구체적으로 그게 뭔지를 모르겠을 때에 메뉴판이나 전화번호부처럼 뒤적거리는 어떤 채널들이 있다. 대강의 기억은 ‘로망 실현’이라는 꽤 거창한 키워드 정도. 흠, 로망이었나? 로망이었구나, 싶다. 남자 둘, 아니 정확히는 셋이었지. 입에 보지에 애널에 하나씩 물고 싶었다. 정신 차릴 틈 없이 꼭꼭꼭 메운 채로 전부 놓고 싶었다. 생김새가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두려웠던 건 TF팀일까 봐. 그래서 건넨 제안은 셋으로 구성된 단체채팅방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내 제안은 어설펐다. 내 두려움을 떨치거나 돈독함을 검증해내기에 내 생각이란 알량하기 짝이 없었다. ‘너네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편의 상 1호와 2호. 내 물음에 2호는 말이 없었고 1호는 가벼운 어조로 화제를 전환했다. 잠깐의 불안이 스쳤다. 간단한 내 소개를 마치고서 가까운 시일로 일정을 조율했다. 때문에 러시아에서 들어온 친구를 보지 못 한 건 아쉬운 일이었다. 어쩌겠어, 선약이 있는데. 조율한 것은 일정만이 아니었다. 직전에 집을 뒤집어 엎는 바람에 어디에 있는지 모를 장난감들은 제외하고서, 가지고 있는 장난감들 중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위치한 것들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그 날의 착장과 위치와 시각. 내가 챙긴 건 문틀용 구속구와 안대와 애널플러그, 전동 기능이 고장난 딜도 그리고 가장 애용하는 장난감까지. 최근 산 트위드 소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으려고 했다, 노브라를 요청하기 전부터 말이지. 등이 꽤 파였기도 하고, 꽤 붙는 핏이기도 하고, 신축성이 거의 없으면서 두꺼운 소재라서 브라를 안 입은 채로 입는 것을 더 선호한다. 아니, 브라를 입은 채로 입어 본 적이 아직은 없다. 그리고 팬티 없이 레깅스를 입는 데에 길들여진 건지, 스타킹을 신을 때에도 팬티를 생략하는 것이 편(하고 야)했다. 나름의 깜짝 이벤트였는데, 요청에 응하는 상황이 된 것은 조금 아쉬웠다. 1, 2호가 종종 가 본 적이 있다는 어느 숙박업소는 집과 회사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었고, 그 날 나는 잠깐의 볼 일이 있어서 20시를 약속 시각으로 했다. 이틀, 이틀만 지나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새로운 경험 앞에서 느끼는 설렘이 마지막으로 몇 년 전이었더라. 전혀 떨리지 않는 내가 시시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됐다. ‘그럼 5번 출구로 가면 되지?’ 1호가 핀해 준 장소로 이동하면서 라지 사이즈의 토트백 손잡이를 팔 오금에 단단히 고정했다. 만약 내일 데드리프트를 하다가 이두가 끊어진다면 바벨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이 가방 탓일 거라고 벌써부터 책망했다. ‘웅, 나 가구 있어’ 허벅지를 덮는 기장의 부츠가 자꾸만 흘러내렸다. 흑경처럼 비치는 쇼윈도를 통해 본 내 모습은 마치 검정색 루즈 삭스를 신은 것 같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Foo Fighters, 이어폰을 통해 아주 큰 음량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그걸 뚫고 어떤 인사가 내 쪽을 향했다. 보폭이 순간적으로 작아졌다. 인사가 정확히, 내가 아닌 내 뒤를 쫓아오던 남자에게 꽂히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다시 보폭은 커졌다. 아마도 2인1조로 활동하는 종교 권유. 내 사진을 보낸 적이 없으니 어쩌면, 대번에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겠다. ‘나? 지금 여기 스타벅스 앞.’ 보도블럭에서 내려와 아스팔트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에 누군가가 슬그머니, 가방을 들지 않은 쪽의 팔짱을 꼈다. “어, 안 놀라네.” “안녕? 아니야, 놀랐어.” “너 헤맬까 봐 데리러 왔지.” “너가 1호구나?” “얼굴에 써 있어?” “메신저로 대화했을 때랑 비슷한 이미지길래 찍었어.” “귀신 같네. 어떤 이미지야?” 뭐랄까, 1호는 대화를 좋아하는 듯했다. ‘토크쇼’를 해야 한다는 언급도 그랬고. 상대가 불편할까 봐 말을 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반면에, 같은 이유로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1호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건넴 덕에 나는 편했다. “나 아니면 어쩌려구 팔짱부터 껴?” “장난감 많아서 큰 가방 들고 올 것 같았어. 그리고 너가 멀티프로필 설정하기 전에 사진 스캔했지~ 엄청 많던데?” “응, 다 보기 힘들 걸.” ‘만나자마자 가슴 만져도 돼? 진짜 노브라인지 검사하게’ 응, 존나 좋아! 라고 하진 않았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려주는 것보다 들키는 쪽이 나는 더 재밌더라고. 들키기 위해서 나는 부단히 노력해야겠지만. ‘음’ ‘1호야 ㅇㅇ이 부담스럽대’ ‘아니야 좋아해 그런 거’ “진짜로 안 입었네.” “앞에 차 있어. 안에서 보일 걸.” “싫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정차한 차가 한 대 있었고, 당장에 보이는 주차된 차들만 열댓 대는 되어 보였다. 1호의 물음에 나는 아직까지 답하지 않았다. 몸을 조금 틀었을 뿐 더 이상의 제지도 없었다. 과하지 않은 정도의 수다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 새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2호는 간단한 주전부리를 위해 편의점에 가 있다고 했고, 1호는 인포데스크에서 우물쭈물하지 않는 점을 들어 나에게 대범한 편인지를 물었다. “나 낯 엄청 가려. 지금도 가리는 중이야.” “괜찮아. 어차피 딴 건 안 가릴 거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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