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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위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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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조회수 : 2418 좋아요 : 3 클리핑 : 0
담백함의 중요성이 요즘만큼 강조된 적도 없었던 듯하다. 업무 처리가 담백할수록 일을 잘 한다는 평을 듣고, 말도 글도 담백하게 하고 써야 한단다. 음식도 섹스도. 아마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깔끔한 것들을 아우르는 통칭이겠거니. 복잡한 것들은 눈에 잘 들어오기 어렵지 않던가. 나의 섹스 중 어떤 것들은 너무나도 담백해서 가끔은 그것이 무감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위로에까지 담백함을 요구한다면 나는 이제 거부감이 들 것만 같다.


어떤 심장 기형은 군면제 사유라더라. 잘 모르지만, 아빠는 방위로 만기 전역했다고 했고 만일 조기에 발견해서 군대를 가지 않았더라면 엄마를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며칠 뒤 아빠는 여태 잘 살아 왔으므로, 아무런 기저질환이 없는 건강하던 사람에게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불로장생이므로, 오래 아는 정형외과 전문의의 안심시키는 말들을 인용해서까지 아빠는 소견서를 서랍장 안에 넣어두고서 수술은 고사하고 면밀히 진찰 받는 것 조차 유보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함께 하는 말이,
“간병인 보험은 물론 있지만, ㅇㅇ이 네가 와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 요즘도 바쁘지?”

아빠가 말하지 않더라도 조금 긴 휴가를 쓰려고 이미 마음 먹은 터였다. 요즘도 바쁘냐는 마지막 말에 마음이 무거웠다. 울컥하지는 않았다. 그냥, 밥 잘 챙겨 드시고 주말은 좀 쉬시라고 그랬다. 달리기가 오히려 이롭다는 연구결과가 적힌 논문을 전했다.
담백한 위로를 하는 법을 모르겠다. 언젠가 누군가가, 글을 담백하게 쓰는 것을 권했던 만큼이나 나는 말도 글도 그리고 위로까지도 여기저기에 군더더기를 함빡이나 담아대는 인간이라서일까. 그래서 나의 최선은 언제나 “나 여기에 있어.”였다.
“응, 아빠. 나 여기에 있어!”


상실은, 특히 죽음은, 그 중에서도 아무런 지병 없이 씩씩하기만 했던 이의 죽음은 ㅡ아무리의 상상으로써 매일 같이 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ㅡ더없이 갑작스럽기만 해서 바라보고 있자면 황망하기 그지없다. 그것을 떠올리는 것이 슬픔에 잠기게 할까 염려된다는 이는, 소식을 전해들은 날로부터 열흘 뒤에 한 편의 글을 통해 나를 위로했고 그것은 영영 위안으로 남을 것이다. 염려처럼 잠겨 있더라도 다시 읽노라면 이내 곧 수면 위로 떠올라서는 편안해진다. 살면서 앞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를 할 수 있을까, 그런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그 이전에 되고 싶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관성이었을지 모르겠다. 아빠의 소식을 그 사람에게 다시금 전한 것 말이다. 또 위로 받고 싶다는 어떤 부림이나 버둥으로 읽혔을 수도. 아니었을지도. 뭐가 됐든 그 사람은, 잠시간 말이 없더니 멀찍이서 축하부터 건네 왔다.
‘축하해. 다행이다. 완치율도 높고, 수술하면 생존율이 100%래. 미리부터 침울하지 말고 축하를 하자.’

떠올려 보면, 아빠가 전화로 검진 결과를 일러 주었을 때 내 반응은 시큰둥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 아빠. 나도 그럼 달리기 할 때 심박 200 넘기는 거나 휴식기 평균심박 140씩 나오는 것도 연관이 있으려나?”
“글쎄. 너는 검진에서 뭐래?”
“너무 건강하고 너무 이상 없대.”
“그래. 아빠도 별 일 아닐 거야. 여태 건강히 잘 지내 왔잖아. 건강한 다른 사람들처럼. 이제까지 몰랐으니 앞으로도 몰라도 아무 탈 없을지도 모르고. 소견서는 받아 왔는데 아빠가 일이 많이 바쁘다 보니까 병원을 언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수술하면 쉬게 될 것도 걱정되고. 설이나 여름 휴가에나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마도 아빠는 내가 오래 휴가를 쓰게 되는 데에 생길 부담을 먼저 헤아린 것이겠지. 헤아림의 깊이를 헤아리기에 나는 너무나도 얕다.
“아빠, 나 여기에 있어.”
내 시큰둥함이, 싹싹하지 않음과 애교없음이 아빠를 서운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적는 담백하지 못 한 글을 읽는 누군가가 조금은 하뭇하기를 바란다. 이미 사라진 것들의 여흔이 내 여기에서 영영 함께이기를.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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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4-01-26 23:56:20
심박 너무 높은데 정밀검진 하셔야되는거 아닌가요
익명 / 흠 시간 내서 가봐야겠어요 ㅋㅋ 마음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익명 2024-01-26 22:28:16
주거니 받거니
익명 / 저는 받을 줄만 알아요 ㅋㅋ
익명 / 많이 받으세요
익명 /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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