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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무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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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 말고 또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잠깐이지만 사라지고 싶었다. 아니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나. 꽤 오랜만의 음주가 과음이 될 거라곤 계산하지 못 했던 탓이었다. 그간의 주량을 고려했을 때, 과음이라기보다도 어쩌면 컨디션 난조에 가까웠을지도. 응, 컨디션 탓. 내 탓 아니고.


해가 바뀌기 무섭게 모든 부서가 바빠졌다. 그렇다고 해서 사내 분위기가 뒤바뀔 정도의 혁신에 가까운 전략이 수립된 것은 없었는데, 예년에도 이랬던가 되짚어 보면 글쎄. 작년 하반기와는 다르게 손에 꼽을 정도의 칼퇴근이 날이 갈수록 그리워져 가고 있었다.
“미안, 그 날 야근할지도 몰라.”
“나 그 날은 선약이 있어. 그 다음주도.”
“응, 운동 월수목토.”
“나도 하고 싶어.”
따위의 말들로 섹스 제안을 뿌리치는 날들이 부지기수였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고 나서야 나는 ‘아 존나 강간 당하고 싶다’고 홀로 읊조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무렵에 운 좋게 알게 된 사람을 Y라고 할까, 운이 좋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
1. 성욕을 포함해서 나와 비슷한 정도의 것들을 가지고 있었고
2.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3. 섹스 이외에 여러 가지를 겸할 수 있기도 했다.
왜인지 모르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위축되어 있었다. 때문에 섹스를 마치고서 쪼그라든 자지를 다시 입 안에 넣어 굴리는 일이나 여전히 뜨거운 몸을 상대방에게 밀착하는 일은 없었고, 전술한 여러 일정들 탓에 퇴근을 수 시간 앞두고, ‘오늘 섹스 고?’ 하는 농담을 던질 수도 없었다. ㅡ물론, 그만큼의 값어치 있는 섹스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ㅡ한 번의 섹스(또는 한 시간의 펠라치오)를 하기 위해 최소 하루의 절반을, 또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매번 가장 아쉬웠던 점인데, 해소가 아닌 충족을 위하는 섹스일지언정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 켠의 헛헛함을 나는 이제는 외면할 수 없었다. 어리석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섹스 이외의 것으로 채울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지금껏 본인보다 성욕이 많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을 나보다 상대가 먼저 꺼낸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어쩌면 나보다도 더 바쁜 사람이었고 또 나와 비슷하게 일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Y랑은 주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만났는데 서로의 일정과 일정 사이를 비집기도 했고 때마침 운좋게 비거나 사라지는 일정들을 Y는 고맙게도 대신해 주기도 했다. 섹스를 마치고서 홀연해지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냐만은, 과거의 나는 그랬으나 지금의 나는 아니게 됐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면 3. 평일에의 (어울리지 않게)여유로운 섹스를 마치고서 자정 무렵, Y는 딸기를 넣은 와플이 먹고 싶다며 근처의 카페로 나를 데려가기도 하고, 퇴근길 카페에 들러 사 간 샌드위치를 반씩 나눠 먹기도 했다. 또 하루는 금태가 먹고 싶어진 내가 발견한 식당에서 야무진 식사를 하기도. 차 안에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걸 신경쓰지 않아 주어서, 샌드위치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어서, 그 날 먹지 못 했던 금태를 다른 날에 꼭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해 주어서 고마웠다. 언제고 맛있었고, 항상 맛있게 먹어 주어 고마웠다. 아, 매크로는 신경쓰지 않았다. Sorry, coach.

Y랑 있는 동안에는 시간이 퍽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 좋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벌써 h시야!’ 하는 말을 자주 나눴다.
이렇게 열거하면 만난지 제법 오랜 관계라고 생각되려나, 나는 좀.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한 달 남짓.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한 세 번 만났을 때의 일이던가. 아무튼 처음 술을 같이 마시던 날.


“나 근데 술 좋아해. 신기하지.”
“응. 안 마시는 거 아니었어?”
맞다. 약을 복용하는 중에는 금주. 그러니까, 약을 먹지 않는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그럼 다음에 술 마시자.”
누가 먼저 했던 말이었지. 중요한 것은 주먹고기가 그렇게나 맛있는 줄을 처음 알았다는 것이었다. 최근 알게 된 습관 중 하나가, 맛있는 걸 입에 넣으면 엉덩이를 씰룩거린다는 것. 미간을 찌푸리는 건 안지 꽤 됐는데 말이지.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먹을 땐 좀 가만히 있으면 안 될까?”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
Y는 약장수 같았다. 이따금 술자리에서 센스 있는 사람들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들의 손에 들린 숙취방지용 제리뽀 같은 게 아니었다. 어떤 알약과 분말로 된, 처음 먹어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무어라 설명을 곁들였는데 가만히 듣다가 “얼마예요?” 했던 것 같다.
“배부르게 먹으면 일어날 때 힘들어.”
“맞아, 포만감은 꼭 한 템포 늦게 오더라.”
“딱 좋다.”
“나도. 든든해.”

모찌리도후를 키워드로 검색해서 찾아간 곳은 이미 만석이라 아쉬운 마음으로 문을 등졌는데, 무작정 들어선 곳에 마침 모찌리도후가 있어 우리 둘은 작게 환호했었다. Y는 소소한 것을 좋아하는 듯 보였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던가. 아니면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던가.
성적 흥분감을 행복에 포함해도 좋다면, 행복은 정말 멀리 있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보다가도 문득문득, 휴대폰으로 장난감을 조작하는 통에 나는 Y를 흘기는 동시에 발을 동동 구르며 행복감을 몸껏 표현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택시 안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도.
지금 남은 파편은,
숙소 바로 앞에서 담배가 피우고 싶다고 허락을 구한 일,
그리고 편의점에 들렀던 일,
침대에 오르지 않고 바닥에 누워 옷을 벗지 않겠다고 떼 부린 일.

다음날, (벗기에도)불편한 옷은 벗겨져 있었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다시 감는 일을 열 번은 반복했던 것 같다. 정신을 좀 차리는가 싶으면 내가 내쉬는 술냄새가 고약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곧장 다시 잠에 들지 않으면 전날 먹은 것들을 게워낼 것 같았다. 웅얼거리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체크아웃 시각을 한참 넘겼고 Y가 나를 불렀다.
“옆방으로 옮겨야 한대.”
이미 모든 짐이 옆방으로 옮겨진 후였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보다도 나는 부끄러움을 먼저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와는 상관 없이 모든 게 흐트러져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고, 절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부끄러웠으며, Y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책임지게 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또 웅얼거렸던 것 같다.
눈을 떴다 감았다를 수 차례 반복하면서 보았던 장면은 한 켠에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 Y의 등이었다. 지독한 술냄새가 조금 덜어졌을 때 Y는 다시 그 알약과 분말을 건넸다. 분말을 물에 타서 이온음료처럼 마시니 금세 해독이 되는 듯했다. 사실 금세는 아니었다. 욕조 안으로 거센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멍, 아니 퀭했던 것 같다.
“여기 욕조 엄청 좋다. 입욕소금도 있어.”
“으응, 나는, 쫌만, 더, 응,”
말이 아니고 토막.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내쉬는 숨에서는 술냄새가 잔뜩이었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욕조 속에 더운 물이 가득함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Y는 이미 개운한 얼굴을 하고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만취자 입장 불가’라고, 여느 목욕탕에든 써 있을 법한 팻말을 순간 떠올렸던 것 같다.
정신을 조금 차린 내가 꺼낸 말은, “미안해.”나 “고마워.”가 아닌 “물 다 뺐어? 욕조에.”였다. 미친.
“아니, 아직. 따뜻해 그리고 엄청 깊어.”

욕조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싸구려 와인이나 이온음료 마시는 걸 종종 즐겼다. 담배가 생각나면서도, 이 상태에서 피우면 집에 돌아가는 것이 더 힘들어지리라고 생각했다. 나의 숙취는 어째서 잠으로 오는가.
나는 오래 견디지 못 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내가 개구리였다면 금세 뛰쳐 나가 버렸겠지. 멋쩍은 얼굴로 욕실에서 나오니 전 날 편의점에서 사 둔 주전부리가 그대로였다.
“배고프지?” 여전하게도 나는 미안하다는 말이 없었다. 스스로가 괘씸했다.
“조금?”
“몇 시까지 있을 수 있어?”
“다섯 시랬나.”
답을 듣기도 전에 Y의 자지를 입으로 욱여넣었다. 그것이 내 사과이자 고마움의 표시였을지도 모르겠다. ㅡ발기가 된 대부분의ㅡ평상시라면 어려웠을, 한 입에 넣고 혀로 이리저리 굴리는 일을 나는 재밌어 했다. 얼마 가지 않아 입 밖으로 삐죽 삐져나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건 또 그대로 목구멍을 쿡쿡 찌르는 것이 재밌었지.

아주 오래 된 일도 아니면서 그 뒤에 섹스를 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시간에 쫓기는 허겁지겁의 섹스를 했거나, 입으로 하는 장난으로 마무리를 했거나.
객실을 나서면서 Y의 눈을 보지를 못 했다. 면목이 없었거나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을지도.

“차 빼고 올게. 가방이랑 짐 내 차에 두고 김밥 먹으러 가자.”
아, 기억난다. 어제 비틀거리면서, 월 억대 매출의 분식집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멀지 않은 분식집으로 향하는 길에 먼저 손을 잡아 주어서 따뜻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겨우 이 따위의 따뜻함으로 마음이 홀라당 다 녹아 내리는 쉽고 만만한 년이라는 생각을 머릿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나긋한 Y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응응 끄덕이는 동시에 저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 ‘울다가도 사랑 주면 웃었다’던 가사를 가진 곡을 왜 난 그리도 자주 불렀나.
김밥도 라볶이도 라면도 어묵국물도 맛있었지만 억대 매출의 타이틀은 다소 과대 평가가 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보다도, 식당 한 켠에 들어오는 뉘엿한 노을과 화분들과 잡동사니가 나는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시 차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드디어 미안하다는 말을 했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Y는 제 외투 주머니 안에 내 손을 구겨넣은 채였다.
“그럴 수도 있지.”
이 말이 누군가에게 이리도 무겁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리 자주 사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Y의 외투 주머니가 점점 습해졌다.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http://redholic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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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4-03-02 22:54:18
제목에 1 있었는데
익명 / 오 맞아요 ㅋㅋ 예리하시다 고마워요 굳이 끊어낼 글 아닌 듯해서요 ㅎㅎ
익명 / 재밌는 거 의 Y와 같은 인물인가요?? T, S, H도 재밌게 읽었는데
익명 / 오 ㅋㅋ 네 맞아요 관심 있게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ㅎㅎ 다른 친구들도 별 탈 없이들 지내는 중이에요
익명 2024-03-02 20:28:11
내 뒷주머니엔 새 바지인 냥 실리카겔이 있다 위치를 바꿔서 뒤로
  하나 드리고 싶네요.
잘 읽었어요~~°
익명 / 엇 노래 가사일까요? ㅋㅋ 실리카겔 더러 미니 핫팩이라며 쥐어주던 장난 그립네요 ㅎㅎ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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