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의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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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도모. 어떤 이야기들이 우리를 그리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만, 대화에 있어 카드가 필요하다면 ‘이해’카드를 먼저 꺼낸 것은 네 쪽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넓게는 전쟁의) 이유로 너는 이해 부족을 꼽았고 나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너가 책 좋아한다던 친구 얘기했었잖아. 2층에서 점프했다던. 그 때 내가 얘기했던 내 친구, 그 친구 영향으로 내가 ‘쫌만 더, 쫌만 더.’ 했던 게 있거든.” “응, 영화 좋아한다고 했던 그 분인가.” “응, 책이랑. 나는 영화도 책도 멀리 한지가 오래 됐는데, 그 친구가 내 글을 항상 유심히 읽었었어. 얘기도 되게 잘 들어 주고.” “그러면 좋지.” “응, 좋은 친구야. 그러면 걔가 글 보내 주거나 영화 소개 시켜 주고 그랬거든. 근데 그렇게 읽는 글은 되게 잘 읽혔다. 자기가 쓴 글들도 있긴 한데 어떤 책들에서 발췌한 내용들이 많거든. 나중에는 궁금해져서 산 책들도 되게 많고, 영화들도 찾아서 보고. 그러면 또 그 책들이랑 영화들 주제로 하루종일 얘기하고.” “무슨 책이야? 나도 책 안 읽어. 영화도 안 본지 오래 됐어.” “교수면서 평론가인 사람이 쓴 책. 집에도 몇 권 있고, 이북으로도 있어.” 내가 이북을 통해 마지막으로 읽었던 부분은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였고, 네 손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봉준호’에서 멈췄다. 너는 활자들을 오래 눈에 담다가, “재밌다. 나도 나중에 사서 읽어 봐야겠다.” “응, 그 친구가 자기는 앞으로 만날 사람을 위해서 공부한다고 그랬는데 그게 지금 너가 말하는 거랑 되게 비슷해서 생각났어. 이해의 도모. 사람 공부.” “사람 공부.” “그 친구 만나면서 ‘쫌만 더’했던 게 나는 이해였어. 아직 한ㅡ참이나 모자라고 더러운 성격 어디 안 가니까 맨날 짜증내고 화내긴 하는데, 되게 많이 바뀌었어. 전엔 진짜 개지랄이었다.” “나도 지랄 많이 해. 이해 좋지. 좀 뭐랄까, 사람이 차분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 나도, 상대방도.” 이해는 사람을 말랑하게 한다. 하는 사람이건 받는 사람이건 그렇다. “어느 여행유투버가 해외에서 브이로그를 찍었는데 직원이 퉁명스럽더래. 근데 그 유투버는 같이 짜증내는 게 아니라 그냥 오히려 더 상냥하게 대했더니 나중에 직원도 같이 착해졌다더라.” 화는 포용에 녹는다. 얼마나 단단하더라도 언제가 됐더라도 기필코 기어코 녹는다. 가끔이지만 아직도 나는 유투브에 ‘지하철 포옹’을 검색해서 멀뚱히 쳐다보곤 한다. “멋지다. 그리고 나도 비슷한 경험 있어.” “쾌감 쩔었겠다.” “음, 응. 근데 너랑 하는 게 훨씬 더.” “뭘?” 너는 능청스러웠다. 어느 주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모를 바텐더가 말을 걸어 왔다. 혹시 내 목소리가 컸나. “두 분은 애인? 만나신지 얼마나 됐어요?” 흠칫했다. 내 동공이 흔들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나는, “두 달 조금 넘었어요.” 두 질문 중 하나에만 답했다. “어휴, 두 달이면 아주 도파민이 장난 아니시겠어요.” “네, 뭐, 도파민, 음.” 나는 네 얼굴을 보고 웃었다. 조금 쑥스러웠다. “그치, 도파민에 그냥 절여졌지.” “절여졌어?” “응. 튀김이야, 아주.” 너도 빙그레 웃었다. “니글거리겠다. 에어프라이어 돌려야지.” “세로토닌으로 간 하고.” 내 헛소리를 너는 항상 받아쳐 주었다. “요즘은 다들 어떻게 만나나 몰라요. 여기 바는 처음 오신 거예요?” “저는 오래 전에 한 번 왔었고, 이 친구는 제가 데려 왔어요.” ‘이 친구’. 남자친구라고 하지 못 했다. 미안할 필요 전혀 없는 미안함이 엄습하려고 했다. “그러시군요. 소개팅 마지막으로 받은 게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이제 까마득해요. 특히 저희 업계는 판이 좁아서 헤어지면 답도 없으니까, 일하면서 만나는 건 꿈도 못 꾸고 손님을 만나는 것도 어려워요.” 바텐더의 미간에 잡힌 주름을 물끄러미 쳐다 봤던 것 같다. “저도 소개팅은 받은 적 없어요. 너무 궁금해서 한 번쯤은 받아 봐야지 했는데.” 올해의 목표를 딱 하나 정한 게, 소개팅 36번이었다. 그리고 연결되는 목표는, 목표를 다 채우지 못 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달에 3명씩은 만나야 했는데, 벌써 3월 중순. 이제는 달에 4명씩은 만나야 했다. “그러시군요. 동호회 이런 걸로도 많이 만나나 봐요, 요즘 사람들은. 그럼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내가 느끼기에는 경로에 대한 반복된 질문이라서 꽤 노골적이라고 생각했다. 너도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이번의 답변은 너였다. 조금 가로챈 것 같기도, 머리 굴리고 있는 내 속을 들여다 본 걸지도. “소개로 만났는데, 아 소개는 아니고 비슷하게, 친구랑 술 마시다가 아는 사람 불러내서 같이 마시고 뭐, 그렇게 알게 됐어요.” 너는 거짓말을 잘 못 하는 타입이었다. “그러시군요. 그렇게도 만나나 봐요. 아는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더 이상 바텐더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고, 너와 나란히 앉기를 잘했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아마 네 표정이 보였더라면 나는 말을 더듬었을 테고, 내 표정이 드러났더라면 너 역시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 봤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버터 리큐르로 만든 바 시그니처 칵테일이 정말 맛있다며 우리는 입을 모아 감탄했다. 내가 아주 오랜만에 마신 압생트보다, 네가 바텐더로부터 권해 받아 마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미국에서 생산된 위스키보다도 더. 다음날 점심을 먹은 이후에도 우리의 찬미는 이어졌다. 잠시 새는 얘기 하나 하자면 알려지기를, 압생트에 함유된 어떤 성분에 중독된 반 고흐가 결국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스스로의 귀를 자르기까지에 이르렀다고 하던데, 요즘에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쪽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당시 압생트의 주원료였던 향쑥이 환각을 일으키려면 너무도 많은 양이 필요했다는 거지. 그러니까, 으레 알려진 ‘졸피뎀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과 비슷한 괴담 같은 것. 향쑥에 중독되어 귀를 잘랐다기보다도 오히려 알코올중독이 더 신빙성 있다고들 하더라. 졸피뎀도 그렇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는다고 해서 치사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평상시 억제하고 있던 충동ㅡ이를 테면 자살기도ㅡ을 행하게 해서 사고가 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했다. 내가 다니는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술의 유일한 장점으로 ‘탈억제화’를 꼽았던 것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참이었다. 아직 밤바람이 찼다. 바의 출입문을 밀어내면서 너는 이제 태연스럽게 겨드랑이를 살짝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네 습하고 따뜻한 겨드랑이에 손을 수욱 집어넣고. 그렇게 한동안을 걷다가 내가 혼잣말로 “손 시려.” 중얼거리면 겨드랑이에 끼워진 손을 빼다가 외투 주머니에 곧장 넣어 주물럭거렸다. “그 칵테일 진짜 맛있다, 진짜.” “버터 리큐르 쓰셨다던데 검색해 보면 나올 것 같아.” “해 먹고 싶다. 맛있어.” 돌이켜 보면 너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곧잘 좋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시도한 버번 위스키, 금태, 코르셋, 라슨 벤치프레스, 골드키위와 체리, 야구게임과 스도쿠, Burden, 내 글. 어쩌면 너와 나의 취향이라기보다도 내 편향된 기억 방식이 고마움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또 너는, 내가 좋아할 법한 것들을 종종 제시했다. 전통주 시음회, 딸기와 떡, 목줄, 닭알탕, 쓰리썸, 종이접기, Can’t stop, 위플래쉬, 그리고 ‘왜’. “애기들 혼내는 보호자들 있잖아, 그거 그 안에서 자기자신이 보여서 그런 걸 수도 있다고 그러더라.” 주택가 골목에서 호통하는 소리와 아이 울음이 크게 울리는, 술에 전혀 취하지 않은 늦은 밤이었다. “아, 투사. 응. 나도 바로 최근에 같은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였는데?” “어- 누가 물어보더라, 싫어하는 사람 있느냐고.” “있어?” “응, 있다고 했더니 그럼 왜 싫어하느냐고 다시 물어봤어.” “왜?” “그 여자가 나를 존나 싫어해.” “왜?” “나도 그걸 모르겠어.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나한테는 눈 뒤집고 덤비던데.” “왜지?” “나도 궁금해서 직접 물어봤는데 ‘난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답만 반복돼서 그냥 내 짐작인데, 탈취한다고 생각했을지도?” “탈취?” “그 여자가 짝사랑하던 남자랑 섹스했거든. 알고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 남자가 나중에 그 여자한테 가서 나 만났다는 얘기를 했었대.” “뭐야. 지혜로운 거 맞아?” “나한테 하는 짓만 빼면, 뭐.” “너는 그럼 그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가 ‘그 사람 속에서 너 모습이 보여서’가 아니네.” “음. 아니지는 않지 않을까? 그 구석에 내가 분명 없진 않을 것 같은데. 모르겠다.” “근데 너는 그 남자가 그 여자한테 너 얘기한 거를 어떻게 알았어?” “그 남자가 나중에 말하더라고. 그 여자한테 내 얘기했다고. 의아한 게, 그 여자가 그 남자한테 말하기로는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그랬다더라.” 너의 ‘왜’는 그제야 거기에서 멈췄다. 그리고 도달한 편의점, 네가 안주로 집어든 생크림 케이크는 내가 제법 좋아하는 것이었다. 1+1 행사중인 꺾어 먹는 요거트도 마찬가지로, “이거 이직하기 전 회사에서 자주 먹었어. 급량비 다 써야 하니까.” 너는 짐빔과 잭다니엘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 보였다. 꽤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뒤로 하고 내가 고른 건 왕꿈틀이. 준비물대로, 다소곳하고 조촐한 술파티가 있길 바랐다. 그래서 가지런하게 옷을 벗고 소지품을 차곡차곡. 그런데 너는 다소곳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하나씩 펼쳐 개키던 나를 돌려 세우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눕혀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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