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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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은 픽션입니다. 세상에는 호기심 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명석한 두뇌, 자신감 있는 어투, 세상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 툭툭 숨 쉬듯 내뱉던 철학까지. 달변인데다가 창의적이고 통찰력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신뢰하게 되는 특색이 있는 사람이 있다.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내게 좋은 사람이란 선하고 정의로움이 아닌 똑똑하고 잘난 사람인 게 보이는 사람. 친해지면 재미있을 것 같고 알아두면 좋은 사람. 왠지 나에게 호의적일 것 같고 뒤끝 없이 쿨할 것 같지만, 정도 많은 사람. 일반적인 여자와는 다르게 합리적으로 뻔한 말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 똑 부러지는 모습이 매번 신선하게 보이는 사람. 사랑까진 아니지만 인간 대 인간의 호기심은 주위에 맴돌게 했다. 간혹가다 둘이 대화의 기회가 있을 때면 인생이니, 연애니, 사회와 미래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그녀의 감정은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아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곧잘 통하던 우리는 딥한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그렇게 쿨한 남사친 여사친이 되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을까, 열댓 명 정도 대학 동기들끼리 일본 나가노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예전부터 매 겨울마다 일본에 수시로 드나들었던 나로서는 나가노에서의 여행은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금요일 저녁에 오사카에서 나고야까지 장장 450km의 거리를 야간 버스를 타고 새벽을 쉬지 않고 달려서 도착한 뒤, 근처 주변을 이틀 내내 돌아다니고 저녁에 다시 야간 버스를 타고 새벽 비행기로 돌아오는 1박 3일의 가혹한 여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였으니까 가능했던 몸을 혹사하는 스케쥴이었다. 공항에서 저녁 10시쯤 터미널에서 차례차례 버스에 올라탔다. “혹시 내가 여기 앉아도 될까?" 먼저 앉은 나의 빈 옆자리를 보고, 다 짝을 맞춰 앉은 다른 친구들을 보더니 그녀가 내 옆자리에 가방을 털썩 놓았다. 은근히 기뻤지만, 티를 내지 않고 "그래" 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우리는 새벽 내내 옆에 앉아 가게 되었다. 버스는 동이 트고 나서야 나가노에 도착할 것이고, 우리나라 일반버스 정도 밖에 안되는 꽉 찬 버스에서 우리는 어떻게라도 잠을 청해야 했다. 다음 날 빡센 스케줄을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이런… 그녀의 어깨가 내 어깨와 딱 맞붙어 있었다. 좌석이 좁은 턱에 그녀와의 육체적인 거리는 사뭇 가까웠다. 신경 쓰이는 강제 스킨쉽이 불편했지만, 결코 싫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어깨와 어깨를 맞닿은 채 잠을 청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녀의 온기가 내 어깨를 타고 전해왔다. 잠을 자려고 뒤척여봤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 어깨를 닿지 않으려고 최대한 창가 쪽으로 내 몸을 움직여 본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 손, 어깨, 그 모든 것이 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의 남녀가 이 정도 거리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6시간을 같이 있는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덜컥 손이라도 잡고 싶었다. 나의 왼쪽 허벅지와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는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었다. 그녀도 우리의 맞닿음이 어색하고 불편했는지 몸을 꿈틀거렸다. 서로의 접촉을 느낄 수 없는 편한 자세를 찾아보려 둘 다 부단히 움직였다. 몇 시간째, 나는 그녀가 나랑 똑같이 잠을 청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버스는 고요한 고속도로를 몇 시간째 질주하고 있었다. 뒤척이다가 지쳐 너무 잠이 와서 비몽사몽 해지니 이 두근거림이 원망스러워졌다. 젠장, 그녀가 옆에 앉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나는 곯아떨어졌을 텐데. 하필이면 내 옆에 앉는 바람에 잠이라는 건 물건너갔다. 그렇게 어깨를 맞닿은 채 6시간을 자는 척하며 지샜다. 깜박 잠이 들었는지 어느샌가 우리 둘의 어깨와 다리는 이상할 만큼 닿아 있었다. 피곤했지만 그 이상한 설렘은 원망보다는 서서히 즐기면서 느끼고 있었다. 가슴이 뛰고 몸이 뜨거워졌다. 그녀도 싫지 않은지 굳이 몸을 떼어 내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드라마의 남주 여주처럼 서로 달려들어서 키스하고 무언가 액션을 취하는 것 보다 이 Subtle한 접촉이 10배는 더 야하게 느껴졌다. 나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나가노에 도착했다. 첫날 일본 신사부터 시작해 우동 맛집까지 갔다가 나가도 스키장에서 생애 처음으로 스노보드에 도전했다가, 엉덩이가 깨질 듯한 아픔을 경험하고 이건 안 되겠다 싶어 대충 썰매로 전향했다. 나가노의 파우더같이 부드러운 자연설을 가로지르며 썰매로 활강하는 그 기분은 마치 게임을 하는 듯한 스릴도 있었지만, 스키를 타는 친구들에게는 놀림과 비웃음을 당했다. 아마도 그녀가 썰매에 호기심이 많아서 같이 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엄청나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료칸으로 향했는데 료칸에서 즐기는 야외 온천탕은 추운 겨울 아래 포근함을 느끼는 그야말로 여행의 클라이막스였다. 온몸이 멍이라도 든 듯 몸 전체가 찢어질 것같이 아팠다. 온천탕이 없었다면 아마 상태는 더 안 좋았을 것이다. 극도의 피로감을 앉고 다시 6시간 발도 뻗지 못하는 버스에서 다시 이 긴 밤을 보낼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버스에 들어서자마자 복도처럼 가운데 두고 당연한 것 처럼 반대쪽으로 나눠 앉았다. 누군가 내 옆에 가방을 두고 앉는 것 같았지만 확인할 생각도 없이 눈이 감겼다. 그녀가 내 옆에 앉았는지 더 이상의 두근거림이나 신체적 자극은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직 버스 안에서 잠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음을 바랄 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누구와 같이 앉았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곯아떨어져 있었다. 모든 친구들이 다 그랬다. 우리는 우리의 20대의 팔팔함을 불태웠다. 버스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내게 완전 엉켜있음을 나중에 알았다. 그때 처음으로 그녀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하고 각자 다른 분야 다른 지역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로를 볼일이 없어졌지만, 근처라도 갈 일이 생기면 그녀에게 자주 연락을 했다. 그녀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독립을 했고 내가 야근에 출장에 막차까지 시간이 늦어질 때면 가끔 자기 집 구석에 누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가난한 사회 초년생에게 이런 베네핏은 거절할 수가 없다. 좁지는 않은 집이었지만 침대는 하나뿐이었고, 비록 맞닿아 있지는 않아도 그렇게 우리는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는 것에 오래간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때가 되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녀는 아직 곤히 자고 있었지만, 밤에는 잘 볼 수 없던, 너무나도 궁금했던 그녀의 사생활이 차근차근 내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부터 작은 소품 하나하나를 천천히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탐구했다. 내가 마치 판타지 영화에 주인공이 된 것처럼 시간과 공간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궁금했던, 알고 싶었던, 열망했던 그녀의 아지트를 무한한 호기심으로 들여다보고 그녀를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날 아침에 들었던 내 느낌과 내가 찾은 그녀의 단서들은 나만 간직하고 있는 걸로 해야겠다. 그녀에 대한, 인간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대학 4년간부터 계속되었지만, 그날을 마지막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4년 동안 그녀는 남자친구도 몇 번 바뀌었고, 주변에서 맴도는 나는 그녀와 연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원해보지도 않았었다. 아마도 그녀는 뭔가 내가 근접할 수 없는 이상의 존재였고, 사랑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섬세한 존재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강렬하게 원했다. 그날의 어깨에 닿았던 감촉, 나와 그녀의 심장 소리, 뒤척거림은 인생에서 몇 번 맛보지 못한 애틋한 쾌락에 근접했다. 아마 육체적인 끌림이었을까, 아니면 한 인간을 알고 싶은 나의 강렬한 소망이었을까. 그녀의 소품 하나하나에 나오는 누군가의 존재는 그녀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하지도… 명석하지도… 여리면서 약한 그저 내게만 강하고 잘난 사람일 뿐이었다. 30대가 되면서 나도 독립했고 그녀와 연락할 거리가 없자 조금씩 멀어졌다. 그녀의 소식이 이따금 궁금해진다. 그 흔한 소셜미디어도 안 하는 그녀의 프로필을 가끔씩 뒤져본다. 성숙해지고 여유 있는 모습. 복잡하고 신비스러웠던 그녀는 예전보다 어떻게 변해있는 걸까. 그녀에게 그날의 그 버스를 기억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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