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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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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나는 일본에서 만 9년정도 살다가 왔지만, 사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9년이라는 시간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속속들이 파악할 정도로 엄청나게 긴 시간은 아니지만, 보통 9년 정도 살다가 왔다고 하면 일본을 굉장히 좋아하는 줄 아는 데 그렇지가 않다. 사회 시스템,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일본 사회에 퍼져 있는 한국인들 커뮤니티 등등. 사실상 부정적인 기억이 더 많았다. 
 
하지만 몇 안되는 ‘좋았던’ 기억 중에 일본의 봄은 무조건 들어가 있다. 어디를 가도 만발해 있는 벚꽃과, 시기마다 열리는 지역 축제들, 봄의 밤공기를 마시면서 하는 노천 온천, 노을이 지는 기차길에 뿌려졌던 늦봄의 벚꽃잎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유학생들도 유독 봄에는 외출과 만남이 잦아진다. 오랫동안 일본에 유학한 사람들은 이야기가 다르지만, 일본어를 못해서, 또는 만남의 장이 없어서 일본인들과 소통을 할 수 없는 랭귀지 스쿨의 뉴비 유학생들은 지들끼리 눈 맞고 헤어지고 엉엉 울고 아주 난리통도 아니다. 
 
어쨌든, 봄이라는 것은 새학기를 의미하기도 했고, 앞서 언급했듯 단기 학생이 많다는 특징을 가진 우리 어학원에도 새롭게 입학한 학생들이 내가 공부하는 반에 들어왔다. 
 
그녀는 갈색 단발머리에, 키가 작은 편이었다. 늘 화장기 없는, 누가 보면 신림동 고시생 같은 쌩얼로 학교에 등교했는데, 피부가 아주 하얗고 눈이 동그란, 귀여운 얼굴이어서 화장기 없는 얼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모자를 쓰고 학교에 왔는데, 모자 종류만 한 몇 백 개는 되는 것 같았다.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아 책을 놓는 중에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립밤을 바른 듯 굉장히 촉촉해 보이는 귀여운 입술에서 그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뭘 꼬라 보노?”
 
“……”
 
새로 온 단기 학생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시작될 일본에서의 유학생활과 학교 생활을 기대하며 저마다 수다를 떨던 교실이 그녀의 한마디에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하기야, 뭐 일본에서 지내다 보면 별에 별 애들이 다 있는 법이니까,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한데, 나는 학창시절에 공부로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공부에 소질도 관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일본에 와서 어학원 선생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만큼 열심히 했고, 남들보다 늦었다는 마음에 절박한 것도 있었다. 심지어 일본어를 연습하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본 적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덩치를 보고 마이클 잭슨처럼 뒷걸음질 쳤다. (특히 여성분들.)
 
적어도 그 때만해도, 나에게 일본의 봄은 낭만과 설렘의 시기는 아니었다. 길거리를 걸어갈 때도 단어장이 들려져 있을 정도였으니 봄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다만 쉬는 시간에 어학원 옥상에 올라와 담배를 피우며 멀리 보이는 경치를 구경하는 것이 다였다. 
 
“어우 코 간지러.”
 
나는 연신 코를 비비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학원의 평균연령이 굉장히 낮았기 때문에 – 오죽하면 당시 20대 중반이던 내가 맏형인 경우가 많았음- 옥상에 담배 피우러 오는 사람은 그때 까지만 해도 내가 거의 유일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옥상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야. 불 좀 빌려 주라.”
 
고개를 돌리니 아까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물고는 나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뭘 꼬라 보냐 더니 말투가 공손해 지셨네?”
 
“미안하다. 내보다 오빤지 몰랐지.”
 
“너보다 동생이면 눈 마주치면 늘 그러시나봐요?”
 
“아 좀! 불 안 줄끼가?”
 
일본 어학원은, 신입학생들이 들어올 때마다 각자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시킨다. 이것은 비단 어학원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 있는 거의 모든 집단에서는 새로운 만남은 전체 구성원의 자기소개로 이어진다. 9년동안 일본에 살면서, 한 5만번은 자기소개를 한 것 같다. 
 
어쨌든 그녀는 1교시에 내 자기소개를 듣고, 자기보다 오빠인 것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평균 연령이 낮은 이 어학원에서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자기보다 어리다고 생각한 듯했다. 나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있던 담배에 빨갛게 불이 붙었다. 그녀는 나처럼 난간에 기대어 서더니, 아주 천천히 담배를 음미하 듯 피웠다. 
 
“와? 아직도 삐진나? 여기 애들이 나이가 다들 어리길래 오빠도 그냥 노안인 줄 알았다. “
 
“그거 화 풀어주려는 의도냐 아니면 더 긁는 거냐?”
 
내 말에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외모만 봐서는 십자수를 즐겨하는 모범생 같이 순진한 얼굴인데, 능숙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니까 이상한 퇴폐미까지 느껴졌다. 묘한 기지배였다. 
 
“오빠는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노?”
 
“몇 개월 안 됐어. “
 
“근데 벌써 일어를 글케 하나? 원래 공부 했었나?”
 
“아니 여기와서 히라가나부터 시작했어.”
 
“와 맞나? 그게 가능하나?”
 
“존나게 하면 가능해.”
 
“보기와는 다르게 범생이네?”
 
“내가 보기에는 어떤데?”
 
“됐다. 들어가자.”
 
“야 왜 말 돌리냐?”
 
그것이 그녀, 하림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굉장히 유쾌하고 발랄하며, 내가 일본생활에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똘끼가 충만한 4차원 이었다. 그러니까, 언제나 차분한 지수와는 정 반대되는 아이였다. 첫 만남에서 보다시피 입이 매우 거칠고 남한테도 거침없이 말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반대로 어느정도 친해진 후에는 남이 자신에게 욕설 섞인 농담을 해도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오빠 니 빙신이가? 이것도 모르나?”
 
“그러는 너는 대가리에 똥이 드셨나요? 너도 몰라서 나 한테 물어보신 거 아니신가요 등신아?”
 
“어 그래 맞다. 똥 찬 머리냄새 맡아 볼래? 어제부터 안 감았다.”
 
“야 머리에 페브리즈 뿌리기 전에 치워라. 공부 방해된다.”
 
뭐 이런 식이었다. 마치 10년지기 사내놈 들끼리 나눌 법할 대화가 난무해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깔깔 대며 웃곤 했다. 이런 스타일의 대화는 아침 등교 후 교실, 쉬는 시간의 옥상, 집에 가는 길에서 자주 계속 되었다. 
 
사실 그녀와 내가 친해진 계기는, 그녀의 특이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다. 내가 있는 반은 입문반보다 두 단계 정도 높은 반이었다. 하림이는 한국에서 일어 공부를 어느정도 하고 왔기 때문에 입학시에 레벨 테스트를 거쳐 지금의 우리 반에 들어온 것이었는데, 굉장히 특이하게도 그녀는 유창한 회화실력을 가진 반면에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처음에는 그것이 뭔가 악보를 볼 줄 모르는데 작곡하는 천재 간지가 나서 흥미로웠는데, 나중에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많은 책으로 독학을 한 탓에 그녀와 반대로 회화 보다는 문법과 한자에 강한 내가 그녀를 수업시간 마다 도와줘야 했기 때문이다. 
 
뭐 아는 사람은 알지만, 일본어는 세 가지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히라가나와 카타가나, 그리고 한자이며,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에 한자는 문장의 구독점 역할도 수행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한자를 모르면 일본어를 읽기에 매우 큰 제약이 있다. 어린애들이 읽는 동화책 말고는 히라가나로만 이루어진 문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일본에서 읽고 쓰려면 한자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하림이의 경우, 회화 실력은 지금 우리반 보다 몇 단계 위로 가야할 것 같은데 문자가독 수준은 입문반과 비등비등한 수준이었다. 회화가 그냥 유창한 것이 아니라, 정말 유학생은 절대 알 수가 없을 것 같은 단어도 구사해서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하기 일쑤였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 유학 온 외국인이 “봄바람이 살살 부니까 사타구니가 존나 간지러워. 환절기 오지고 지리는 각 인정?” 뭐 이런 식으로 말하는 느낌인 것이다. 다만 아주 쉬운 문장도 버벅 거리면서 읽거나, 히라가나도 헷갈려 하거나 했으며, 한자는 아예 모르는 수준이었다. 정말 지 성격대로 공부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와 하림이는 첫만남에서부터 친해져서 매번 수업시간에 나란히 앉아 공부를 하게 되었다. 떨어져 앉으면 내가 그녀에게 단어의 읽는 법을 가르쳐 줄 수 가 없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다른 어학원아이들 하고는 말도 잘 섞지 않았다. 그러니 도와줄 사람은 나 뿐이었을 수 밖에. 왜 그렇게 인간관계에 담을 쌓냐고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뭐 하러 친구 만드노? 귀찮기만 하지. 하나만 있음 된다.”
 
정말 그 말 대로,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 까지 우리반에서 하림이와 친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편협한 인간관계 대신에 그녀는 그 한 사람에게 (자기 나름대로) 굉장히 의리 있던 여자인 걸로 기억된다. 
 
우습게도 어학원에도 나름의 조별과제 같은 것이 있었는데, 나와 그녀, 그리고 다른 한국 여자아이 둘이 우리 조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가위 바위 보에서 진 하림이는 우리 조 조장이 되었고(사실 가장 발표하기 좋은 일본어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녀는 엄청 툴툴 거리며 나보고 대신하라고 했지만 내가 들어줄 리가 없었다. 다만 그녀의 편협한 인간관계는 조별 과제 때 그 빛을 발했다. 
 
“아 몰라. 귀찮다. 그냥 이렇게 하자. “
 
“야 그래도 그건 너무 성의 없잖아. 다른 애들도 뭐라고 하고.”
 
“아 몰라. 그러게 누가 내 조장 시키라 했나? 그냥 이렇게 하자 귀찮다.”
 
“아 이 독재자 새끼야.”
 
내 말에 하림이는 시크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오빠야. 원래 조직이라는 건 리더가 딱 이케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 조원 아들 얘기 다 수용하면 그 조직이 뭐가 되겠노?”
 
“민주주의 이 년아.”
 
우리 둘의 대화에 다른 아이들은 그냥 멀뚱멀뚱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친한 것 같은데 매번 투닥거리니 다른 아이들도 신기한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조원 아이 중 한 명이 하림이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언니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언니는 맨날 술 마셔요?”
 
“뭐라카노?”
 
“아니 아침마다 술 냄새가 나서요. 술 좋아하세요?”
 
어? 생각해보니까, 매일 나도 하림이에게서 술 냄새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뭐랄까 특유의 여자 향기? 와 은은하게 섞여서 그렇게 불쾌하다고 느낀 적도 없을 뿐이었다. 하기사 하림이 성격을 보면 왠지 애주가가 어울린다. 
 
“아이다. 됐다. “
 
그런데, 그 별 거 아닌 질문에 하림이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술 마시는 걸로 부끄러워 할 아이가 아닌데, 황급히 말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별 과제 선정 때문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지만, 똘끼 넘치는 그녀의 성격을 이미 파악한 나는 하림이의 애매한 반응이 조금 수상했다. 
 
나는 이게 무슨 글자냐며 책을 보고 투덜거리는 하림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한결 같은 맨 얼굴. 동그란 눈에 도톰한 입술.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를 가진, 누가 봐도 귀엽다라고 할 법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하림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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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186넓은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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