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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다이어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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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axi driver]

저녁 밤 공기가 차갑게 가라 앉았고, 그녀는 내 앞에 앉아 동그란 눈망울로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무슨 용기였는지 나도 그녀의 눈을 같이 바라보았지만, 이내 어디론가 내 몸이 깊숙하게 잠기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조용한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용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이대로 그녀를 보내면 난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 아니었다. 여자에 관심을 둘 수 있는 시기도 아니었고, 또 관심을 두면 안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성을 만날 수 있는 자리 혹은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정말 진부한 사랑고백의 한 소절처럼 나는 만 하루도 안되는 시간에 그녀에게 빠지고 말았다. 되짚어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버스 정류장에 그녀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내 가슴은 크게 동요했다. 세상에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은 분명히 있다. 지금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내가 살아있는 증거나 다름없다. 
 
“신기하네요.”
“뭐가요?”
“이런 식으로 같이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시는 게 처음이거든요.”
 
그녀의 말에 나는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다이어리 하나 찾아 주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녀는 살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
 
보통의 선술집과는 다르게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그 곳에서, 우리는 다시 서로의 이야기와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녀는 내가 하는 음악에 대해 하나씩 물었다. 나에게는 전부지만, 남들에게는 정말 보잘것없는 내 일상에 귀를 기울여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게 설령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 지라도, 그게 정말 진정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최근에 이직했어요. “
“그럼 원래는 어디서 일 했었는데요?”
 
그녀는 살짝 웃더니 몇 개의 회사 이름을 이야기해 주었고, 그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도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회사들이 그녀의 입에서 등장했다. 붉은 융단 같은 그녀의 커리어에 비해, 마치 공원의 돗자리 같은 초라한 내 커리어가 부끄러워 졌다. 
 
“그런데 왜 이직을 하셨어요?”
“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정말 좋은 회사에 다니셨으니까.”
 
그녀는 내 말에 한 동안 대답을 하지 않더니, 이내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며 말했다. 
 
“재미가 없으니까요.”
“재미요?”
“네.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고 해도, 정해진 매뉴얼 대로, 상부의 지시대로, 규정대로 일 하는 건 재미 없는 시간 죽이기니까요.”
“지금은 어떤데요?”
“지금은 다르죠. 내 의견이 회사의 방향에 조금이나마 반영이 되고, 내 의지나 능력이 회사의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니까.”
 
그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멋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막 30대가 되었을 뿐인 그녀는 회사 내에서도 빛 나고 주도적인 사람이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차분한 음색을 들으며 두근 거리는 가슴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 숨기는 것 뿐이었다. 
 
“그럼 주로 주말에는 뭐 하세요?”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이제는 귀엽기 까지 하구나 라는 바보 같은 내 생각을 알리 없겠지?
 
“책을 읽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영화를 보거나? 아! 필라테스를 하러 가기도 해요. 저는 사실 예쁜 옷을 입고 하는 운동을 좋아해서요.”
 
입을 가리며 웃는 그녀를 보며, 나는 ‘남자친구’ 혹은 ‘애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것에 안심했다. 하기사 그녀가 남자친구가 없다고 해서 나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그냥 좋아하는 연예인이 열애 기사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류의 바람이었다. 그래. 나는 아마도 절대 리즈의 남자가 될 수 없을 거야. 
 
“그러는 그 쪽은? 뭘 하는데요?”
“아, 저야 사실 회사원이 아니니까……주말과 평일의 경계가 없어요. 똑 같은 것 같아요. 음악을 듣거나, 혹은 만들거나, 공연을 다니거나……”
“그렇구나. 여자친구는 안 만나요?”
“네?”
“애초에 이 질문의 의도는 그런 것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몸을 움찔하며 또 얼어버렸다. 내 기분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내 마음을 들었다 놓은 그녀는 정작 생글 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왜 그녀에게 단시간에 빠져 버렸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인생에 ‘나’를 위한 시간을 점점 잃어버리며 방황하던 그 시기에, 그녀는 내가 살아 있음을 빠른 시간에 직감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 심장은 아직 건강하게 뛰고 있으며, 음악이 아닌 다른 것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 여자친구 없어요. 단 한 번도 있던 적이 없어요.”
 
내 말에, 그녀는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네.”
“정말로?”
“네에.”
“단 한 번도?”
“…네…”
 
그녀는 큰 눈을 껌벅이다가, 갑자기 내게 잔을 들이밀며 건배를 했다. 뭐지 이 내일 군입대 하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은?
 
“그 동안 어떻게 살았어요? 스물 아홉이잖아.”
“뭐……어떻게 살아 지던데요.”
 
이게 뭐라고 갑자기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찌질한 짝사랑 역사에 대해서는 굳이 꺼내지 않는 게 좋겠지? 어차피 그 역사에 이제 곧 그녀도 포함될 것이니까. 
 
나는 화제를 돌려, 그녀의 연애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지금은 혼자라고 말을 했고, 헤어진 지 몇 개월 정도 되었다고 했다. 나는 한심하게 리즈의 엑스를 부러워했다. 지금 같이 있는 건 그가 아닌 나인데도, 그는 과거에 적어도 그녀를 가져봤던 사람이니까.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해요? 한번도 안 사귀었다는 건 눈이 높다는 것 같은데. ”
 
그냥 지나가듯이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라고 말을 할 뻔했다. 
 
“뭐 말 잘 통하고……잘 모르겠어요 사실.”
 
그녀는 내 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배가 불러서 예의상 시킨 마른 안주를 집어 들었다. 
 
“그럼……어떤 남자 좋아하세요?”
“저요? 음……”
 
그녀는 얼굴에 턱을 괴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요. 나는 섹시한 사람이 좋은 것 같은데.”
“섹시한 게 어떤 건데요?”
“잘 모르겠어. 외모적으로 어깨도 넓고 남자 답고 이런 것도 좋고……그냥 분위기가 섹시한 남자도 좋고.”
 
순간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확 하고 들어갔다. 구부정한 자세가 자동으로 교정이 되는 듯했다. 그녀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숨죽여 웃는 게 느껴졌다. 괜히 창피하네. 티 내지 말 걸. 
 
술의 힘인지, 나 답지 않게 뻘쭘한 상황을 만들지 않고 대화는 잘 이어나가 졌지만, 역시나 아주 가끔은 둘 다 말이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들이킨 맥주가 테이블에 하나 둘 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나 궁금한 거 있어요.”
“뭔데요?”
“여자친구가 없었으면……그 동안 어떻게 풀었어요?”
“뭘요?”
 
내 질문에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되 물었다. 
 
“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뭐라고 생각해요?”
“네?”
 
갑작스럽게 변한 질문의 형태에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그리고 유독 반짝이는 그 예쁜 입술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착실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럼, 그 돈을 벌어서 무엇에 쓰나요?”
“누군가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먹는 곳에 쓸 수도 있고…저 같은 경우에는……”
 
그 이후로 이상하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러게. 나는 돈을 벌면 무엇에 쓸까? 좋은 음악 장비를 사고 그 딴 것 말고, 내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나는 그 돈을 어디에 쓸까? 말문이 막힌 나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사실 인간이 느끼는 행복의 본질은 굉장히 단순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
“단순하다구요?”
“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
 
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결국 기본 욕구를 윤택하게 하게 싶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봐요. 식욕, 수면욕, 성욕.”
 
그녀, 리즈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응시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맞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는 여태까지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자리를 잡고, 대중에게 많은 노래를 발표하는 사람이 되길 원했는데, 그 바람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그것이 내 삶의 근원적인 욕구가 되지는 못하니까. 도구일 뿐이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여자 친구가 없었다면 근본적인 욕구 중 하나를 해결할 수 없잖아요.”
 
나는 그녀의 노골적인 질문에 놀랐다. 저런 예쁜 얼굴을 하고, 게다가 저런 조신하고 청순한 얼굴로 성욕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그……글쎄요. 그냥 참고 살았었나 보네요.”
 
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장난스런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럼 완전 새 거네요. “
 
나를 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부적을 붙인 강시처럼 몸이 얼었다. 강아지 같았던 그녀의 얼굴이, 눈 앞에 쥐를 둔 고양이 처럼 변했다는 착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 통화를 했던 형처럼 내가 여자 경험이 많았더라면, 나도 아마 노련하게 이 분위기를 이끌어 그녀에게 받아 쳤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마 맥주가 아니라 도수 높은 위스키를 병으로 들이켜도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후 시간이 벌써 이렇게……”
 
그녀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녀와 대화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사실 내일 아침부터 미팅이 있어서……오늘 가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제가 맥주 마시자고 해서 시간을 너무 쓰게 했네요.”
“괜찮아요. 중요한 물건 찾아 주신 분인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어주었다. 약간 붉어진 볼에 떠오른 미소는 아까보다 천 배는 더 예쁜 것 같아서, 나는 알코올보다 그 미소에 더 취하는 듯했다. 
 
“저는 이 앞에서 택시타고 가면 되요. 오늘 감사했어요. 맥주도 잘 마셨구요.”
 
술집을 나와 그녀는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같이 인사를 하는 그 찰나에도 이게 마지막 인사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녀는 분실한 다이어리를 찾아준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모든 성의를 보였으니까, 이제 다시 아예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돌아가기도 쉽겠지. 
 
저 멀리서 빈차 표시를 단 택시가 오고 있었고, 그녀는 팔을 뻗어 그 택시를 향해 흔들었다. 그 차가 야속하게도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몇 잔의 맥주 때문인지, 타이트한 치마를 입은 그녀의 뒷모습 때문인지 다가오는 택시처럼 덜컹거리는 내 마음을 부여잡고 나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저……”
“네?”
 
택시가 그녀의 앞에 섰고, 그녀는 나를 향해 돌아 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연락하고 지내도 될까요?”
 
그녀는 내 말에 나를 아주 빤히 바라보았다. 밤공기가 무색하게 땀이 뒷목을 타고 척추를 간지럽히며 내려갔다. 오늘만 해도 나를 몇 번이나 설레게 했던 그 미소를 얼굴에 띄운 그녀가 택시문을 열며 말했다. 
 
“안 될 게 뭐 있나요?”


5화에서 계속

글쓴이 카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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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홀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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