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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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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어린 시절. 나는 생일보다, 어린이날보다 크리스마스를 더 기다렸었다.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것은 다들 비슷했지만 유독 크리스마스는 특별했다. 그건 바로 부모님이 아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기 때문이었다. 하얀 수염에 빨간 모자를 쓰고 루돌프가 이끄는 눈썰매를 타고 오는 외국인 할아버지에게 받는 선물은 확실히 부모님께 받는 선물과는 느낌이 달랐다. 물론 그리 오래지 않아 산타가 주었다고 굳게 믿은 선물 역시 부모님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잠들기 전 양말을 걸어두는 순간만큼은 어디에선가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고 싶었었다.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영화를 봤던 당시 왜 제목이 8월의 크리스마스일까 궁금했던 기억이 문득 새롭다. 그런데 딱 10년이 지나고 이 영화를 다시 보니 알 것도 같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8월의 크리스마스인지를 말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초원 사진관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는 30대의 사진사 정원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하루하루는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별다른 사건도 없이 조용하게 흘러가고 있다. 사진관에는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늙은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지어 먹는다. 그러던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인 스무 살의 다림을 만나게 된다. 다림은 정원의 마음에 불쑥 찾아온다.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정원은 다림을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시간이 없다. 지금 남은 시간은 여태까지의 삶을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앞날을 정리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지만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면, 또 옛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신 날이면 정원은 죽음이 두려운 동시에 살고 싶어진다. 그리고 스무 살의 다림은 정원을 더욱 살고 싶게 한다. 정원에게 우산을 받쳐주느라 자신은 절반 이상 비에 젖는 다림. 놀이공원에서 캔 음료를 따 주기 전에 손수건으로 말끔하게 닦아주는 다림. 정원은 다림의 그 작은 배려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정원은 알고 있다. 다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렇게 사랑해버리고 갑자기 떠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정원은 다림에게 더 이상 다가서지도 또 자신의 병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다림이 아무것도 모른 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잊어주길 바란다. 자신의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여자 후배에게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옛날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남녀를 가두고 가스를 틀어놓으면 그들이 죽기 전에 최후로 하는 행동이 바로 사랑행위라고. 그 얘기를 들은 어린 여자 후배는 ‘징그러워요 선배’ 라고 말했다. 나는 징그러우라고 그 얘기를 한 게 아니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그래서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가스가 흘러나오는 그 짧은 시간에는 서로의 이름을 묻고 취향을 파악하고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마지막에 하는 행동을 서둘러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다림과 정원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랑인지도 모른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 사랑 또한 환상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과 흔히 여자의 환상적이라고 표현할만한 어떤 로맨틱함도 없지만 그래도 이 영화에서 사랑은 상당히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원이 시한부 인생을 살기 때문에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그가 첫사랑을 놓친 후 오랫동안 혼자였다가 마침내 찾아온 사랑에 ‘이번에는 잘 해봐야지’ 라는 생각을 했다면 정원과 다림의 사랑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정원의 나이, 항상 집에서 벗어나길 꿈꾸는 다림은 아마도 결혼이라는 문제에 봉착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세상 모든 결혼이 그러하듯 징그러울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들의 사랑은 현실이 되기 직전에 그치게 된다. 그래서 내내 예쁘고 아름답게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가수 015B 그룹이 부른 ‘세상의 흔적 다 버리고’ 라는 노래가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런 가사가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잘된 건지 몰라 서로 아름다운 모습만 기억할 테니 나이가 들어 주름살이 하나둘씩 늘어갈 내 모습을 넌 볼 수 없겠지. 정원과 다림의 사랑도 그렇다. 다림의 기억 속에 정원은 내내 사진관을 하던 30대 초반의 그 모습으로 남을 것이고, 정원의 기억 속에 다림은 생기발랄한 스무 살 주차단속요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랑은 현실이 되면 더 이상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반대로 사랑이 내내 아름다우려면 현실이 되기 직전에 멈추어야 한다. 다림은 끝내 정원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눈 오는 날 자신의 사진이 걸린 사진관을 찾아와서 그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을까? 아니다. 어쩌면 다림은 자신의 가장 예쁜 모습만 기억하고 떠난 정원을 생각하며, 그때의 그 시작도 해 보기 전에 끝나버린 사랑을 생각하며 웃음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림이 조금만 더 나이가 든 모습으로 그 사진을 보고 웃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세상살이에 지칠 만큼 지치고 겪을 만큼 겪었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크리스마스처럼,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잠시 잠깐 팍팍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기억이 되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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