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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좌파의 프리섹스 비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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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가 천상(天上)의 윤리를 프리섹스 비판의 잣대로 활용한다면, 한국에서 좌파는 지상(地上)의 논리로서 프리섹스를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보수주의에는 코웃음을 칠 수 있지만, 좌파의 유물론적 비판에는 귀가 솔깃해진다.

한국에서 출간된 책 중에 '프리섹스'를 주제로 삼고 있는 저서는 좌파 '문화평론가' 김상태가 쓴 [프리섹스주의자들에게](이후)라는 비판서가 유일하다. '섹스에로의 자유, 섹스로부터의 자유'를 부제로 삼은 이 책은 프리섹스를 본격적으로 디비는 것 같아 나로선 적잖은 기대감을 품게 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직후 느낌은 뭐랄까, 집에서 쓸모가 없어서 내버리려던 물건을 선물 받은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전통적 보수주의보다 더욱더 적의를 갖고 신랄하게 리버럴리즘을 비판하지만, 그 비판 논리는 80년대의 일천한 인민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전혀 벗어나있지 못해 안타깝기까지 하다. 시니컬한 문체를 아무리 현란하게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그 고루한 멘탈리티를 감출 수는 없다.

유한(有閑) 계급이라는 말이 있다. 놀고 먹을 한가한 시간이 있는 계급이리라. 과거 봉건 시대 귀족들이 그러하다. 피땀 흘려 일해야만 겨우 먹고사는 '무한(無閑)' 계급의 눈으로 보자면, 손에 흙 한 점 묻히지 않고 쾌락을 즐길 여유와 재물이 흘러넘치는 그들의 유희는 분노를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 흡사 춘향전의 이몽룡이 탐관오리의 잔치상 앞에서 읇조리던 저 유명한 한시 '금준미주 천인혈'을 연상케 한다. 프리섹스-리버럴리즘에 대한 김상태의 비판은 딱 이 정서를 대변한다. 그런 만큼 좌파 특유의 선민적 계몽의지와 불타는 정의감만 발견될 뿐, 현실에 대한 관념적 이해만이 난무한다. 김상태가 어떻게 리버럴리즘을 두들겨 패는지 그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1. 프리섹스의 조건

진부한 도덕주의자들과 다르게, 김상태는 섹스라는 행위에 어떤 도덕주의적 아우라를 씌우지는 않아 보인다.

'성적으로 자유롭다는 것, 그것은 문자 그대로 아주 단순한 의미를 내포한다. 한 남성이 한 여성에게, 또는 한 여성이 한 남성에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했어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보러 갈까요?'라고 하는 것처럼 '나는 지금 섹스가 하고 싶어요, 괜찮으시다면 우리 섹스를 할까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김상태는 섹스에 대해 원론적으로 이렇게 동의를 해준다. 사실 신체의 일부에 불과한 성기로 악수하듯이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어떤 조건을 하나 첨부한다.

'참으로 통곡해야 할 일은 이 '괜찮으시다면'이 전혀 괜찮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게 정말 괜찮으려면 양자가 우선 대등해야 한다.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여성에 무얼 의미하는 지를 생각해보라. 상황이 너무나 불평등해서 그 말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폭력과 같은 것이다. 부잣집 아들내미가 가난뱅이 아들내미한테 가서 '우리 벤츠나 한 대 사러 가지'라고 하는 것보다 백배 이상 가혹한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이미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괜찮을 수 없는 현실'이란 '가부장제의 질곡 속에 놓여 있는 여성',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 ‘상업주의에 왜곡되는 섹스라는 기호’, ‘성욕 앞에 빈궁한 대중의 현실’을 뜻한다.

이렇듯 불평등한 현실로 인해 실제의 대중들은 쓰레기통의 과자 주어먹듯, 싸구려 에로잡지, 포르노, 사창가를 뒤지면서 섹스를 천박하게 소비할 뿐이며, 소수의 부유층만이 상상을 초월하는 물량을 쏟아 부으며 성적 욕망을 낭비하고 유린하고 있다. 이 사실을 간과한 채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리버럴리즘은 헛소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성적 리버럴리즘의 맹점

좀더 본격적으로 리버럴리즘 비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그는 성적 자유에 대한 속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소개한다.

'(1) 혼전, 혼외 섹스에 대한 심리적 도덕적 법적 제한을 없애야 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목이 마르면 콜라 마시듯 섹스는 부담없이 즐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

(2) 포르노와 매춘에 대해 또한 관대해야 한다. 강요된 매춘이 아니라면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람이란 먹고 싶을 때 먹고, 놀고 싶을 때 놀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며 자고 싶을 때 자야한다.' 이보다 호소력 있는 자유의 개념이 어디 또 있겠는가? 성적 리버럴리즘은 이 오래된 자유의 개념을 그저 섹스에 적용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사라져서도 안 되는 소망이다.'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건 이처럼 리버럴리즘의 원론적 내용이 아니다. 그 소망이 저멀리 있어야 하는 까닭을 완전 생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리버럴리즘의 한계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원조 교제의 예를 들어 보이고, 그렇게 편하게 놀고 먹겠다는 심보를 가진 소녀들의 현실과 그들에게 세뇌된 자본주의적 욕망 구조를 들추어 보인다. 그러고선 말한다. ‘어이, 리버럴! 이게 늬덜이 말한 자유다.’ 그가 제시하는 ‘자유의 일그러진 모습’은 이 외에도 많다.

'성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질 수 있고, 상대를 강제하지 않으면 뭐든지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룹섹스든 뭐든 말이죠'

어느 미혼 여성의 인터뷰 내용을 발췌하더니, 그는 자문자답한다. '이 여성은 도대체 어떤 남자들과 동의하는 걸까? 아무나? 거짓말. 절대로 아무일 리가 없다. 노숙자, 농촌총각, 빈민가의 민중은 안중에도 없을테니까. 결국 쁘띠부르주아적 계급 상호간의 자유일뿐일터이다.'

 
결국 사람들이 리버럴리스트가 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서 도출된다. 맞벌이를 해도 목구멍에 단내가 나는 마당에 이 고색창연한 자유를 만지작거릴 돈과 여유가 어디있냐고 반문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자유롭게 프리섹스를 만끽하는 대학생과 노동자의 현실, 여대생과 현대 노동자의 아내를 비교한다. 과거 살벌했던 독재시절에도 쌍쌍파티를 즐기는 대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적어도 대놓고 자신들의 쾌락을 내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리버럴리스트들은 너무 뻔뻔해졌다고 개탄을 한다. 그의 장탄식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리버릴리즘이 강남 졸부의 자식들 오렌지족이 등장한 90년대부터 창궐했다는 데에 주목한다. 90년대는 OECD 클럽에 대한민국이 가입한 시기이며, 마이카를 본격적으로 몰기 시작했고, 정보통신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비록 IMF라는 폭탄을 맞았지만 신용카드로 땜빵하면서 소비의 모멘텀을 유지했다. 바야흐로 자본의 전략은 대중을 더욱 체제 순화시키고 소비 문화를 촉진시켜 대중의 호주머니를 털어갈 궁리로 가득차 있다. 리버럴리즘은 이 전략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협작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 리버럴리즘은 이 환상에서 보면 최선의 규칙인 셈인 것이다.

‘내 돈 내 맘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오렌지족의 천박한 이기성은 ‘내 몸뚱이 내 맘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라는 리버럴리즘으로 이어지면서, 인격적 관계의 가능성은 완전 제거된다. 자본의 쾌락의 유혹에 빠져 성형 수술, 다이어트 등으로 타입화된 섹슈얼리티는 재생산되고 소비되며, 그 안에서 누리는 쾌락은 자본에 의해 이식된 쾌락일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도시 미화원, 농부들의 삶은 안중에도 들어올 수 없고, 왜 그들이 못사는 지를 알 수도 없게 된다.

 

결국 현실에서의 리버럴리즘은 이상주의적인 그 요소에도 불구하고 반동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자유를 구가할 수 없는 대중들의 조건을 외면한 채 떠드는 리버럴이란 마치 ‘이 밥통들아,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란 말이다!’라고 민중에게 소리친 루이 16세의 마누라 앙트와네트의 괴성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선택의 길이 있을까? 성은 성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가 농밀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그룹섹스를 하든, 금욕주의가 되든 성은 그 자체로서 자유롭고 전인격적인 성격을 지닐 것이다. ‘단단하고 강렬한 인간성’의 힘이 부재하다면 성이란 없게 된다. 그 ‘인간성’은 전사회적 메카니즘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이 ‘종속성’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프리섹스는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회로부터 ‘경제적 독립’과 ‘심리적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삶의 조건인 이 사회에서 ‘경제적 독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성공 신화에 대한 꿈을 버리는 것이 역설적으로 ‘경제적 독립’의 시작인 셈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자본주의의 메카니즘에 한없이 빨려들지 말고 일 자체를 삶의 수단으로 삼으며 주위의 인간 관계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쌓을 때, 우리는 자본주의적 종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비틀어져 있는 세계에 맞서 싸우거나 80년대의 민중운동의 전통을 호흡처럼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진정한 자유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한국 좌파와 자유 인식


대한민국에서 가장 자유를 사랑하시는 분들

‘자유’라는 말만큼 한국에서 기구한 처지의 단어는 없을 듯 하다. ‘자유 대한’이라는 합성어에 쓰이면 퀘퀘한 극우의 향취가 나는 듯하고, ‘사상의 자유’로 표현될 때는 좌파적 이미지를 풍기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로 보면, ‘자유’는 우익들이 즐겨쓰는 상용어가 되어버린 듯하다. 보수우익 단체명을 보면 대개 ‘자유’라는 말을 접두사처럼 애용하여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유총연맹’, ‘자유주의연대’, ‘자유시민연대’, ‘자유민주연합’... 아무튼 어떤 단체명에 ‘자유’가 들어가면 그건 보수우익집단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좌파들은 체질적으로 ‘자유’라는 말을 마뜩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대신 ‘자주’라든가, ‘평등’이라는 말을 대항마로 내세운다. 반대로 우익들은 그 말들을 극도로 억제하고 경계한다.

세계사를 대충이라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좌파들이 이 ‘자유’라는 말에 왜 냉소적인지 그 이유를 눈치 챌 것이다. 서양의 부르주아 혁명의 표어에 들어간 ‘자유’라는 깃발이, 알고보니 부르주아지들의 두둑한 주머니를 자유롭게 채울 수 있도록 보장해달라는 메시지였음을 마르크스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 냉장고를 살 자유는 생겼지만, 살 돈이 없어서 그 자유를 구가할 수 없는 무산계급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그의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급진 자유주의자로서 세상에 눈을 뜬 마르크스는 실질적인 자유를 구현할 사회적 조건에 주목한 것이다. 공산주의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 정의하는 걸 보면, 어찌보면 좌파의 궁극의 이상향은 ‘자유’ 그 자체에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주지하다시피 부르주아지들에게 ‘자유’의 본질적 의미는 ‘경제적 자유’이다. 자본축적과 상거래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왕을 단두대에 올려놓았고, 노동계급을 공장으로 모으기 위해 신분제도를 철폐시켜야만 했다. 부르주아적 자유의 본질과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었고, 좌파의 비판 역시 여기에 모아진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이 가져다준 자유의 가치와, 민주주의, 인권 개선 등은 개인의 존엄성을 확대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개인의 발견’, 이것이야말로 혁명이 역사에 남긴 위대하고 진보적인 유산인 것이다.

한국의 좌파는 저 지구 반대편에서 수많은 희생을 거쳐 수입된 이 혁명의 유산을 너무 우습게 생각해왔다. 어설픈 마르크스주의의 수사학에 가려 평등의 시각으로 이 ‘개인’을 단죄하려는 모습까지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영국인이 쟁취한 자유의 확대는 참정권 획득운동과 결합하면서 세습적인 계급과 지위를 평준화하는 데 기여했다. 프랑스인이 쟁취한 평등의 확대는 정당이나 압력단체의 조직화된 선동을 허용하고 노동조합과 사용자 사이의 단체협상을 합법화함으로써 개인적, 집단적 자유의 확산에 기여했다.”(고종석) 이처럼 자유와 평등은 역사적으로 상보적 관계에 놓여 그 지평을 넓히기도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개인의 자유는, 부르주아지들이 주는 선물은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적 개발독재 국가만 봐도 그렇고, 싱가포르처럼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경험에서 보았듯 경제개발(자본축적) 논리에 밀려 개인의 자유는 항상 유보되지 않았는가. 사회주의 세력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개인을 놓쳤을 때, 저 무너진 소비에트 사회주의와 북한처럼 흉측하게 변모하는 것을 또한 보지 않았는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랑께

한국의 운동권들은 70-80년대 군사 파쇼와 맞짱 뜨면서 정치적 자유를 신장시키고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왔지만, 이 ‘자유’라는 가치를 정치-사상적 선동에만 주로 국한시켜 수단화한 느낌마저 든다. 군사 독재라는 강적과 맞서는 동안 병영적인 집단주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운동권 풍토에서 ‘개인’을 지워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개인이 있었다면 지사(志士)였을 따름이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운동권에서만큼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 없을 것이다. 하나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그것의 현실적 의미를 좌고우면하여 생각해보지도 않고 교조적으로 삼켜버린다. 수사적 표현조차 자구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아마 ‘자유’를 시니컬하게 보는 습관도 그런 어설픈 ‘마르크스 뽀이’의 지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우익꼴통들도 우스운 건 마찬가지이다. 정치적 자유에 대한 무참한 탄압은 물론이거니와, 미니스커트를 자로 재가면서 제한하고, 경찰이 백주대낮에 멀쩡한 성인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무참하게 자르며 자유를 극도로 유린한 박통을 오늘날에도 ‘자유의 우상’으로 삼는다. 정신병자의 자가당착 수준이다.

아이러니하게 민주주의와 자유의 지평을 열어젖혔던 운동권들이 자유를 냉소할 때, 사회의 모든 자유를 억압했던 박통 지지자들은 이 자유를 영토화했다. 이 아이러니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자유’ 총연맹이 국가보안법을 지지하고, 좌파는 정치적-사상의 자유를 들어 국가보안법을 결사적으로 폐지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토종 포르노배우 ‘딸기’의 구속사건에 이르러서는 이 두 집단들이 묘하게 인식을 공유하는 것 같다. 좌파들은 준법서약서에 발끈하면서 이 ‘딸기’에게 강요된 ‘반성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다. 정말 카오스가 따로없다.


4. 좌파의 리버럴리즘 비판-그 속류적 성격

리버럴리즘에 대한 김상태의 비판은 바로 ‘자유’에 대한 운동권적 편견이 아주 유감없이 드러나있다. 물론 그 정서는 가령 소박하게 꾸며보면 이런 것이다.

'누구는 안기부에 끌려가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를 당하고 있는데, 나이트에서 미팅이나 하면서 오입하고 유희를 즐겨? 괘씸한 색히덜...'

남의 불행 앞에서 쾌락을 즐긴다는 것은 인간적 도리상 양심에 켕기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법은 타인의 불행을 줄이는 데 힘쓰는 것에 있지, 쾌락의 권리를 중지시키는 보복의 심리학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김상태의 비판의 기저는 바로 이런 무지막지한 심리학이 바탕에 깔려있는 듯하다.

여유롭게 프리섹스를 할 수 없는 계층과 그 상황을 재생산하는 사회구조가 있는 한, 프리섹스는 오렌지족의 궤변이나, 상업주의에 놀아난 소녀들의 철부지 장난이라는 그의 말은 과연 옳은 것일까?

 
 

그는 보수주의자와 달리, ‘섹스’ 그 자체에 어떤 윤리의 아우라를 씌우지 않았다. 따라서 섹스는 원칙적으로 유희의 한 종류로 삼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가 문제삼고자 했던 건 여유로운 유희(섹스)를 탐할 수 없는 ‘조건’에 있었으므로, 섹스를 제외한 나머지 유희도 사실 같은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노숙자나 생활보호대상자가 존재하는 한 개인의 유희는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상호 동의가 있으면 누구와 섹스해도 되지 않냐’는 한 여성의 얘기에 '아무나? 거짓말. 노숙자, 농촌총각, 빈민가의 민중은 안중에도 없다'고 화낸다.

노숙자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건 정당하다. 그러나 그때까지 살기에 내 인생은 너무 짧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내 자식도, 손주들의 인생도 아마 짧을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쾌락의 권리’를 유보하라는 건 일반인을 상대로 할 것이 아니라, 인도의 수도자들에게 해 주어야 할 얘기이다.

다만, 인간이 수명 연장을 위해 안간힘을 쓰듯 우리는 공리(公利)적인 이유로서, 계급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은 할 수 있고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나의 쾌락이 왜 그 노력과 대립되어야만 하는가? 이것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동화속의 선악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듯이, 운동권들이 민중을 바라보는 시각은 화가날 정도로 단순하다. ‘자본에 맞서 싸우는 민중 - 자본에 예속되어 피폐된 삶을 살아가는 민중’. 그는 ‘자유로운 여대생’의 현실과 ‘울산 노동자의 아내’의 현실을 대립시켰지만, 사실 울산의 나이트클럽에서 현대 중공업의 조업이 일찍 마친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오는 것이 진짜 현실이다.

가난한 우리는 강남 고급룸싸롱에서 초이스할 권리는 없지만, 클럽에서 5000원짜리 맥주 한병 나발불고 부비부비 춤으로 상대를 유혹할 권리는 있다. 해외에 골프여행할 자유는 없지만, 배낭여행할 만반의 준비는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80년대 운동권은 ‘마이카시대’에 코웃음을 쳤지만 오늘날 우리네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주차위반 딱지에 거품을 물고있다.

그는 말한다. '모든 욕망은 평등하다. 그러나 모든 행동은 불평등하다.' 그는 한 가지를 빼먹었다. '모든 쾌락은 동질하다.' 요컨대 이것이다. 양주 먹든 소주 먹든 취하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이다. 양주 못먹는 현실 때문에 소주의 쾌락을 유보해야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더구나 어제의 사치품이 오늘의 필수품이 되어버리고 그 주기는 급진적으로 빨라지는 이 현실에서 말이다.

김상태는 90년대 들어 자본이 근로대중에게 소비를 현혹시켰고, 프리섹스를 그 소비문화의 썩은 부산물로 치부하는 인식을 우리에게 주입한다. 그러나 소비를 꼬드기지 않은 상인들이 언제 있었단 말인가? 근검과 저축의 미덕을 장려한 건 학교와 정부이지 기업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말이 나온김에 더 해보자면, 프리섹스가 왜 90년대 이후의 소비문화의 특징인가? 사실 보릿고개에 허덕이고, 고려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궁핍한 시대였던 '고려시대'를 생각해보자. 남녀상열지사로 분서갱유를 당했던 고려속요 속의 주인공들은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아니던가? 또 조선의 풍속화가 김홍도가 그려준 ‘춘화’는 또 얼마나 해학적으로 야시시한가 말이다.

오늘날 간통으로 피소되는 자들의 계층별 분포를 보자. 1998년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간통죄로 피소된 자의 경우 생활수준이 중하류층이 75%인 반면 상류층은 0.7%에 불과하다. 물론 이것은 상류계급의 ‘높은 도덕적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다. 돈으로 배우자를 매수하므로 이 간통죄의 경우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칙이 어김없이 적용되는 사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놀고 먹을 시간이 빠듯하다는 근로대중의 참혹한 현실’에서 ‘프리섹스’는 언감생심이라는 좌파적 비판의 관념성을 폭로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5. 쾌락은 나의 힘

김상태의 비판은 그러니까 1917년도에도 할 수 있는 소리이고, 1950년에도 할 수 있는 소리이고, 아마 22세기에도 똑같은 소리가 가능한 얘기이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불행을 타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명분으로 삼는 그의 집단주의적 사고 방식이 왠지 수상쩍다. 아하! 조선일보가 생각난다. '농민이 가뭄에 한숨짓는데 왠 파업?'이라는 생뚱맞은 태클 말이다. 여기서 아까의 의문, 포르노 배우 ‘딸기’의 자유에 무관심한 좌,우익 두 집단의 은밀한 공감대를 푸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 둘은 우리의 ‘쾌락원칙’을 짓누르는데 너무도 깔끔하게 닮은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김영하에게 설득당하게 된다.
 
'70년대나 80년대 신문들은 심심하면 한번씩, 장바구니를 들고 댄스홀에 드나드는 여성들의 뒷모습을 찍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번 되물어도 좋은 게 아닐까. 왜 장바구니를 들고 카바레에 가면 안되는 거지? 장바구니를 집에 놓고 가라는 건가? 아니면, 라스포사에서 옷 한 벌 근사하게 차려 입고 가라는 건가?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이, 아줌마. 장바구니 들었으면 집에 가서 밥이나 할 일이지, 감히 언감생심 쾌락을 좇아? 그런 말이 아니라면 굳이 장바구니에 초점을 맞출 리가 없다. 그렇다. 그들은 댄스를 근대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두들 위대하신 박통의 치하에서 불철주야 조국 근대화에 몸바치고 있는 데, 너희 남편은 외화 벌러 사우디에가서 철골조립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장바구니 들고 아싸라비아를 외치며 춤을 춰?

왜 이런 공격은 여성에게만 집중되었던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근대화의 기치 아래에선 남자들은 추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몇 안되는 제비들이나 때리면 그만이었다. (...중략...) 반면 춤은 노동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허용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10대의 춤은 아름답지만 노동자와 주부의 춤은 죄악이었다. 노동자는 재화를 생산해야 하고 주부는 그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꾸준히 재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했으므로(...중략...)

쾌락의 통제,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한국경제의 견인차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노동생산성이라는 조악한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이 쾌락의 국가독점 원칙에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가 어려워지면 자동적으로 죄의식을 느낀다. 문어발 독점재벌과 경직된 관료 체제, 취약한 수출구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다녀온 해외여행을 반성하고, 큰 맘먹고 들여놓은 오디오를 저주한다.

이 어쩔 수 없는 노예근성. 왜 우리는 자신의 쾌락에 당당하지 못한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단 말인가. 아버지. 대통령 각하. 부장님. 저도 춤추고 싶어요. 다른 나라 구경하고 싶어요. 망해도 제가 망해요. 나라 탓은 안합니다. 대신 나라도 제 탓하지 마세요!

<쉘위댄스>는 개인의 쾌락원칙과 국가의 경제원칙이 충돌하는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해있다. 40대의 잘나가던 샐러리맨은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일본주식회사를 위해 사십평생을 바쳤다. 그런에 왜 나는 즐겁지 않은가? 왜 내 삶은 이토록 지루한가? 그의 퀵스텝이 묻는 것은 이것이다.

'춤추지 않으시겠어요?' 이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때의 춤은 더 이상 춤이 아니며 자본주의적 일상 속에 찌든, 우리가 그동안 포기해왔던, 작지만 강렬한 쾌락원칙의 현현이다.'

- 김영하, [굴비낚시] 중에서 일부 요약-

이쯤에서 나의 아이덴티티를 밝혀주어야겠다. 서둘러 말하면 나는 미국이라는 정글보다는 유럽의 사민주의의 길을 걷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경제적 자유는 좀 제한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건 다수의 생존권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복지시스템을 갖춰준다면 1억원 연봉자일 경우 오스트리아처럼 40%의 세금을 쎄려맞아도 나는 군소리없이 감당하겠다. 다만 사회-문화적인 자유는 어떤 전제 조건없이 누려야만 될 것이다.

세상과 인간사를 너무도 관념적이고 단순하게 재단하여 전복시켜 버리고 나니, 이 ‘좌파’가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러니 그가 대안이라고 내온 것이 참으로 궁색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없다. 성공 신화를 버리고 이웃과의 관계의 폭을 넓혀야 한다거나, 80년대 운동권적 전통을 내세우는 정도로 얼버무리는 것이다. 허무개그도 아니고 이게 뭐냐 말이다. 리버럴리즘에 대해 200페이지가 넘게 거창한 말투로 비판하더니 고작해야 이것을 내세우기 위했던 것이란 말인가? 헛웃음도 안 나온다.

사실 좌파적 시각에서 리버럴리즘에 대한 비판은 사회적 문제를 환기시켜주는 역할도 있으니까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여전히 ‘반봉건(半封建) 사회인 한국에서 비판의 화살은 리버럴리즘보다는 그 봉건성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실컷 재미보다가(또는 그러고 싶어하면서) 여성에게 ’걸레‘라는 어휘 등으로 모랄 테러를 등뒤에서 자행하는 이 구역질나는 봉건적 위선의 악취를 제거하는 게 나로선 더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 우리는 파이를 더 키워서 나중에 더 많이 먹여준다는 보수 우익들의 지겨운 레파토리도 안 믿지만, 평등해지지 않는 한 ‘자유는 무효’라는 설익은 좌파들의 튀는 레코드판도 듣고 싶지 않다. 우리는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자유주의’는 우익들과 ‘대연정’할 생각도 없고, 좌파와 ‘거국내각’을 꾸릴 복안도 없다. 다만 민주노동당 전술을 무단 도용하여 표현한다면 ‘정책연합’은 가능하다. 자유의 조건을 확장시키는 사안에 있어서는 좌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며, 나의 쾌락을 증진시키는데에 있어 상업주의와도 입맞출 생각이 있는 것이다. 미래를 미끼로 오늘의 유희를 유보시키지 말아다오.

'인생은 짧다. 오늘 즐길 수 없다면 미래에도 기회는 오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강령이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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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2016-04-05 23:43:22
저도 그냥 굴레를 벗어나서 즐기고 싶을때 즐기고 싶어요. 하지만 이 사회적 공간이란게 .. 음.. '자유'와 '폭력성'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 싶습니다.
얍떡 2015-11-07 07:58:48
좌파라니 이게 무슨소리인지 섹스도 좌우가 있구나.
북한의섹스를 다루면 남한 국민들이 좋아하겟네요ㅋㅋ
다들 수령님 찬양 하잖아요?
캣츠비 2015-09-05 21:39:01
오늘 즐길 수 없다면 미래에도 기회는 오지 않는다.. 이 말 1000000% 공감합니다.
봄물 2015-04-24 03:40:17
놀랍네요... 어떻게 이리 훤히 아시는지요?
Lipplay 2015-02-26 20:25:59
정치는 잘 모르지만..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SEX와 관련이 있을까요?
강령대로 오늘과 내일에 집중하고 살아도 인생은 짧으니.. ㅎㅎ

심리학 저서에서 본 내용중 기억나는게 있는데
인간이 심리적으로 본인의 본질과는 반대로 성향적 지지를 한다.
욕심이 강한 인간일수록 그러하다.
본질이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이가 자신의 개방감과 개인적 자유, 개혁에는 관대하고
본질이 개방적인 이가 남의 개방감에 거부감을 일으켜 보수로 돌아서는..
섹스도 프리섹스 주의자들이 보수일 가능성이 있고 보수적 섹스를 주장하는 이들이 어떤 곳에서
프리섹스를 즐기고 있을지도.. ㅎㅎㅎㅎ
커플클럽예시카 2015-01-03 15:09:59
길어서 읽다가..ㅠ.ㅠ 담에 다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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