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티스트 봉만대>
우리나라 포르노의 위치는 아주 애매모호하다.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음란물로 여겨지기도 하고 무미건조한 성생활에 윤활유 같은 존재로 주목받기도 한다.
요즘 들어서는 더욱 포르노를 대하는 사회의 시선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동거자로 낙인찍혔던 포르노가 조금씩 기지개를 펴는 형국이다. 여기 저기서 성개방문화를 타고 미디어와 개인의 생활 속에서도 당당한 성문화의 일환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멋지고 쿨한 여성의 고백 속에는 어김없이 포르노와도 같은 성적 고백이 들어가 있기도 한다.
포르노는 더 이상 남성의 전유물이 아닌 온 국민이 애용하는 성인용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어진 것 같다.
포르노를 반대하는 측의 주장을 보면 대체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적 표현, 성적 폭력에 대한 미화, 인격을 박탈당한 여성의 주물화 등이다. 반면 포르노 옹호론자들은 반대론자들의 메시지가 포르노에 녹아 있기는 해도 그것은 인간의 억압된 성적 욕망과 성에 대한 금기를 간접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포르노는 단순한 경험일 뿐이며 '피해자가 없는 범죄'라고 강변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포르노는 분명 폐해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대체적으로 3가지로 접근할 수 있다.
첫째는 포르노를 보는 행위를 죄악시함으로써 생기는 이중적인 인격의 형성에 있다.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올 수 있는 부분임에도 지금까지도 간과되고 있다. 자위행위에 대한 죄의식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특히 민감한 청소년 시기에 있어서의 포르노에 대한 동경과 죄의식의 공존은 건강한 자의식 형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적당한 선에서 성에 대한 접촉을 허용하고 성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둘째는 섹스를 권력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르노에서 다루어지는 섹스는 남성이 모든 주도권을 쥔 채 여성은 수동적인 섹스기구와도 같은 역할에 머물러 있다. 이런 행위 속에서 여성은 주물화되어 버리기 때문에 여성의 성적결정권과 인격권이 박탈되는 필연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것은 포르노가 가진 심각한 성에 대한 왜곡 현상이다.
이런 수동적인 여성상의 출현은 서양에서 제작된 포르노보다 동양에서 제작된 포르노에서 더욱 심하고 특히 일본의 포르노물은 대부분 남.녀 간의 권력 불균형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볼 수 있다.
세째는 포르노는 픽션이라는 것이다. 포르노는 영화 <매트릭스>나 <디워>처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상물이다. 따라서 포르노에 등장하는 플롯이나 상황, 체위 등 어떤 것도 현실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포르노에서는 비주얼한 화면구성을 위해서 남성 페니스를 특수분장하기도 하고 여성의 유두에 분홍색 색소를 칠하기도 한다. 포르노에서 보여지는 것은 철저하게 현실과는 분리된 픽션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일련의 포르노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포르노는 상당히 의미있는 성적도구임에 틀림 없다. 음식에도 불량식품이 있듯이 포르노의 일부 폐해 때문에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포르노의 합법화를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사실 매춘을 합법화하고 포르노를 하나의 관광산업으로 하여 오히려 성에 대한 자유스러운 토론과 이야기거리를 생산함으로써 올바른 성에 대해서 찾아가는 방법을 택한 네덜란드 같은 나라가 부럽기는 해도 우리나라에서 포르노가 가지는 위상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음성화된 포르노를 즐기더라도 그 폐해에 대해서 알고 이용하자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다양한 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 중 대부분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관음증, 페티시즘, 소아성애증, 피학증, 가학증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성적욕구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포르노라는 대리 체험을 통해서 성적 갈증을 풀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미남.미녀와의 섹스를 꿈꾸기도 한다.
포르노는 제대로 이용하면 권태기에 있는 부부나 커플들에게 색다른 쾌감을 주기도 하고 외로운 노총각의 아름다운 신부가 되기도 한다. 포르노가 주는 폐해를 항상 경계하면서 목적에 맞게 이용한다면 당신은 최고의 섹스 스폐셜리스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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