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ilty-Pleasure 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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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끝을 얼씬거리던 겨울이 벌써 현관문 앞까지 다가와서는 내가 외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눈이 펑펑 쏟아졌던 건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기억이 맞다면 재작년이었나 그 전 해의 첫눈도 쏟아져 내렸다. 확실히 작년의 첫눈은 채 쌓이기도 전에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버렸지. 올해보다 한 일주일은 빨랐고.
그 사람을 처음 마주했던 건 초여름이었다. 지하철 안에서의 비주기적이면서도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해프닝을 인지하고, 죄책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합리화한 것은 그로부터 훨씬 오래 전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과의 일을 복기하려면 나는 허공을 꽤 오래 응시해야만 했다. 입버릇 같은 ‘시간 참 빠르다’는 언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죄책감은 이제 없은지가 오래여서 나의 길티플레져에는 플레져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기쁨’에 견주어도 과연 과분하지 않는가에 대한 답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죄책감은 확실하게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튼 나의 길티플레져는 더 이상 길티플레져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 얼굴을 알게 됐다고 해서 무언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전과 같이 출근을 했고, 그 사람 역시 매일은 아니었지만 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얼굴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나는 출근길에 뒤를 돌아보거나 아니면 ‘오늘 와?’나 ‘굿모닝, 잘 잤어?’와 같은 메시지를 보내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생각날 뿐이었다. ‘오늘은 탔으려나’ 아니면 ‘이제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지’ 같은 것들. 나는 늘 대상이 되고 싶었다. 대체로는 욕망의 대상. 그러니까 지금 그 사람에게는 꼴림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일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애가 탔다. 급할수록 돌아가는 성격은 못 될 뿐더러 급하면 외려 얼굴에서, 온몸에서 티를 잔뜩 내는 바람에 종종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급한 사람인 걸 숨기고자 애를 썼다, 급해서. 달라진 게 있다면 한동안은(적어도 두 개의 계절은) 그 사람의 메시지가 훨씬 노골적이고 저급해졌다는 거. ‘재떨이로 쓰고 싶다’거나, ‘술잔에 애액 받아서 먹고 싶다’거나, ‘음식물 씹던 거 키스하면서 입에 넣어주고 싶다’거나, ‘걸레처럼 입히고 화장 시켜서 사람들 많은 데에서 산책하고 싶다’하는 것들. 수위의 높낮이는 상대적이겠지. 내 기준에는 높았고 또 얼굴을 보기 전과 후로 나누어 비교하더라도 높은 수위였다. 싫지는 않았다. 무서웠다. 미경험에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 딱 거기까지였다. 호기심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까지 실행한 건 아직 없고, 사실 내 기준에서 그 사람이 열거한 것들은 성적 흥분보다도 도전의식 내지 승부욕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앞으로도 꼴림만을 위해서 실행하기는 큰 무리가 있지 않을까. 나ㅡ중에나 되어서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런 것들, 꼴려?” “음-” “아니면 내가 존나 우스꽝스러워지는 게 웃긴 거야?” “어, 그거 같애.” “꼴리는 것보다?” “응.” “존나 못됐다, 너.” 그 사람은 멋쩍을 때마다 내 머리통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여전히 우리는 큰 의미 없이 ‘집에 가고 싶다’, ‘박히고 싶어’, ‘너무 더워’, ‘배고프다’, ‘졸려’처럼 저차원의 욕구만 텍스트로 남발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큰 의미 없는 ‘어디니’도 마찬가지였고. 그 날은 계획에 없는 곳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꽤 오래도록 보지 못 했던 친구가 해외에 다녀오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던 것. 다른 것보다도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고 먼 나라에서 메달을 목에 걸고 온 친구를 안아주고 싶었다. 친구의 일정과 내 일정이 서로 맞지 않아 이동한 편도의 시간보다도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훨씬 짧아서 친구는 무척 아쉬워 했지만 나는 그걸로 족했다. ‘지도: *** *** *** **-**’ ‘지하철이네 나도 지도: *** *** ** **’ ‘아 아 그러네 너 퇴근 지금 하지 원래’ ‘응 가다가 마주치겠다’ ‘어 어 그러네’ ‘같이 갈까 환승역 계단에서 기다릴게’ ‘웅 나도 금방 가’ 퇴근길에 보는 얼굴이라고 해서 다르지도 않았다. 위치를 잘못 이해한 나를 더러 덤벙거린다며 얕은 핀잔을 할 정도로 조금 친해진 것 같기도 했다. “퇴근길은 또 처음이다.” “아니지, 저번에 너 친구랑 독서모임 마치고 간 날.” “아, 맞다. 와- 너 기억력 진짜 좋다. 뭐야?” “기억나지. 너는 기억 안 나?” “아니, 너가 말해주니까 기억나.” 그 사람은 핀잔 대신에 가볍게 목을 졸랐다. 퇴근이 한창인 남들 눈에는 등 뒤에서 감싸안아 주는 혹은 피곤이 쌓인 어깨를 안마해 주는 다정한 연인으로 보였을까. 철커덩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목소리를 낮추고 키득거렸다. 대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걸로 보면 대부분이 헛소리였을 걸. 드문드문하던 대화랑 귓속말을 하는 척 혀를 낼름거렸던 거, 조르던 목, 롱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몸의 위아래 할 거 없이 이곳저곳을 더듬던 거, 그만하라고 타박했던 거, 사실 그만하지 않기를 내심 바랐던 거. 창밖이 온통 까맸다. 창 너머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그 사람의 눈이 들어왔다. 차내 안내음성이 다음 정류장을 알려주고 있었다. “여기 역 근처에 닭발 파는데 존나 맛있어.” “그래?” “저녁 안 먹었지. 먹고 가자. 닭발 좋아해?” “음, 내가 먼저 먹자고 한 적은 없는데 싫어하는 건 아니야.” 검은 창문을 흑경 삼아 비춰보는 내 눈은 결의 그 비스무리한 무언가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데 만약에 너 안 내리고 나 혼자 내리면?” 내 개소리에 그 사람은 내 등 뒤에서 손을 흔드는 시늉을 했다. ‘죽을래?’를 대신해서 내가 눈에 힘을 주고 노려 봤더니 그 사람은 악의 없이 낄낄거리다가 “너 닭발집 어딘지 모르잖아. 같이 내릴 거야. 아니 근데 갑자기? 진짜 가?” “진짜 가는 거 아니야? 가짜로 가도 되고.” “가짜로 가는 건 뭔데. 아니 근데 이거 맞아? 퇴근하다가 갑자기 닭발을 먹는다고?” “너 피곤하면 집으로 가도 되고. 다음에 보면 되지.” “너 근데 매운 거 잘 못 먹잖아.” “쓰러질 정도로 매워?” “아니.” “아니면 됐어.”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타이밍 좋게 지하철이 멈춰 섰고 이윽고 문이 열렸다. 나는 호기롭게 내려서 (아마도 씩씩한 표정으로)뒤를 돌아 봤다. 그 사람은 나를 따라 내려서는 곧바로 앞장섰다. 거위털로 꽉 차 빵빵한 등이 그 날따라 유독 듬직했다. 닭발은 매웠고, 세트로 주문한 오돌뼈는 더 매웠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매웠다. 젓가락을 내려둔지 이미 오래였다. 대신에 비닐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닭발을 잡고 더블 피스… 아, 아니 이게 아니고, 닭발을 양 손으로 잡고 뜯었다. 콜라겐이 한 톨도 남지 않은 닭발의 뼈가 똑, 똑, 얼굴 바로 앞에 바짝 붙여 가져다 댄 앞접시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말로는 오물거리던 입술이 새빨갛게 퉁퉁 부어 있다고 그랬다. 내 기억의 감각으로는 눈이 퉁퉁 붓는 맛이었다. 술에는 단 하나도 취하지 않았는데 매운 맛에 거나하게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꼭 감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차츰 배는 걸 느낄 때마다 겨우 눈을 떴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끔뻑거리는 모습이 마치 소 같아 보였을까. 그 사람은 내가 울먹거리는 동안에 아랑곳 않고 셀프주먹밥에 오돌뼈 한 줌을 넣고 야무지게 주물럭거렸다. 동그랗게 경단처럼 빚어서 접시 한 켠에 줄을 세워둔 건 더 야무졌다. 접시에 더 이상 주먹밥을 둘 자리가 없어지고 나서는 습습 시끄럽게 입 안을 식히던 내 얼굴 앞에 제법 큰 주먹밥을 들이대고. 한 입에 다 욱여넣기에는 꽤 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부러 그런 것 같기도. 겨자도 아닌데 울면서 먹는 내 앞접시에 수북히 쌓인 닭발뼈들을 수거해다가 스테인리스 통에 모조리 넣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고맙다고 우물거렸다. “나도 뼈 치울 줄 알아.” “근데 안 치우잖아.” “내가 치우기 전에 너가 치우잖아.” 그 사람은 내가 이 정도로 매운 걸 못 먹는 줄 몰랐던 거지. 중간중간 그 사람은 미안한 기색을 “집에 갈까?”라거나 “포장해달라고 그럴까?”하는 식으로 내비쳤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승부욕에 “다 먹고 가야지.”하고 맞받아쳤다. 승부욕만 있지는 않았고 정말 맛있었다. 감수할 수 있는 고통이었다. 쓰러지지는 않았으니까. 집에 도착해서는 쓰러졌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우리집으로 같이 간 것은 아니었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 사람은 매번 내 의중을 물었다. 집 앞 흡연부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버스 35분 남았대. 너네집 가서 기다려도 돼? 춥잖아.” 추위를 나보다도 훨씬 덜 타는 사람인 걸 애저녁부터 알고 있었다. 식후섹스를 위한 핑계는 귀여웠다. 35분보다도 훨씬 오래 머물 거면서. 물은 적 없는 넌센스를 들으면서 나는 흔쾌하게 “응.”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침대 위에 쓰러졌고 나는 그 위에 포갰다. “매운 거 먹고 입으로 하면 화끈거린다더라.” “그래? 지금은 안 그래. 누가 그래?” “전에 만났던 사람.” “매운 거 먹고 자지 빨아줬어?” “응. 매운 타코야끼.” “착하네.” 어떤 게 착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매운 타코야끼를 먹고 예전에 만났던 섹스 파트너의 자지를 화끈하게 빨았던 내가 착하다는 건지, 그 정보를 알려준 그 예전의 파트너인지, 아니면 정보를 전달해 주는 지금의 나인지, 숨김 없이 과거를 고스란히 이야기하면서 지금의 그 사람의 자지를 우물거리는 나인지. 짐작이지만 어떤 나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나였을 것이다. ‘착하네’하면서 머리를 쓰다듬더라고.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나랑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펠라치오를 할 때면 상대방이 나를 직접 만지지 않더라도 금세 젖어든다. 근데 머리를 쓰다듬으면 속도가 가중되는 거 같아. 생각해 보면 정말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당장 눈 앞에 있는 이 사람만 보더라도 한 번을 빠짐 없이, “언제부터 서 있었어?”하고 묻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게 나였나? 음- 처음 한동안은 섹스를 다 마치고 나서라도 그 사람의 작아진 자지를 목격할 수 없었다. 내 물음에 그 사람은 꼭 “아직 다 안 섰어.”하더라고. 다 안 선 건데도 이 정도였다. 그런데 그 말이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못 될지언정 듣기 좋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꼭 그렇게 말하면서 채 다 발기되지 않은 자지를 뻑적지근하게 내 안으로 밀고들어왔다. 그리고서는 몇 번의 왕복만으로 아직 피가 차지 않은 부분까지 골고루 팽창시켰다. 마치 펌프로 풍선 안에 공기를 주입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정말이지 조금의 틈도 남기지 않고 밀착돼서 아주 조금만 움직이더라도 과장을 섞자면 곧장 가버릴 것 같이 되어버리더라고. 그런 적은 아직 없지만. 내가 그 사람의 위에서 “갈 것 같아!”하고 소리지르면 그 사람은 눈을 보고 그런다, “가도 돼. 괜찮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 위로 쓰러지듯 포개져서 몸ㅡ더 정확히는 질ㅡ을 불끈거리며 경련하면서, 갈비뼈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하면서, 따끔한 목구멍으로 피맛 나는 들숨과 날숨을 빠르게 몰아쉬고 있으면 “잘했어.”하고 머리를 쓰다듬는데, 꽤 차분한 목소리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도록 내 몸 아래에서 퍽퍽퍽 쳐올리면 정말이지 과장 하나 섞지 않고 곧장 가버릴 것 같다. 그런 적이 제법 있어서인지 그 사람은 거기에 재미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요새는 왜 그런 말 안 해? 걸레처럼 입혀서 산책 시키고 싶다며.” “그냥 ㅇㅇ이 입고 샆은 대로 입어, 평소처럼.” 과거에는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과정을 꼼꼼하게 묻기도 했었다. 아니면 키득거렸다. ‘주말에 다른 남자랑 섹스했어?’라거나,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남자도 있어? 그 새끼한테도 보지 벌려줄 거야?’라거나. “다른 남자랑 섹스했냐고도 안 물어보네.” “싫어. 나 네토 아닌가 봐.” “그래?” “응.” “그럴 수도 있지.” “ㅇㅇ이 아쉬워?” “음-” 그 때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나를 섹스에 한정해서 독점하고자 한다면 빈도를 늘린다는 전제로 용인할 수 있었다. 골몰했던 건 그 사람이 네토가 아니라는 이유가 아니고 네토가 아닌 이유를 어디에서 찾았을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얼마 전, 취해 걸려 온 전화에서도 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본인도 잘 모를 테지.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그 사람이 했던 여러 말을 곱씹었다. 나한테 하는 말이었지만 결코 본인을 세뇌하기 위한 말 같았다. 눈이 쌓여 꽝꽝 얼어붙은 곳들을 보면서 하루내내 빛이 들지 않는 자리겠구나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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