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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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통상적으로는 원인과 결과를 이르는 말인데 불교에서는 인과를 사람이 평생 지은 선과 악의 업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갚음을 받는 일이라고 한다더라. 업보를 이와 동치에 두고 생각할 수 있을까.
평생을 어찌 장담하겠냐만 앞으로도 나에게 오래도록 용서하지 못 할 인간이 있다면 스토킹을 사랑으로 둔갑시켜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림하도록 전시했던 이도 아니고, 전세사기 가해자와 그 조력자들도 아니고, 학창 시절 내내 따돌림을 주동했던 이도 아닐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얻은 건 경력에 비해 잔뿌리가 굵다 쯤의 업무능력이었고, 그 인간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라면 앞으로도 오래 용서하지 않을 인간을 내가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면)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나 공적으로 얽힌 이가 앞으로의 나의 사적인 영역을 오래도록 갉도록 한다는 것은 결코 고마운 일이 아니겠다. 아- 괴로움은 내 스스로가 만드는 거라고 했던가, 내가 용서하면 끝날 일이 아닌가 싶다만 지금에까지의 나는 아직 그 인간을 용서할 자격이 안 되었다. 그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결심했던 날 진심으로 축하해 주던 사람들의 말이 나는 여전히 고맙다. 나는 축하의 말에 대고 “인과응보래잖아, 지도 괴로울 걸. 지금 괴롭지 않으면 앞으로 존나 괴로워질 걸.” 하고 저주의 말을 서슴잖고 흘려댔다. 내 어설픈 위로는 비슷한 식이었다. 화학약품을 맨 살갗에, 아무런 장비 없는 호흡기로 무방비하게 노출하는 것을 당연스레 여기는 대표에게 준비되지 않은 사직서를 내민 친구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고, 물심양면ㅡ마음을 훨씬 더 많이 썼을 테지만ㅡ으로 아끼던 이에게 배신이라는 단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으로 분노한 친구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란 고작 이런 식이었다. 아마도 불교에서는 인과나 업보를 저주의 말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악담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의 악행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했을 것이다. 돌고돌아 본인에게 돌아온댔던가. 뒤돌아 생각해 보니 이 모든 저주는 나에게 향하는 말이었고 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향하는 말이더라. 나는 무슨 업보를 지었길래 수모를 당하며 직장생활을 해야 했는지, 친구는 또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 사용하다가 닳거나 고장나면 교체해 버리는 부품과도 같은 존재가 되는 결과를 낳고 만 건지. 나는 나를 위로할 때에도 그랬었나. 입으로 지은 업보의 출처는 본디 불경한 머릿속일 텐데 머릿속에 한가득 저주를 품은 것이 내 죄였을까. 당분간은 그 누구도 위로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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