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 익명게시판
-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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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할 이야기 없다

- 외로움 혹은 공허감, 그런 감정을 호소하는 게시글을 보았다. 도서관에 갔다가 김만권의 '외로움의 습격', 부제는 '모두, 홀로 남겨질 것이다'를 골랐다. 몇 년 전에 나온 책 같은데, 김만권이 이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책은 구어체고 강의라기보다는 성인을 위한 구연동화를 하는 느낌이다.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현대 사회의 외로움은 어떤 양상인가, 누가 외로운가, 이 외로움은 어떤 문제로 파급되는가 등에 대한 이야기다.

- 김만권은 정치철학자라는데 내가 접하기로는 정치보다 사회문화적인 이야기에서 더 많이 접했다. 정준희의 해시티비에서인가, 도서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에 나와 한강을 소설을 다루면서 방송분 내내 울면서 말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대단한 감수성이라 생각했다. 나는 한강의 소설을 읽었다 할 것은 없고, 단지 유튜브 스트리밍이 들려주는대로 듣고 있다가 소년이 온다의 한 대목에서 한동안 하던 일을 멈추고 듣고만 있었다. 죽은 아들을 비통하게 그리워하는 대목이었고 나는 이 작가의 소설을 읽지 못하겠다 생각했다. 김만권과 같은 의미이나 나는 읽을 자신이 없었다. 하여튼 그렇게 감수성이 대단한 사람이다.

- 김만권이 서양철학에 기반해서 그런지 외로움을 론리니스로, 그 어원을 서구에서 찾는데 내게 와닿는 어감으로 바꿔보다면 고독이라기보단 고립이다. 고독과 고립이 무슨 차이냐 하겠지만 고독은 약간 낭만적이고 고립은 자립처럼 홀로서기를 말한다기보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위태한 느낌이다. 이 기댐은 의탁한다는 말보다는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 외로운 세기라고 한다. 정보통신혁명이라는 것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인공지능의 혁명이 파도치고 있는데, 정보통신혁명 덕분에 우리는 인터넷에서 매우 많은 연결을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누는 것은 대부분 텍스트이고 거기엔 억양, 어감, 세기, 톤, 눈맞춤, 제스처 등 대부분이 표백되어 그다지 만족스러운 교류가 되지 않으며 블록 기능은 간단히 연결을 끊을 수 있게 해준다. 현실 세계는 경제난과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인간관계를 쌓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코로나 시절 우리는 다른 나라들 처럼 대봉쇄 수준까지 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교류는 적어졌다. 그게 어느 정도 특이점인 것도 같다.

- 어떤 게시글은 외로움에 대하여 내면과 대화하는 계기로 삼으라 하였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의미를 나 스스로만으로는 채워낼 수 없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정이건 역할이건 주고받기건 뭔가를 형성하는게 필요하다. 그런게 안되는 고립된 이들은 이른바 신독-앞서 말한 내면과의 대화-에 이르기 힘들다. 관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 의의를 정립할 수 없는 이들은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고, 비유적으로 보자면 사람은 감정의 그릇과도 같아서 결국 넘치는 이 부정적 감정은 두 가지 비극적 양상으로 표출될 수 있다. 하나는 더이상 살기를 그만 두는 것 또는 불특정 다수 정확히 말해서 만만한 이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방식으로.

- 읽다가 문득 몇 년 전 일이 떠올랐다. 십년 터울 나는 여사친이 있다. 여사친이라 하는게 좋겠다-나는 함께 즐거운 시간(섹스 말고)을 보내고 특별히 큰 문제 없으면 대충 다 친구로 생각한다. 이 친구는 지방 출신인데 서울에서도 지냈다가 고향으로 가기도 했다가 왔다갔다 한다. 그래, 화이트데이 즈음이었다. 카톡으로 상담을 청해왔다. 친구가 동거하는 남자한테 두들겨 맞는다고. 그 친구가 자기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을 전달받았다. 팔에 멍이 있었고 확대해보니 열상으로 보이는 자국이 있었다. 아마 혁대로 갈겨서 난 자국으로 보였다. 동거하며 유산도 몇 차례 했고 배를 걷어 차이고 뜨거운 물을 붓기도 했다고 한다. 그 친구가 너무 무서워 해서 동거하는 집에 하루만 와서 놀다 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어쩌면 좋으냐 물었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담담히 대답했다. 너의 친구는 변사체가 될 확률이 결코 적지 않아. 선생님(이 친구가 날 종종 이렇게 부른다), 그럼 제가 그 친구 집에 가야 할까요? 난 너를 각별히 여기기 때문에 갔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그 친구는 결국 그 매맞는 친구를 자기 집에 도피시키겠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 동거남이 무서우니 같이 가달라 청하였다. 그래서 갔다.

- 매맞는 아이가 사는 지방 근처에 사는 후배에게 차를 좀 빌리자 하여 같이 갔다. 매맞는다는 그 아이는 참 작고 왜소하게 보였는데, 여사친과 비교하니 실은 비슷비슷했다. 위축이 그런 효과를 만든 것 같다. 여사친은 참 대단했다. 그 사이 여러 가지 일을 처리했다. 경찰서에 폭행으로 신고하고 이런 저런 사연이 또 있어서 성범죄 쪽으로도 신고하고 법원에 1달이지만 접근금지명령도 받고 입소시설도 알아봤다. 나보다 하루 전에 가서 그 많은걸 다 했더라. 하여튼 짐을 빼고 여사친과 매맞는 친구를 태워가려 하였는데, 매맞는 친구는 여사친에게 화를 내며 자신을 이 남자들에게 팔 것이냐 실랑이질 하고 있었다. 옥신각신 몇 시간을 진을 빼서야 겨우 차에 태워 여사친의 집으로 향했다. 가다가 밥도 먹이고 어쨌든 도피처가 될 집에 들이고선 하루 자고 돌아왔다. 그 돌아온 날이 화이트데이 전날인가 그랬는데, 만나기로 한 남자 후배가 자기 집에 가서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걸 도와달라고 해서 기억이 난다. 크게 기여한 것은 없지만 매맞는 여자를 도피시킨 날의 다음 날에 여자친구를 위해 초콜렛을 만드는 사람을 만나니,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머리가 많이 아팠다.

- 여사친은 매맞는 아이를 대략 서너달인가 돌보며 내게 종종 경과를 이야기해주었고 계획도 말해주었다. 병원을 다녀보니 경계선 지능을 가능성이 있고 실제 대화를 해봐도 그렇고 그래서 장애인 등록을 받아서 기초수급자 같은 자격을 받아보겠다, 그런 이야길 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매우 스트레스트 받고 있었다. 매맞는 아이는 여사친에게 매우 메달리면서도 안해주면 화내고 뭐랄까, 미운 일곱살이 그대로 성인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러다가 갑자기 집에서 사라졌단다. 집안 사정이 복잡하긴 한데, 어릴 적에 도망간 자기 엄마를 어떻게 찾아서 만나고, 그렇다고 뭐가 되진 않았고, 다시 동거남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의 아저씨에서 아이유가 네 번 도와준 사람은 없다며 으르렁거리는 씬이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어렵구나, 어렵구나. 여사친은 매맞는 아이가 동거남에게 돌아갈 때 네가 돌아가면 우리 친구를 그만 하기로 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 그리고 다시 고립을 생각한다. 어떤 이는 우울한 이에게 힘을 내라, 마음가짐을 바꿔라, 운동을 하라 그런 이야기들을 종종 하는데 옆에서 지켜본 여러 그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그럴 동력이 거의 없다. 옥신각신 사네 마네 질질 끌고 버티고 쥐어뜯고 울고불고, 지랄옘병을 해야 겨우 병원에라도 데려간다. 우울증을 오래 심하게 앓아서 두 번을 극단적 시도를 한 또다른 여사친에게 이런 저런 내 딴에는 좋은 말들과 병원 치료의 장점 등을 책도 읽어보고 유튜브도 시청하고 설득의 방법도 배워보는 식으로 해봐도, 쉽지 않았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에게서 구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포기하기에도 항상 다 일말의 무언가가 남는다. 그걸 미련이라 부르건 희망이라 부르건 고집이라 부르건 뭐건 간에.

- 김만권이 제시한 외로움의 문제를 굳이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고, 그는 구조적 대처 방법과 생활적 대처 방법을 제안했다. 구조적인건 정치의 문제니 별론으로 하고, 생활적 대처 방법은 경청이었다. 경청 때문에 매맞는 아이를 생각하기도 했다. 경청하던 여사친은 정서적으로 곤죽이 되어 있었다. 결국 사람이 네 번 도와줄 수 없으니 사회가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도 여사친도 그 매맞는 아이에게 어떤 평온한 생활을 제공할 능력이 되지 않았고(그리고 난 그러기에는 그 친구에게 너무 먼 사람이다, 그 친구도 그렇겠지만 이젠 그 친구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다) 시설 입소는 거부했으니까. 매맞더라도 동거남에게 돌아가는게 고립감을 덜어낸다고 생각했을까?

- 뭐가 어쨌든 관계를, 인터넷보다는 면대면한 상황에서 대화하고 다양한 시그널을 주고 받으며 경우에 따라 속내를 털어놓기도, 일단은 그러는게 좋을 것 같다. 김만권의 책에서는 상시적 외로움을 느끼는 인구가 24퍼 정도 된다고 하고 특히 청년 세대가 더 그렇다고 한다. 게시판에 매일 같이 올라오는, 그러나 아마 아무 효과가 없을 구인글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다가 어느 날부터는 익숙해져서 눈길도 가지 않다가 오늘 문득 그 글들이 그냥 외로워서 하는 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외로움을 덜기에도 현실의 여자를 만나기에도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목적이야 어쨌든 약간은 이해가 되는 느낌도 들었다.

- 레홀의 소문란 파티가 잘 된 모양이다. 좋은 일이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인터넷으로만 남지 않고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 더 좋은 일로 보인다. 어쩌면 만남을 원하는 쪽으로 다이렉트로 가는게 애초 무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현실의 커뮤니티를 창출하고 그 커뮤니티 안에서 남녀의 정분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분이 나건 말건 현실의 커뮤니티 활동으로 인간적 교류, 접점을 만들어나간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계획했던 익명의 독서모임에는 이번엔 못나가게 되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거기가 익명이라는게 지금 생각해보면 제법 중요해보인다. 사실 이 커뮤니티에 게시글 쓰면서 얼마나 사람들이 뻘글이라면 뻘글인 구인글과 섹드립을 했겠는가. 그게 익명화된 상태에서 만나는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모임이 꼭 정분을 장려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현실 세상에서 교류가 생기는 것은 나쁘기보단 좋은 일일 것이다.

- 그런들, 외로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좋은 친구란 토템과 같다고 생각한다. 딱히 무슨 기능도 역할도 없지만 없으면 이상해서 있어야 하는게 토템이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만든 그리고 잃은 윌슨이 그런 느낌이다. 책을 읽다가 내려놓고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엔딩 장면을 보았다. 덜 시한부인 환자와 당장 시한부인 환자 둘이 병원에서 어쩌다 데킬라를 마시고 바다가 보고 싶어 나섰다가 마피아에 경찰 꼬여 잡혀갈 지경까지 가지만, 당장 시한부인 환자가 내겐 시간이 없어 당장 바다를 보아야 한다며 그래서 둘은 끝내 바닷가에 이른다. 바다를 본 당장 시한부인 친구는 죽었고 그 곁을 덜 시한부인 친구가 지켰다. 덜/당장 시한부인 친구 둘은 서로의 시한부인 건강을 되돌릴 수 없었지만, 보고 싶은 바다를 보게 하였고, 함께 보았고, 떠났고, 작별했다.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토템과도 같은 친구가 있길 바라며 없다면 생기길 바란다.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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