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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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야할거다. - 이전에 쓴 글에 이어 쓴다. 고독이 자기 내면과 마주하거나 약간은 낭만적 정취라면 고립은 버려지거나 방치됨에 가깝다. 김만권은 한나 아렌트를 자주 인용하는데,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은 타인과의 교류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의 친구, 동료, 남자 기타 등등 결국 누군가의 무엇이 된다. 이영도의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 중요한 대사 중 하나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 같은 의미다.(영원의 숲이었나, 중층적 개인을 하나 하나의 레이어로 쪼개 존재를 분할하는 장치였는데 그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불교는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인식에 휘둘리는 것이니 그 실체는 공이며, 따라서 타인과의 연결도 끊어지기 때문에, 종국적으로 붓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말해야 했다.(불교의 교리는 내가 몇 줄 쓰는 것으로는 요악되지 않을 정도로 깊고 방대하기 때문에, 내가 당장 필요한 것만 뽑아 쓰는 것을 그 정수로 오해하지 않으면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무협에서 하도 쓰여서 나님 킹왕짱처럼 들리지만 의미는 오로지 나로써 독자적으로 존립한다, 내 존재의 의의 가치 같은 것을 내 자신에게 근거해 우뚝 선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깨달은 자에게나 가능할 일이고, 우리 범인들은 사회에서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타인의 무엇이 되어 그 복합체로 존재하는게 훨씬 일반적이다. - 문제는 이게 끊어졌을 때다. 고립된 개인은 그러한 레이어를 잃게 된다. 결국 자신은 누구에게도 의미있는 존재가 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 무빙의 장주원은 국정원 요원으로 근무하다가 한직에 발령나면서 자신이 쓸모없어짐을 한탄한다. 그는 자기 쓸모를 증명하는 것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던 인간이었는데 그게 더이상 안되니까. 그래서 아내 황지희의 위로가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이 된다. "넌 나의 쓸모야, 난 너의 쓸모고." 그게 쓸모건 역할이건 뭐건 상관없다. 그 누구에게도 그의 무엇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버려짐 그리고 그게 장기화되면 방치됨을 느끼게 된다. 관계에서 오는 자극이 없을 때 의식은 자기 자신을 향한다. 기억나지 않던 기억들이 떠올라 자괴감을 더한다. 양영순의 웹툰 덴마에는 이런 형벌이 나오는데, 죄수를 아무 자극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방치한다. 그는 하루도 안되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용서를 빈다. 이 씬은 아마도 과거에 행해졌던 감각을 제한했을 때 인간이 어떤 반응을 하는가에 대한 실험을 따온 것 같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감각적 자극이 극도로 제한되거나 그 변화가 거의 없어 너무나 단조로우면 인간은 매우 부정적 환각을 겪는다. 따라서 인간관계의 단절도 그에게 비슷한 감각 제한 내지 단조와 유사하고 그는 투사할 수 없는 고통을 자기 혐오에 붓게 된다. - 그러나 한 개인이 담을 수 있는 스트레스에는 한계가 있어서 너무 차오르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수 있고 그게 살기를 그만 두는 것이나 묻지마 칼부림 같은 것으로 표출될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고립된 개인이라 할지라도 요즘 세상이 제공하는 탈출구는 여러 전자 기기다. 인터넷을 통해 회선 너머의 누군가와 얕은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고립감으로 인하여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이들과 함께하는 커뮤니티에서 유지하기 쉽지 않다는거다. 그래서 휘발적이고 익명성으로 숨을 수 있는(익게에 쓰면서 좀 웃기긴 하다), 간단히 말해서 디씨나 일베 같은 사이트에서 활동이 빈번해진다. 그런데 커뮤니티가 어떤 주제에 포커싱될 수록 동류를 끌어모으는 식으로 작동한다. 극단적 성향이 강화되는 매커니즘을 설명한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에서는 동류의 집단이 모였을 때 서로를 긍정해주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보다 특정 성향이 강화되어 극단화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예컨대 내가 페이스북처럼 상당히 개인 그 자체가 노출되고 누구나 접근하기 크게 어렵지 않은 곳에서 "초등학생을 강간하고 싶다"고 포스팅했다고 하자. 당연히 페이스북은 내 글을 내릴 것이고 계정도 일정 기간 먹통으로 만들 것이며 페친들은 줄줄이 끊길 것이다. 즉 그러한 발언에 대해 유의미한 제재가 이뤄진다. 그러나 딱히 어딜 예로 들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가상의 소아성애 커뮤니티가 있다면 그들은 사회적 제재 대신 긍정해줄 수 있을 것이고, 긍정 피드백으로 인해 더 강화된 표현이 발생하며 그것은 경우에 따라 행동을 촉발할 수도 있다. - 좀 다른 이야기지만 저 "초등학생을 강간하고 싶다"는 말은 지젝이 들었던 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을 때 그는 그 자체로 문제지만 더 심한 문제는 마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의 진의는 초등학생이 사랑스럽다는 것인데 단지 표현을 과격하게 한 것 아닐까요?"하며 두둔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한다는거. 곡학아세하는 허깨비 지식인들 꼬집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마 그러한 동류 집단 내에서의 강화가 어느 임계점에 이르면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었을 때 그러한 말장난을 하는 애들도 나올거다. 아주 떠오르진 않지만 쓰다보니 기시감이 드네. - 어쨌든 자기 혐오가 아주 극단적인 행동으로 돌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자기 혐오는 동류 집단과 함께 긍정을 통해 마치 밈처럼 그냥 쉽게 말하는 수준으로 가게 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충이라는 접미사가 너무 많이 쓰인다. 온라인에서 직접적으로 뭘 하긴 어려우니 공격이 점점 폄칭으로 흐르는 것이고, 단어의 인플레이션도 너무 심해져서 급식충이라는 표현이 왠지 귀엽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하여튼 자기 혐오는 전반적인 혐오로 확장된다. 그리고 혐오라는 말도 그냥 쓰기는 하지만 별로 맞는 말같지는 않다. 그냥 증오라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이 증오는 내게 박탈된 것을 누리는 이들에 대한 증오가 되고, 증오이기 때문에 내게 그 박탈된 것을 돌려달라기보다 어느 시점부터는 모두가 박탈된 세계를 갈구하는 쪽으로 흐른다. 대략 10여년은 되었을까? xsfm의 그것은 알기 싪다 에피소드 중에 네티즌 17호라는 정체 불명의 패널이 나와서 일본 사회에 대해 아주 깊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의 출연분은 연에 한 두번은 체크해보는데 코로나 이후로 잘 안나오는 것 같다. - 그의 첫 에피소드는 아카기 토모히로라는 기고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이천년대 초반 갑자기 아사히 신문인가에 특별 기고로 데뷔했다고 하는데, 그 전까지는 그냥 삼십대 초반의 프리터였다. 당시 일본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세기를 지나고 있었고(이게 해결될지 지극히 의문이다) 일본의 고도성장과 버블을 겪고 침체에 빠져 가난해진 이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고 한다. 아카기 토모히로는 그들을 보며 의문을 품었는데, 저들 즉 기성세대는 성장의 단물을 겪어는 보고 그런 다음에 가난해졌는데, 난 침체의 시기에 태어나 그 시대만 살며 내내 가난했어! 왜 사회는 저들에게 관심을 주며 내게 관심을 주지 않지?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서 문사철이나 사회과학 이런 과정과 전혀 상관없이 단지 독학과 자기 경험 그리고 묵상에 골몰만으로 글을 뽑아내어 기고가로 데뷔했단다. 찾아보니 그는 지금도 르포 라이터로 활동하는 것 같다. - 하여튼 그 아카기 토모히로의 글의 결론은 전쟁을 원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사회가 견고하고 나는 침체 시기에 태어나 잘난 부모 못만나 하층에 견고히 박혀 있다. 필요한 것은 이 사회의 붕괴이고, 그걸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 그의 기고문 제목이 '마루야마 마사오를 때리고 싶다'였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도쿄대 교수인가 그랬는데 자유주의자라 군국주의 파쇼를 비판하는 입장을 종종 냈고, 군부의 눈엣가시였던 그는 강제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된다. 그 시대 대학 교수가 얼마나 대단한 집에서 얼마나 대단한 자원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존재였겠냐마는 그런 그마저도 전선에서는 이등병이 되어 그 윗 고참으로 거의 학력이랄게 없는 이에게 괴롬힘당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그런 세상이 되길 바랬다고 한다. 모든 고통이 평등하게 쏟아지는 아포칼립스 또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열어줄 전쟁을 그래서 고대한다고. - 나는 삼체의 예원제를 생각했다. 그는 삼체인과 처음 교신에 성공했다. 교신한 삼체인은 재교신말라며 더 교신하면 우리 문명이 지구를 정복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나 예원제는 자기 삶에서 인간혐오가 너무 깊은 탓에 지구는 자구력을 잃었다며 재교신을 걸고 만다. 그녀 역시 아포칼립스를 고대했다고 봐야겠다. 그녀의 부친은 문화대혁명 시절 아내의 배반으로 숙청 대상이 되었고 그 아내 즉 예원제의 모친은 그녀를 버렸다. 예원제도 사회적 학대를 당하며 좀 이상한 말이지만 과학 노예같은 처지가 되어 외계와 교신하는 일에 고립된 채로 투입되었다가 그 교신에 이른다. 예원제는 그 후에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정서적으로 혼란을 겪고 어느 정도 텐션을 놓았다고 해야겠다. 통신시설 인근 마을 아이들과 교류하다가 그 마을 공동체가 예원제의 임신, 출산, 육아 과정을 도와주며 인간에 대한 환멸 대신 희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예원제는 용기를 내어 자기 모친을 찾아가지만 냉랭하였고, 그 새 남편이 모친의 전언이라며 다시 찾아오지 말 것과 모친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절망하여 삼체인과 내통하는 집단의 수장이 된다. 결과는 파멸적이었고. - 그러나 아카기 토모히로는 단지 개인의 상상일 뿐이고 삼체의 예원제도 소설의 등장인물일 뿐이다. 김영미 피디라는, 종군기자로 많이 활동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코로나로 전쟁마저 잦아들자 한국에 돌아와 이런 저런 방송에 출연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마 중동 어딘가였을 마을에 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폭격으로 인해 마을 사람 중 사지 멀쩡한 사람이 정말로 단 한 명도 없는, 모두가 어느 정도 신체 결손이 있는 그런 마을이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우울했고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한 사람과 대화했는데, 그는 놀랍게도 신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단다. 그의 말은 대강 이러하다. 자신은 마을이 폭격받기 전에도 이미 장애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고 업신여겼다. 나는 알라에게 기도드렸다. 저들도 나와 같이 장애를 입게 해달라고. 어느 날 폭격이 있었고 알라는 내 청을 들어주었다. 이제 모두가 장애를 입었다. 즉 그도 아포칼립스를 원했고 평등한 나락을 원했던 것 같다. 이것은 실현된 사례다. - 무협적으로 말하자면 이 고립감이 어느 임계에 이를 때 그는 패도적인 지도자를 원하게 된다. 아포칼립스를 도래시켜줄 수 있는 폭력에 서슴없는 자. 내가 보기엔 윤석열이나 트럼프 그리고 두테르테 이런 이들이 전반적으로 비슷한 느낌이다. 윤이 쿠데타에 별로 유능하지 않았고 동시에 시민의식이 여기 저기 중요한 지점마다 잘 작동해서 무혈로 저지할 수 있음에 안도한다. 패도적이란게 어떤 걸까? 춘추오패로부터 나오는 말인데, 사실 그들과 비교하기에도 좀 민망하긴 하다. 그 오패는 좀 더 제국적이었고, 전국시대가 더 어울리겠다. 중일 모두 전국시대가 있는데, 그런 시대를 난세라 부른다. 난세는 배반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졌다는게 그런 의미인거지. - 게임이론에는 아주 재미있는(그러나 내가 재미를 얼마나 전달할지 모르겠지만) 전략 실험이 있다. 로버트 엑셀로드였나, 협력의 진화라는 책으로도 번역되었는데, 각 개체들이 자기만의 전략을 가지고 서로와 협력 게임을 한다. 이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가 기본이라, 상호협력하면 함께 중간 정도의 성과를 얻지만 하나가 배반하고 다른 하나가 통수를 맞으면 그 배반자에게 최고 보상이 돌아간다. 그리고 서로 배반하면 지리멸렬한 보상을 얻는다. 이런 보수 체계가 있다고 할 때, 게이머 각자가 고유 전략을 갖고서 일정 횟수의 반복 게임을 한다고 해보자. 여기서 그럼 어떤 전략이 가장 우수할까? - 그 답은 팃포탯이다. 전략은 간단하다. 1. 먼저 협력한다 2. 상대가 협력하면 나도 계속 협력한다 3, 배반하면 나도 배반한다 4. 그러나 그가 다시 배반하지 않으면 2로 돌아간다. 협력이 먼저고 배반에는 응징하지만 그가 협력으로 돌아서면 바로 협력에 응한다. 협력이 기본이며 배반에 응징하지만 관대하게 용서해 다시 협력으로 돌아간다. 상대방을 협력 페이스로 이끌게 한다. 누적 점수가 높아지려면 나는 배반하고 상대방이 통수를 맞아야 할텐데 팃포탯은 그게 안통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니까. 통수를 맞아주질 않고 맞더라도 바로 통수치며 결국 계속 지리멸렬해지냐 아니면 협력을 그냥 해서 중간 정도를 쌓아가냐 중 선택을 좁혀버리는데, 통수의 고점을 허용해주지 않으니 가장 유리한건 적당 적당한 점수를 함께 얻어가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팃포탯은 상호호혜를 상대방에게 강제하기 때문에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조금 복잡한 개념이지만 이것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라 하여, 대충 말하면 팃포탯은 다른 전략이 쳐들어와도 견고히 유지된다. 세대 모형까지 넣게 되면, 이건 일정 횟수까지 게임을 진행하고 점수를 정산해서 그 점수에 따라 번식한다는 식으로 하여 다음 세대를 만들고 그 세대 개체수가 어떻게 되냐를 보는건데, 이걸 해도 팃포탯이 지배종이 된다. - 문제는 팃포탯이 그렇다고 최강자는 아니라는거다. 이래 저래 따져보면 사실상 최강자이긴 한데, 이 팃포탯을 잡아먹는게 올디다. 올디는 항상 배반한다는 전략이다. 즉 난세에 적합한 전략 바로 그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올디는 항상 배반하기 때문에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고 그래서 팃포탯을 만나면 지리멸렬한 성과만 얻는다. 그러나 올디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팃포탯이 생태계에 쌓은 사회적 신뢰를 무너트리기 때문에 올디가 번성할 수 있게 된다.(다양한 조건 따라 다르긴 하다.) 그러나 그렇게 올디가 지배종이 되면 올디끼리는 서로 배반 서로 통수라 역시 내내 지리멸렬이다. 그래서 스스로 사멸한다. - 김만권은 깊은 고립에 찌들은 이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아포칼립스를 원하는 성향으로 강화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익을 상정하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공익의 가치를 내세워봐야, 내가 왜? 이 말을 풀어 쓰면 세상은 내게 해준게 없는데 왜 내가 세상에 내주어야 하느냐가 된다. 고립의 경험이 공익이나 공공선에 적대적인 관념을 갖게 하거나 심하게는 아예 생각의 범주에도 없어져버릴 수도 있다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로켓 라쿤은 도둑질 하지 말란 말이었나? 그걸 듣고는 반문하기를 근데 내가 갖고 싶은데 왜 가져가면 안되냐고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 수준과 비슷하겠지. 그런데 게임 모델은 협력이 서로 적당한 누적을 얻는게 가장 좋은 답임을 보였지만, 공익을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올디에 가깝게 된다. 이 지점이 매우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좀 건너뛰며 정리하게 되는 셈인데, 깊은 고립은 세상의 붕괴를 원하게 되며 그들이 그걸 실현할 수 있냐 없냐를 떠나서 올디 성향의 집단이 되어 사회적 신뢰를 붕괴시키게 된다... - 물론 올디에 저항하는 방법이 없는건 아니다. 죄수의 딜레마형 보수 체계는 벌금을 적당히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딜레마 탈출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올디처럼 하면 적자가 난다. 벌금이라지만 어쨌든 페널티다. 그게 명예거나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치부된다거나 하는 식으로도 정리될 수 있다. 어쩄든 현실은 깊은 고립이 가져온 무언가 저변의 변화로 인해 심연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 하여튼 재밌는 책이었다. 여러분에게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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