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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는 사랑을 원하고 성인은 유혹을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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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섹스가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과 섹스가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중 어떤 사람은 섹스 없이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 없이 섹스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사랑과 섹스가 분리되는 사람에 속한다. 구체적으로는 사랑이 안된다. 그렇다고 사랑에 메말랐다는게 아니다. 나도 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 감정을 겪었는데도 재현되지 않는다. 왜 안될까? 의문을 한 켠에 접어두고 살아가다 어느 날 알았다. 아마 사랑이 되는 나이가 지난 것 같다. 사랑에 때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느낄 조건이 있다면 그 조건이 내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다 지나간 것 같다. 사랑부터 말해야 한다. 누구나 사랑을 말할 수 있어 다 다를 것이다. 그것이 결국 하나라는 식으로 말할 수도 없다. 사랑할 적의 나는 그녀를 두 번 사랑했다. 한 번은 사랑한다 말해주고 싶어서 그랬다. 아마 이것은 사랑이라기엔 부족했을 것 같다. 네가 사랑한단 말을 듣고 싶어하니까 해줄게, 이게 더 솔직한 말이다. 그러다 그녀가 없을 때, 헤어진게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에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모두가 하루에만도 무수한 사건을 겪는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편의점에 새 음료가 나왔을 때 어떤 맛일까 궁금해 사서 마시곤 여러 판단을 한다. 맛은? 가격은? 향은? 양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그 음료를 내 우선순위에 넣을만 한지, 넣는다면 어디인지 결정한다. 사랑하지 않는 나는 여기서 끝이다. 사랑하는 나는 그녀를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마음에 들어. 그래서 난 내가 겪은 이 좋은 경험을 그녀에게도 선사하고 싶어. 혹은 먹지 말라 해야겠어. 더 돈주고 하고 싶은 경험이 아니니까 그런걸 그녀가 겪게 하고 싶지 않아. 대체로는 쏘쏘여서 잊어버리지만, 중요한 차이는 내가 겪는 경험의 끝에 마지막 필터로 그녀가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최종 필터가 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내 기준으로 그녀의 필터를 통과시키더라도 결국 그녀를 더 알게 되면서 그녀의 취향이 나와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이 내게 반영되어, 내 경험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녀의 취향에 대해 내가 문외한이었더라도 결국 알게되고 또는 알아내어 내가 하지 않았을 경험, 내가 원한다고 떠올릴 수도 없을 정도로 아예 머리에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비로소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로 향해 수렴해가고 있음을 느끼고 그 때에 뒤늦게 깨닿는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나는 그녀를 두 번 사랑하게 된다. 나이가 먹어서인지 환경이 달라져서인지 내게 책임이 늘어가서인지 이 모두 때문인지 무엇도 아는 다른 이유때문인지 나는 더이상 그런 의미의 사랑이 되지 않는다. 원숙은 배려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하므로 내가 하는 것이 그러한 사랑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상대방으로 인하여 변하여지지 않는다. 성숙해 더이상의 변화가 없이 이대로 유지되다 늙어가는 그런 시작점을 지난 것일까? 어쨌든 내가 메밀라서는 아니다. 아이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가깝게 지내는 이들의 삶이 나날이 행복을 더하고 불상사를 피하길 원한다. 난 이를 친애한다 말하는데, 친애는 되고 또한 더 늘어가지만 사랑은 되지 않는다. 섹스는 한다. 나는 섹스를 나누는 파트너에게 친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에 미달한다. 사랑과 섹스가 분리되었다. 실은 사랑은 할 수 없지만 섹스는 할 수 있다는게 더 맞는 말일 것 같다. 섹스만을 주고 받는다고 하기엔 친애감이 있어서 아주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이상하게도 사랑이 비워지니 섹스는 더 강렬해졌다. 사랑하는 이와 할 수 없었던 행위들을 한다. 아마도 그 행위들을 요구한다면 사랑하는 이가 사랑을 거둬들일 것으로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파트너에게는 할 수 있다. 사랑을 원한게 아니라 섹스를 원했던 것이 서로 맞아서 그럴 것이다. 사랑의 공백이 오히려 섹스를 풍성하게 한다. 사랑이 차지한 자리로 인해 내세울 수 없었던 감춰진 섹스가 자리를 얻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소년 소녀는 사랑을 원한다고 했지만, 소년 소녀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게 더 맞겠다. 소년 소녀는 정신, 신체적 연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인은 더이상 사랑이 작동하지 않거나 발현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 성인들은 사랑할 수 없어도 그만큼 더 풍성한 섹스를 할 수 있다.(물론 내 말이 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랑도 하고 섹스도 하면서도 섹스를 풍성히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소년 소녀도 사랑과 섹스 그 불가분한 하나를 위해 유혹을 주고 받을 수 있지만, 성인은 유혹만 주고 받을 수 있다. 이런 저런 레홀글 그리고 내가 나눈 대화,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파트너를 찾는 것은 알맞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을 추구하기 바란다.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할 수 없게 된 사람의 바람은 결코 해갈될 수 없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미련인 것 같다. 사랑했을 적의 감성을 추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섹스를 할 수 있다면 사랑의 자리에 섹스를 채우곤 유혹을 주고 받기 바란다. 성욕만 앞세워 유혹의 단계를 건너뛰는 사람들도 있다, 남자들이 훨씬 빈번한 것 같다. 유혹을 생략해서는 당신에게 안겨줄 여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안겨준 사람이 있다면 운에 의존한 것이고 그것은 불운일 것 같다. 유혹을 주고 받기까지 해야한다. 유혹을 보내 상대방이 거부하지 않는 정도라면 사실상 받은거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의 확신이 들 때까지 유혹의 핑퐁을 하는 것이 좋겠다. 남녀가 만나 섹스 이야기를 하면 매우 높은 확률로 섹스하게 된다는 이야길 들은 기억이 난다. 유혹의 핑퐁이 이뤄지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 유혹에 상대가 응해주고 상대가 네게 유혹을 되돌려준다면 자연스럽게 반복될 것이다. 그러니 유혹 없이 섹스를 청하지 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그 비워진 만큼 섹스가 채워질 것이니 슬퍼하진 않기를. 몸을 섞은 파트너를 친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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