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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려던 새와 눈물을 마셔야 할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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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한 내용 없고, 짧지 않거나 깁니다.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으로 비춰질 소지도 있음을 주의드립니다. 다 쓰고 읽어보니 비춰질 소지가 아니라 비춰집니다.
- 1세대 판타지 작가에 속하는 이영도를 아주 좋아합니다.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은 한국 작가 중에서 손에 꼽지요. 여러 소설 중 그의 연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 그리고 피를 마시는 새가 대체로 최고로 꼽힙니다. 판타지는 그 세계부터 새로 쌓아올리기 때문에 작가에게 자유로움이 있고 그만큼 고통이 있죠. 매트릭스 시리즈 중에 애니 매트릭스가 있는데, 매트릭스는 인간을 포획하고 배양하여 매트릭스가 제공하는 가상현실에 살아가도록 하며, 매트릭스는 그들로부터 전력이나 연산력을 얻지요.(인간을 발전기로 사용하는 것은 매트릭스의 기술력을 생각했을 떄 기묘한 악의가 느껴지지만 연산력을 얻는다고 보면 현존 인공지능이 연산장치만큼 연산력을 얻되 생체에 현저히 미달하는 에너지 효율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납득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상현실로부터 위화감을 느낄 때, 네오처럼 모든 것이 데이터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세계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게 되어, 그의 행위를 목격한 자들 역시 위화감을 느끼며 비슷한 초월적 행위가 번지게 되고, 그러다 가상현실에 버그가 쌓여 무너지는 식이죠. 예컨대 저는 소싯적에 드래곤볼을 아주 재밌게 보았습니다. 그 만화의 캐릭터 중 오룡은 돼지인간이고 지구의 왕인가 대통령은 개인간입니다. 그런 수인이 나와도 위화감이 들지 않았어요. 그러나 원피스는 읽지 못하겠더군요. 거기는 거인, 어인 기타 다양한 종족이 나오는데 그걸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드래곤볼을 볼 시절에는 관념이 말랑말랑한 아이였고, 원피스 볼 시절에는 관념의 각이 잡혔으니까요. 원피스가 재미없는 작품이라는게 아니라 수용자인 저의 문제죠. 자꾸 쓸데없는 과학법칙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sf의 상상력은 그래도 현존 기술의 외삽으로서 아주 근거없는 것은 아니지만 판타지는 그런 뿌리가 희미하죠.(각종 신화, 전설, 민담 등에 영감을 받는 정도라서 희미합니다.) 그만큼 판타지는 밑바닥부터 독자를 설득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른바 '지평'을 만들어야 하므로 누릴 자유만큼 책임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아주 꼼꼼히 보아도 이렇다할 흠 없는 작품입니다.(잡으려면 안잡히는 것도 아니나 이런 것 까지 따져야 하나 싶은 정도가 되죠.) - 이 세계에는 네 마리 형제 새 설화가 있고 각각 눈물, 피, 독, 물을 마십니다.(그러니 작가가 4연작을 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2개를 쓰고 더 쓰지 않습니다. 재미있게 쓰려면 쓸 이야기는 차고 넘치겠으나, 그가 다른 작품까지 통틀어 보여온 주제의식에 비추어 볼 때 딱히 더 할 이야기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눈물은 해로워 몸에 둘 수 없어 내보내는 것이기에 그것을 마시는 새는 가장 단명하나 가장 아름답게 운다고 합니다. 피는 누구도 흘리려 하지 않는 소중한 것이기에 그것을 마시는 새는 가장 오래 살지만 피비린내로 인하여 누구도 가까이 하려 않습니다. 이 외에도 소설에는 다양한 메타포가 있으나 모두 열거하기는 불가능하고, 워낙 잘 쓴 소설이라 어떤 관점을 갖고 읽어도 대략적으로 그 관점에 알맞게 일관성있는 해석이 가능합니다.(전 이게 고전, 시대성을 뛰어넘어 읽히는 글의 아주 중요한 요건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워낙 선문답이 많아 장르에 국한된 고전이 될겁니다. 웃음으로 환기하려는 말장난으로 보이는 것도 뜯어보면 거의 선문답이고 아마 제가 못읽어내서 그렇지, 나머지도 전부 선문답일겁니다.) 러프하게 이야기하면 눈물을 마시는 새는 통치자를 의미하고 피를 마시는 새는 패권자를 의미합니다, 적어도 이 글에 맞게 말하려면 말이죠. - 눈물을 마시는 새의 다음 세대의 이야기가 피를 마시는 새입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는 모종의 사유로 정체되었습니다. 발전하지 않고 어떤 페이즈를 내내 유지합니다. 천년 전의 글이 아직도 읽는데 무리가 없고, 어느 지역에서도 말이 통합니다. 시대가 달라져 고어는 따로 공부해야 읽을 수 있고 작게는 방언부터 외국어까지 있고 또 생겨나야 할텐데 그렇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 외에도 현상이 있지만) 페이즈가 유지됩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가 정체에 이르기 직전에 왕과 왕국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는 시대로 정체됩니다. 왕이 없고 통치체계가 없고 국경이 없고(자연적인 경계는 있습니다) 4개의 종족이 존재하는데 그들의 문화도 그대로입니다. 이 세계에는 그 네 종족 각각을 관리하는 신이 있는데, 그 중 한 신이 실종되어 그 넷이 함께 하여 변수를 창출하여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정체된 것이며, 그 정체를 기어코 풀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틀의 전개입니다. 각각의 신은 자기 종족원 하나에 깃들어 그를 화신으로 하여 종족을 지켜보는 식이었는데, 실종된 신이 화신에게 동화되고 그 화신이 신의 권능으로 사실상 불사가 되고, 그 화신의 개인사에서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시련, 슬픔, 가혹함, 고통 그리고 복수심, 복수심의 이면에 깔린 복잡다단한 연민감까지. 이에 신이 화신인 개인에 동의한 것인지 압도된 것인지 어쨌든 그래서 그의 몸에 숨는 혹은 갇히는 식으로 실종된 것이죠. 그 세계에 결정적 변화, 그 전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르고 다시는 그 전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뻔 했던 이들이 없진 않았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변화는 다시 왕이 되려는 도전이었는데, 소설은 결국 실종된 신이 귀환하면서 왕이 탄생하고, 혹은 왕이 탄생하여 실종된 신이 돌아와 정체를 종식하게 됩니다.(이 소설은 모순이 주요한 소재라 귀환이 왕을 불렀는가, 왕이 귀환을 불렀는가도 모순에 속합니다.) 신의 귀환과 왕의 탄생을 위해 필요한 계기는 끝간데 없이 고조된 사랑과 미움의 상쇄되는 것에 의합니다. - 피를 마시는 새는 눈물을 마시는 새가 세계의 변화를 가져왔으므로 변화된 세계가 펼쳐집니다. 왕국도 아닌 제국이 출현하며 세계를 다스리죠.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탄생한 왕의 다음 대가 그 왕국을 제국으로 번창시키고 그 다음 대의 황제가 통치하는 시대입니다. 이 세계는 일종의 인공지능이 있는데, 질문하는 자의 역량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집니다. 선대 황제, 왕국을 제국으로 재창건한 그 황제는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합니다. 그 중에는 각 종족이 완전성에 이를 수 있는가를 탐구합니다. 인공지능은 이대로는 30만년의 시간동안 150억명 내지 600조명이 쌓여여 가능하다고 답하죠.(아주 러프하게 이야기하면 이 죽음은 자연사가 아닌 살인이며, 완전성에 이르게 되면 서로를 죽이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죠.) 선대 황제는 그 기간을 1~2만년으로 줄이는 계획을 합니다. 그는 계획만 할 수 있었고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 계획을 차기 황제에게 실행하도록 안배하죠. 피를 마시는 새의 시대에 재임하는 황제는 그 후대 황제이며, 그는 승계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다른 이들은 결과적으로 그 계획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계획을 아는 자는 극소수라 다른 이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고, 황제는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갈등하는 는 식입니다.) 그 계획은 공리주의적으로 본다면 분명 비용을 최소화하는(시간과 인명) 것이지만 종족의 자유를 억압합니다.(기묘하게도 그의 억압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의미의 억압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으려는 도덕률의 방해를 억압합니다. 마치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종족의 명운을 계획에 따라 이끌기 때문에 자유가 억압됩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처럼, 그가 부여한 자유는 종족 수준에서 자기 파괴 행위를 막는 온정적 간섭주의와 비슷합니다. 특히 미국의 리버테리안들이 싫어하는 그거죠.) 그와 갈등한 이들은 최종적으로 그의 계획이 목적하는 바를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이는 길을 택합니다. 30만년의 시간과 최대 육백조의 인명이죠. - 실은 그 세계에는 한 종족이 더 있어서 다섯 종족이었습니다. 뒤에 이런 말 하는 것은 너르게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워낙 중층적 구조라 서두에 다 소개하기엔 너무 많습니다. 그 종족은 가장 먼저 완전성에 이르러 승천하였습니다. 그 종족이 승천하지 못해 남겨진 네 종족을 위해 남긴 선물같은 것이 있는데, 황제의 통제를 거부한 이들에게 위로하듯이 말을 전해줍니다. 너희는 30만년동안 육백조를 살해할 때까지도 결국 존속될 종족이고 종국에는 승천할 것이라 말해주죠. 와닿기는 힘들지만 와닿는다면 인간찬가적이기도 합니다. 통제를 거부하고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30만년동안 육백조를 죽여도 좋다, 너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천할 존재들이다. - 큰 틀에서는 두 연작이 하나의 이야기 흐름을 갖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눈물은 개인적 경험에 있어서 사랑과 미움이 극한에 이르러 상쇄됨으로써 정리되고, 그 개인이 개인이자 종족의 신이므로 단지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보편화되는 것이죠. 그리고 사랑과 미움이 집단적으로 발생하고 갈등하는 과정에 따라 시간이 흐르고 그것이 상잔까지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실제 피를 마시는 새에서 벌어지는 상잔의 원인, 그 이면에는 그러한 갈등이 자리합니다.) 그 역시 극한에 도달하면 무엇이 될까, 그런 의미에서 한 이야기로 볼 수 있죠.(그래서 더 이상의 작품은 나올 이유가 없어보입니다. 없진 않으나 그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들이 많아서, 팬픽을 작가가 감수하여 단편집이 출간되긴 했으나 스핀오프로 봐야겠죠.) 읽고서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에 문득 작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30만년과 육백조의 살해라는 숫자에 압도되어 속은 모양이다, 사람이 인류 수준에서 상잔행위가 무의미하고 실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그만둘리 없다. 소수의 개인은 그럴 수 있어도 집단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죠. - 이 생각을 신선하게 깨준 일은 박근혜 탄핵이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거부하기로 하였고 폭력행위 없이 결국 그는 거부되었습니다. 이번 윤석열도 마찬가지죠.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박근혜는 계엄까지 고려하고 있었고(이에 대한 계획과 실행을 담당했던 계엄사 사령관은 해외 도피했는데 당시 아마 중앙지검장이었던 윤석열은 그 계엄에 관한 수사를 덮어버렸고 그는 윤이 당선되자 귀국했으며 아무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윤은 실제 계엄을 실행해버렸죠. 이번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거부하기로 하였고 폭력행위 없이 결국 그는 거부되었습니다. 두 건 모두 모두가 같은 의지를 갖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최대다수가 형성되어 거부하는 것은 가능했죠. 전적이진 않아도 거의 전적인, 그런 것은 불가능하진 않다. - 혁명의 시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에릭 홉스봄이라는 역사학자가 쓴 책입니다.(이 분 책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폭력의 시대, 파멸의 시대 그리고 미완의 시대까지. 혁명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자본의 시대는 그 이후 산업자본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제국은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 폭력의 시대는 양차대전과 냉전을, 파멸의 시대는 그 시대의 사회 문화를, 그리고 미완의 시대는 에릭 홉스봄이 거의 100세에 달하게 살았기에 그의 인생 자체도 하나의 역사로서 쓴 자서전입니다. 다만 번역이 좀 잘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그의 책은 예컨대 10년 20년 30년 50년 100년 이런 단위로 떨어지는 기간이 아니라 중대한 변화를 기점으로 그 변화가 태동하고 번져서 세계가 이전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새계로 변모한다는 관점에서 씁니다. 그래서 다 읽어보고 그가 서술한 그 중대한 변화의 특이점을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로 '결정적'이란 무엇인지가 색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혁명의 시대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시민혁명 파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1년간 실은 지배적인 혁명 주도 세력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주도 세력이 없던게 아니라 그 중 누구도 지배적이라 할만한 것은 아니었단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주저앉지 않았죠.(혁명은 끝내 반혁명에 뒤집히고 그런 지난한 전복을 반복하다 몇 차례 전쟁까지 겪고 나서야 끝내 제대르 틀잡힌 민주공화국이 탄생합니다만 그 긴 시간을 보내기 전의, 반혁명 전까지말이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당대 트랜디(?)한 사상이 볼테르였는데 그가 설파한 가치를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고 있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두 번의 탄핵 국면도 그렇게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 이들이 대단히 많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겠죠. - 윤은 굳이 빗대자면 피를 마시는 새와 같은 존재로 보이는군요. 그가 모든 권력을 잃고 국가가 작동시킬 수 있는 사법적 제재 장치의 상당한 부분이 동원된된 지경에 이르러 보이는 태도와는 별론으로 하고 말이죠. 그는 국민의 생명을 동등히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어떤 생명은 매우 무가치하게 취급했고 어떤 생명 아니 어떤 이들의 사회적 안위는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중시되는 안위를 위해 하찮게 취급한 생명은 말 그대로 하찮게 취급했죠. 40대의 난임에 겨우 얻은 독자 채상병이 그저 전시행정에 동원되기 위해 쓸려나간 죽음에 대해 그 진상이 겨눌 그 지휘관의 안위를 위해 은폐를 시도했고 그 수사책임자 박대령을 중죄로 겁박했죠. 이태원에서 인파 통제를 안일하게 하였거나 사실상 포기한(마약 수사 실적을 위해 대규모 함정 수사를 기획한 것으로 전 봅니다.) 결과 무고한 인명이 무수히 희생되었음에도 그가 보인 태도, 희생자 이름이 없는 추모라던가 그 지휘책임상 표면적으로도 책임을 져야 할 행안부장관을 비호한 일이나, 김건희가 연루되었거나 핵심이었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기에 압박해오던 수사 요구를 차단하려 벌인 무수한 짓들 그리고 아마 그 끝에 있었을 외환죄의 혐의들로 보면 그렇죠. 물론 일단 내란을 벌인 것부터가 극악무도한 일이지만요.(다 쓸 수 없이 생략된 그의 인명경시를 불사한 무도한 이기성이 드러난 사건들이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 내란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도 있을텐데, 제가 보기에는 별론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내란입니다. 국회, 선관위 기타 기관에 무장 군인을 투입했고 그로써 계엄 해제를 저지하려 하였고, 드러나는 기획들에 비추어 보면 반대자를 죽여서 자기 권력을 누리려 한 것 외로는 달리 볼 수 없죠. 또한 그러한 권력 찬탈의 목적은 자기 비리 특히 김건희가 였인 비리를 숨기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란을 유발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입법부는 법률로서 행정부의 행정력 행사의 범위와 한계를 정하며, 행정부는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고, 사법부는 입법부의 그러한 법률이 소수자(입법 과정에서 소외되었다면 모두 소수자입니다, 다수결이니까요)를 구제하는 역할을 합니다.(그것이 인권이고 입법 과정에서 다수의 횡포로 피해받는 소수자를 위한다는 의미에서 인권 보호의 최후 보루라는 이야길 하죠.) 입법독재라는 말을 하던데 다수결로 작동하는 입법부에 다수당의 의사가 관철되기 쉬운 것은 당연한 일이고 소수당은 거기서 정치력으로서 이른바 정치적 딜을 하여야 하는 것인데 전혀 하지 않았고 윤은 비상식적인 거부권 남발로 버틴거라 보는게 더 맞을겁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강하게는 빨갱이는 죽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온건하게는 그냥 윤을 편들거나 다수당이 싫어서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헌정질서 내에서 작동한 다수당과 헌정질서를 파괴한 행위를 저지른 내란수괴를 마치 동격인 양 말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지 않습니다. 시민의 사고방식이 이견에 대해 살인멸구란 선택지를 택하는 순간 그는 공동체의 시민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시민이 형성한 평화로운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시민(이었던 자)를 용납하는 방식으로는 공동체가 존속할 수 없습니다. - 내란은 내란이고, 외환은 살떨리는 일이죠, 전쟁의 경험을 한 사람은 아마 없을겁니다. 전쟁의 경험을 하려면 여기 그런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블랙요원이라던가 파병 경험자라던가 사실군사업체 소속 용병이거나 미군 파병자나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이거나, 이쯤이면 거의 다 열거된 것 같군요. 그런 사람이 한국에서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도 그런 의미에서 전쟁을 잘 모릅니다. 소총수 계열 군필자임에도 정직한 답은 겪어보지 않아 모른다 외에 없습니다. 전쟁은 미디어로만 알 뿐이죠. 중계되는 전시 상황이라던가 전쟁 영화, 드리마, 소설 정도 되는 것이죠. 액션영화나 국뽕영화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지만, 저는 그런 미디어를 보고 전쟁의 참화에 대해 자세히 쓴 글을 읽어보고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전쟁이란 약탈, 강간, 학살입니다.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듯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약간 소름이 돋습니다. 본떼를 보여줘야 한다, 코를 눌러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 말이죠. 전쟁을 어떤 무력시위처럼 보일 수도 있겠고 실제 교전까진 안가도 북한이 미사일 쏘는 것을 무력시위라고도 하죠. 그러나 실전이 무력시위가 같을리 없습니다. 예컨대 헬스장에서 어느 몸좋은 남성이 아무 무거운 무게를 칠 때, 물론 그는 아마 그냥 자기 운동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그의 운동을 보면 쫄기 마련이죠. 그런 것도 의도는 없지만 무력시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벌어진 전쟁은 결국 약탈, 강간, 학살로 수렴됩니다. 그런 일이 우리 평온한 일상을 침범해오는 것을 누구도 바라지 않을텐데, 마치 단순히 무력시위, 그냥 겁주는 정도인양 말하는 것을 들으면 참 불편합니다. 전쟁은 결코 과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정황은 윤이 그런 일을 벌일 작정이었다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누구의 안위는 더없이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이들의 고귀한 생명을 잡초 취급하는 것과 별다르지 않겠죠. 잡동사니라는 말은 잡동산이에서 왔다는군요. 잡스러운 것들을 모아놓으면 거기서 거기 똑같이 보이자만 흩어놓으면 다 다르다는 뜻이랍니다. 대통령의 직위에서 바라보는 국민은 잡동하게 보이겠지만 그 국민 개개인은 모두 다르며 각자의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데 말이죠. - 그래도 약간은 개인적으로 안도되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어폰 끼고 길을 걷다 경찰이 교차로 신호등을 통제하느라 조금 길게 기다렸는데, 그래서 무슨 일일까 굼금했지요. 건너가보니 차도 한 줄을 지나는 시위대가 있었습니다. 스윽 보다보니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제게 부정선거를 외쳤습니다. 저는 그에게 윤석열 특검을 외쳐주었습니다. 삽시간에 시위대가 제게 몰려들더군요. 눈대중으로 한 50명이 달라붙은 것 같습니다. 갖은 욕설을 제게 퍼부으며 깃발과 플래카드를 제 눈 앞에서 흔들며 시야를 가리더군요. 묘한 흥분감이 오르며, 더 크게 외쳤습니다. 윤석열 탄핵, 공화국의 반역자 대강 이런 말들이죠. 어느 중노년의 남성이 다가와 욕설하며 아주 큰 동작으로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했습니다. 재밌는 일은 제가 전혀 피할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대도 맞지 않았다는겁니다. 결국은 배치된 경찰들이 무서웠던 것이죠. 그 중노년 남성은 제법 건강관리를 잘 했는지 나름대로 스텝도 밟고 그럴싸한 궤적을 그리는 주먹과 발을 쏘아보냈습니다만, 맞출 의도가 없으니 맞아지지 않았고 외려 제가 다가가니 물러서더군요. 기세는 제법 봐줄만 하나 몇 차례 반복하니 그저 슬랩스틱 코메디를 보는 것 같더군요. 아예 그 시위대 인파로 들어가 겹겹이 에워싸인 가운데에서 더 외쳐봤습니다. 아무도, 아무도 결국 입틀막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려 욕설이 환호를 받는 느낌이 들 지경이더군요. 그들의 눈도 바라보았습니다. 살의나 광기가 있다면 아마 이러지 싶어, 그렇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못하였죠. 경찰이 들어와 시위대와 저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래, 아무 것도 못하는구나. 그래서 안도감이 있었습니다. - 그럼에도 안도되지 않는 점은, 최근 기사를 보니 미얀마가 미국에 관세 서한을 받고 감사해 했다고 하더군요. 쿠데타 군정이 그 서한을 받았기에 국제사회에 공인받은 사실상 합법적 정권이 되었다고 받아들였다는 이야깁니다. 통상 교섭의 상대방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부인하기도 어렵게 된 셈이죠. 쿠데타로 시민의 피를 취하여 권좌에 오른 자를 관세 받겠다고 용인하는 트럼프. 미국이 표방하던 자유와 민주의 가치는 똥구덩이를 구른다 봐도 좋겠죠. 우경화는 종교적 맹신과 결합하였고 그 세는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트럼프 1기의 킹메이커 내지는 기조를 잡은 극우 브레인 스티브 배넌은 트럼프와 결별하고서도 지지자들로부터 모금해 유럽에 극우정치세력의 성장을 장려했습니다. 큰 실효성은 없었다 평가되지만 그럼에도 극우 포퓰리즘, 배타적 민족주의의 성장에 촉매 정돈 했겠죠. 그런 이들은 아마 늘어날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의 향후 행보가 미칠 영향은 이미 그 전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미미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와 같은 이들은 많이 출현할 것 같군요. - 피를 마시려는 무도한 패권자는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마실 자가 올지는 모르겠군요. 눈물을 마시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있을리는 없죠.(예수의 대속이 그거라 봅니다. 다만 전 무신론자입니다.) 눈물 마실 자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눈물을 마셔주어여 하는 것일테죠. 그러나 이 세계 도처에 눈물은 마른 곳 없이 흘러넘치지만 눈물을 마시려는 이는 점점 줄어가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 현재진행형은 지역은 정말 요원하죠. 눈물이 그쳐지는가? 눈물이 마르는가? 쏟아진 눈물은 누가 마실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기대하기 어렵고 역시 앞으로도 생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어슐러 르 귄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이 분의 sf, 판타지, 사변소설을 주로 썼습니다.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싶은 것은 지브리가 영상화한 게드 전기 정도 있을텐데 이게 워낙 망해서.... 하여튼 몇 년 전 작고하셨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작고 얼마 전에 수상해 소감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그 상이 순수문학이었나, 하여튼 사변소설에 주지 않아왔다 하는데 작가는 사변소설이야말로 현실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현실의 부조리를 깨트릴 수 있는 혁명적 상상력을 사변소설이 제공한다는 것이죠. 수백년전 왕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왕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바꿀 수 있다고. 그러한 힘은 예술에서 나오고, 예술 중에서도 글에서 나온다며 말이죠.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에 그 힘이 응집되어 분출될 때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두 번의 탄핵도, 30만년과 6백조의 살해도, 전쟁의 종식도, 눈물을 마시는 일도, 눈물이 마르는 일도 그런 분출이 거듭되다보면 오게 될 날임을 이제 약간은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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