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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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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 보험 상품에서는 꼭 ‘오복’이라는 키워드를 넣어 고객들을 모으고, 안경점에 붙은 포스터에서는 ‘눈이 보배’라는 카피를 심심찮게 보게 되더라. 마치 식당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ㅇㅇ의 효능’처럼, 어떤 공식이 있는 게 분명하리라.
어렸을 땐 아프고 싶었다. 깁스를 하고 온 친구들의 목발을 빌려다가 놀았고, 맹장 끝, 충수염으로 수술한 친구의 병문안에서 증상을 자세히 물었던 기억이 있다. 피아노학원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레이저포인터를 눈에 쐬면서 반드시 안경을 끼고야 말겠노라 결연에 찬 적도 있었지. 마침내 초등학교 6학년, 빨간 뿔테 안경을 쓰고 학교에 간 날에, 예쁘다는 칭찬에 어깨가 괜히 으쓱해졌다. 우리 엄마는 그야말로 눈을 보배와 같이 여겼다. 양안 시력 2.0이라는 수치를 엄마는 자랑스레 생각하셨다. 그 때의 나는 엄마의 시력보다도 홍채의 색을 더 부럽게 생각했던지도 모르겠다. 헤이즐넛 색의 맑은 눈동자를. 지금의 엄마는 안경을 낀 채로 눈꺼풀 안에 들어간 속눈썹을 뺄 수가 없다고 했다. 안경을 끼더라도 벗더라도 이제는 접사 기능이 고장난 모양이었다. 그런 투정마다 나는 “안경 렌즈도 주기적으로 바꿔 줘야 한대.” 하고 무신경하게 답할 뿐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엄마는 멀리 있는 걸 잘 본다. 나는 아니고. 안경을 착용하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 아주 큰 지장은 없는 정도의 시력이기도 하고, 렌즈야 어렸을 때나 홍채의 크기를 키우거나 색을 밝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착용했지, 지금의 나는 그런 노력을 할 여유 같은 게 없어진지가 오래라서. 시선이 한 곳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 업무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안경과 렌즈가 주는 착용감의 불편함은 안경을 벗었을 때의 생활에서의 불편함과 비등했다. 좋지 못한 시력 탓에 멀리서 나를 향해 걸어 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워질 아마도 중학생 무렵, 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미간을 찌푸리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대안이랄까. 그치, 누군가를 저 멀리서부터 뚫어져라 보는 일이 결례이기도 하거니와 순하지 않게 생긴 내 인상은 불쾌감을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 멀리서는 걸음걸이였다. 가까이서는 말씨, 냄새, 그리고 눈. 살방살방 걷는 사람도, 또박또박 걷는 사람도, 용수철처럼 골반을 튕기며 걷는 사람도. 그들 모두의 걸음걸이가 나에게는 얼굴의 역할로 다가오지 않았나. 재밌는 사실은 그네들이 살을 빼든 찌우든 걸음걸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거. 말씨도 냄새도 좀체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어떤 계절, 온도와 습도로 작년의 이맘때가 떠오르는 것처럼 특정한 냄새를 맡으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 그런 이유로 연락하는 걸 아무개들은 플러팅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됐다. 나는 단지 반가움을 나누고 싶었던 건데. 프루스트 효과에 대한 부연을 하더라도 플러팅은 플러팅이라고 하더라. 조금은 억울했지. 통신수단을 거치는 목소리와 육성은 또 다르던데. 녹음된 내 목소리만 들어도 마찬가지고.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사수 목소리도 모르냐’며 입사한지 사흘 차에 구박을 받은 적도. 그냥 지나가는 말.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내 경우에는 그 사람의 말씨를 좀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성대를 모사하는 건 어렵지만 음성의 높낮이나 단어 사이사이의 지연 같은 걸 흉내냄으로써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금방 박수를 받아낼 수가 있었다. 눈.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눈을 보고 슬픈 눈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너 역시도 그런 말을 들은 일이 처음이랬다.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도 왜 너의 눈에 슬픈 감정을 덧입혔는지 알 길이 없다. 앎은 역시나 자연히 생기는 것이 아닌가 보다. 평론가 신형철은 슬픔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고 그의 책에서 읽었다. 넌 내 슬픔을 깊이 안타까워 하는 데에 반해 난 너의 슬픔을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 점에서는 일방성에 대한 미안함이 없을 수 없고. 그럼 너는 또 언제나와 같이 ‘배려 좀 그만해’라고 하려나. 심리적 거리와는 별개로 면전에 대고ㅡ그것도 초면에ㅡ 당신의 눈이 슬프다고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서, 그 생각을 지우려 “우리 엄마와 비슷한 색이네.”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 쑥스러움의 표현 방식이었다. 고맙게도 당시의 너의 눈은 내내 나를 향해 있었던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 그 때에는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눈이 나를 향해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었다. 예컨대 대화 사이 긴 침묵 속, 타들어가는 담배 끝을 살피는 내 습관을 알아차려 줬다거나, 어느 수목원에서 이슬 맺힌 풀들을 거닐다가 가장 예쁜 모습을 담아 줬다거나. 심지어 너는 뒤통수에도 눈이 있던 게 아닌가 싶다. 텐덤을 하던 날에 배기통에 내 신체 부위가 닿지는 않는지, 내 손이 너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게 확실한지, 헬맷 쓴 내 정수리를 주먹으로 쿵쿵 내리쳐도 안전한 게 맞는지. 후각이 예민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보다는 아니었나 보더라. 주행 중에 플라스틱 타는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연이어 묻다가는 이윽고 갓길에 정차했었다. 뭐였더라, 배기통 위에 렌즈 같은 게 눌어붙었던가. 그 당시에는 그냥, ‘그만큼이나 자기 물건을 소중히 대하는구나’ 했지, 고마움이 아니고. 섹스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 봐.”하는 울리는 목소리를 더러 꼴린다고만 생각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건대 어쩌면 너는 나를 너의 눈에, 내 눈에 너를 더 많이 담고 싶었나. 최근에 다녀 온 한 워크숍에서 눈맞춤 명상을 한 적이 있다. 생면부지의 인간과 짝을 지어 서로가 두 개의 눈 중 하나를 응시하는 명상이었다. 안내자가 가이드해 주는 다섯 가지의 만트라 중에서 대강의 기억 속에 남은 건 -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여기에 당신을 위해 있다. - 나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한다. - 당신은 지금 안전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안전할 것이다. 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와 내 짝은 비슷한 시점에 눈물이 흘렀다. 눈이 위안이었을까, 만트라를 이르는 음성이 위안이었을까. 명상을 마친 후, 나와 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맞닿은 신체 부위의 온도가 같아질 무렵 다시 각자로 분리되어 서로의 무릎 위에 각각의 손을 얹었다. 짧은 시간은 아닐 것이라 느꼈지만 자그마치 20분이나 흘렀다는 걸 나중에야 듣고 나서는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그동안 너를 포함하여 사람의 눈을 1분 이상 물끄러미 응시한 적이 있던가. 만일 그 날의 짝이 너였더라도 나는 비슷한 시점에 비슷한 양의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다른 감정을 느꼈을까.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 나는 이제 더 이상 너의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다. 기억 속의 너의 얼굴은 빛에 오래 노출되어 희뿌옇게 바래 있는 형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다가 우연히, 너가 내 옆을 지나치게 되더라도 나는 너와 눈을 맞추지 않는 한 너를 알아보지 못 할 것이다. 그 때의 날씨다. 늦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견딜 만한 추위. 해가 뜨면 다시금 기분 좋아지는 선선함의. 바람이 불면 일시간 숨을 멈추게 되는, 그런 날씨다. 계절은 돌지만 어제와 오늘은 내일이나 모레와 같지 않듯이 이름이 같은 계절 속에 서 있더라도 결국의 우리는 다른 계절을 살게 될 것이다. 너가 그맘때에 알려 주었던 곡을 우연하게 다시 듣노라면 나는 너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고, 한참 나중이 되어서ㅡ너가 이번에 알려준ㅡ최유리의 두 곡을 듣게 되면 또 막을 수 없이 너의 생각에 잠시금 잠기겠지. 바비 콜드웰만큼 오래지는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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