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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위 밖의 허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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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접수 도와드릴까요?” 출동한 경찰 중 한 명이 두어 차례 물었을 때에도 당장의 감정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아뇨, 술 깨면 대화부터 먼저 해 볼게요. 조금만 보류할게요.” 그게 내가 스스로를 통제하는 방법이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그것을 다스리지 못 하는 것만큼 쉽게 지치는 일이었다. 나만큼이나 그 감정을 받아내는 사람에게도 지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내 결핍의 발현이었나. 너는 사건 직전과 직후에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직전에는 분노를 표출했고 직후에는 괴로움을. 감정을 하루 아침만에 툭 분리해내는 것은 나에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서, 그간 너와 나눴던 기억과 감정이 하나의 사건과 완전하게 분리되기 전까지 나는 너를 밀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 다짐이 준비되지 않은 채로 단단해지거나, 아니면 흔들릴 때마다 나는 아주 괴로웠다. 예컨대, 피해자조사를 받으러 간 경찰서에서 들었던 첫 마디: “걔 변호사 선임했던데?”, 사과의 마음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구나. “선임계를 제출한 날짜가 언제예요?” “그게 왜 중요해? 월요일. 그건 걔의 권리잖아.” “맞아요. 권리 행사에 대해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사과할 마음이 있으면 변호사를 통해서 전할 수 있지 않아요?” “왜 그렇게 불안해 해? 걔가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사실이 ㅇㅇ씨 사건에서 상관이 있어? 무고 아니잖아. 증거도 다 있고.” 무고는 커녕 좆돼봐라 하는 심산으로 사건 접수를 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법률지식이 한참 부족한 너와 나 같은 민간인에게는 자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처벌은 과중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하니까. 그런데 내가 바란 건 처벌이 아닌 문제 인식이었다. 문제 인식에서 기반한 진정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 그리고 그에 대한 지속적인 이행. 내가 바란 건 이런 것들이었다. 내 이런 마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랬다. 교화는 처벌과 마찬가지로 내 몫이 될 수 없다고.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것들은 욕심이랬다. 나 같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수사기관에 처벌 의사를 공고히 하는 방법뿐이라고 했다. 너는 행위에 대한 반성과 사과 이전에 법적 대응부터 시작했다. 그게 너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박탈감. 그리고 뒤따르는 자동적 사고, 양형에서의 유리성. 아. 담당수사관은 친근했고, 또 귀찮아 보였다. 가해자조사를 마친 후 수사 결과 통보를 위한 전화통화에서 이르기를, “아, 맞다. 가해자한테 그 얘기도 했어. 변호사 선임한 거 ㅇㅇ씨한테 얘기했더니 그… 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적대적?으로 좀 변했다고…….” 입장을 헤아리는 일을 포기한 인간의 형식적이고 심드렁한 태도였다. 별 것도 아닌 사건이 피곤했을 것이다. 적개심 같은 거 가지고 싶었던 적 없었다. 단 한 번도. 외려 난 허망했었지. 어느 날 친구가 말하기를, 나랑 너의 관계는 그 날의 사건 이후로 종결되었으므로 내가 사건 접수를 다짐한 순간부터는 서로가 적이 되는 게 맞다고 그랬다. 그 말이 나에게 전투 의지를 심어주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오히려 반발감에 친구에게 쏘아붙였다. “왜 그래야 되는데?” “적 맞지. 법적 ‘공방’이란 말이 왜 나오겠어.” 곧장 머리가 지독하게 묵직했다. 괴로웠다. 사건 당일, 도어락 설치기사님 부부가 돌아간 후, 날은 새파랗게 밝아 오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응, 내가 잠든 사이에 혹여 미안하다는 연락이 올까 봐서. 그리고 아무도 호출할 일 없는 인터폰 소리와 너가 문고리를 부수기 위해 발생시켰던 굉음이 자꾸 귓가에 맴돌아서. 너는 편하게 귀가하고서 취한 채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을까. 난 그러지를 못 했었다. 뜬 눈으로 정오까지 지새웠다. 취했다고 주장하는 네가 사건 전후에 보낸 메시지를 내내 읽었다. ‘존나게 씨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존나 많네’, 왕복택시비를 보내라는 거,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는 이유로 나를 향한 욕설만을 꼽았다는 거, 재차 택시비를 요구하면서 또박또박하게 계좌번호를 보내오던 거, 내가 자살한 줄 알았다며 행위 정당화를 시도하던 거, 만취와 인사불성을 주장하던 너가 집으로 가는 택시에서 나에게 보낸 메시지 그 어디에도 오탈자는 없었다. 사과로 오역할 수 있는 내용 역시도 없었다.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인해 내 주거의 평온과 안전을 침해해서, 스토킹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해서, 묵시적 거절의 의사를 무시한 채 경계를 침탈해서,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은 몇 번을 거슬러 읽더라도 없었다. 몇 번을 가다듬더라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키패드 속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허공에 대고 ‘응, 아빠ㅡ’를 몇 차례 연습하고 나서 드디어 연두색 버튼을 눌렀다. “응, ㅇㅇ아.” “응, 아빠. 밥 먹었어?” 염소 같은 목소리였다. “응- 먹고 이제 다시 일하려고.” “쉬는 날이 없네. 몸 상해.”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돈 좀 빌릴 수 있나 해서.” “무슨 돈- 힘들지?” 얼버무리다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게 됐고 그제야 사건 이후의 첫 울음이 나왔다. 아빠, 나 걔랑 진짜 잘해보고 싶었다. 엄청 많이 좋아했었어. 나한테 소중하다고 그랬었는데. 근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한테. 우리 아빠는 ‘ㅇㅇ아, 울지 말고…’하더라. 너는 내가 일찍 떠나보낸 가족 생각에 왕왕 울 때면 울어도 괜찮다고 그랬는데. 그 상황에서도 나는 너가 했던 말들이 떠올라서, 괴로웠다. 새벽에 출동한 경찰이 “근처에 잠시 머물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분들 댁은 없으세요?” 없다고 말했다. 기억으로는 세 번을 넘게 같은 답변을 했다. 아빠는 먼 길을 달려 저녁식사 때가 조금 넘은 시각에 도착했다. 아빠는 많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이 쓴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아빠를 보면서 여느 때와 같이 활짝 웃었던 것 같다. 두 팔을 벌리며 아빠에게로 다가갔었거든. 그런데도 차마 “나 괜찮아.”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빠 손을 잡고 인근 지구대로 향했다. 유리문의 안과 밖에 도어락이 각각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새벽에 봤던 경찰들은 이미 교대를 한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주거침입이랑 재물손괴로 문자 신고했었는데요, 행복주택이요. 사건 접수하려고 왔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꼭 이런 장면에서의 피해자의 모습을 꼭 초조하게 그리더라. 다리를 달달 떤다거나 손톱을 물어 뜯는다거나, 식은땀이 범벅인 관자놀. 나는 그냥 아빠 손을 꼭 잡고 싱글싱글 웃었다. 피해자답지 않았다. 아빠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경관님 한 분이 스스로를 경위라고 소개하며 문서 두 장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는 수사 과정 확인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술서였다. 아빠를 기다리면서 초안이라도 좀 작성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부서진 도어락과 현관 안전고리도, 교체비용이 적힌 영수증도 사진 말고 실물로 그냥 전부 챙겨 올 걸. “떠올리는 게 힘드시겠지만 새벽에 있었던 일을 여기에 써 주시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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