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 into bloom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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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있기 이틀 전부터 심각한 고열과 두통, 탈수증세와 구토, 설사에 시달렸다. 그렇다. 술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은 세월의 풍파 덕에 잔뜩 삭아있었다. 성인 대상의 취미미술학원을 차린 친구는 역시 사업을 해야 돈이 모인다며 자본주의에 찌든 모양새였고, 대기업 디자인팀으로 입사했던 친구는 어느덧 대리로 승진했다. 그에 반해 나는 볼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한 때는 나 역시 꿈과 희망에 부풀어 이런저런 시도도 했다. 창의력에 관해서는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내가 앞 일을 내다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면 진작 접었을 꿈이며 희망이었다.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의 결혼소식, 아무개와 아무개가 알고 보니 불륜이었더라는 가십을 안주 삼아 여자 세 명이 소주 5병을 비우기엔 2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도 죽고 못 사는 친구들이었는데도 이틀 뒤, 내가 섹스스킬 관련 강연 및 시연의 교보재가 된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겠더라. 그 친구들이 성에 대해 보수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내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자존심의 마지막 파편이었으리라. 확연하게 비교되는 그들과 나의 삶 가운데에 공통점이라곤 없었다. 초라하고 피폐한 몰골이 날 잠식한 나머지, 그 날은 내가 바로 술통이 되었다. 술을 마시기 전에도, 술을 마실 때에도, 마신 다음 날에도 역시 나는 죽고 싶었다. 죽을 것 같던 날들이 연달아 지나갔고, 나는 기어코 눈부신 조명이 비추는 마사지베드 아래 엎드려있었다. 짙은 선팅으로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 창문 뒤엔 13명의 수강생과 크루 3명이 있다고 했다. 그 중 하나는 엑스맨의 시연에 해설을 하고, 나머지 두 명은 안전요원이었다. 분리된 공간은 흡사 취조실을 연상케 했다. 아니면 동물원이든가. 아쿠아리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움이 없어야지만이 시연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잘해내겠지만.’ 지난 만남에서의 엑스맨이 한 말이 어룽져 늘어진 테이프의 음성처럼 재생됐다. 성패의 갈림이 내게 달려있단 듯이 말했던 그. 왜일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해본 경험이 수도 없는 그 사람이 마치 내가 열쇠라는 것처럼 말을 했다는 것이. 단체메신저를 통해 그와 크루는 나를 끊임없이 안정시켜주었다. 말로만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삶 속에 초대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앞으로의 일은 대단할 것이 아니며 그저 우린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것이라며. 진심을 다해 반가이 맞아주는 그들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프로는 괜히 프로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하얗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러지 못 하지만 창문 너머의 수강생들은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엎드린 여인의 나신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교단에 선 교수의 말에 귀기울이는 새학기의 신입생들처럼 눈을 반짝이며 필기를 하는 중일까, 아니면 동물원 안의 기괴한 짐승을 보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까, 쇼케이스 안에 진열된 윤기도는 음식을 탐하며 군침을 삼키고 있을까. 이윽고 문이 열렸다. 투벅투벅. 엑스맨이겠지. 그의 냄새가 났다. 숲. 그가 처음 만났던 날과 같이 물었다. “그래서, 어때요?” 엑스맨이 내 왼발을 양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온도차가 극렬하기에 그의 손이 마치 용암처럼 느껴졌다. 차디찬 발이 삽시간에 녹는 듯 했다. 이내 쥐고있던 발을 사르르 풀더니, 엄지손가락과 엄지손톱으로 발바닥 구석구석을 꼭꼭 눌러줬다. 일종의 전류 같은 것이 오금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나도 모르게 발가락에 힘을 줬나보다. 엑스맨이 아주 자상하고 달콤한 손길로 발가락 사이사이를 간질였다. 날숨에서 그의 체취를 느꼈다. 나도 모르는 와중에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의 단단하고 다정한 손은 이미 내 비복근과 전경골근을 넘어 오금을 지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무심하지만 견고한, 결코 차갑지 않은 그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선택한 건 나였으니까. 두어 번의 심호흡을 하며 온 몸에 힘을 점점 빼고 있었다. 경직된 마음도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젠 좀 괜찮나보네.” 말하지 않아도 엑스맨은 이미 나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엑스선이라도 나오는 걸까. 나를 도대체 얼마까지 아는 걸까. 그는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는, 한낱 나의 입김이 이 육면의 공간을 얼마나 데울 수 있을지 궁금했었다. 따스한 기운이 온 몸을 감쌌다. 땀이 난 게 아니었다. 입김도 아니었다. 마치 내 몸의 경계선을 그린다면 꼭 주홍빛일 것 같았다. 그의 손에 내 팔다리, 온 몸이 조종당하고 있었다. 몸을 뒤집으라 하면 뒤집었고, 팔을 들라 하면 들었다. 지금 난 엑스맨만의 섹스돌이 되어있다. 섹스돌이 되어 많은 사람 앞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다. 이리저리 휘둘리는데도 마음은 편했다. 엑스맨은 한 켠에 놓인 수건을 집어 내 다리 사이를 연신 닦아댔다. 내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엑스맨이 눈동자를 부옇게 응시한다. 나를 믿느냐는 눈빛을 하기에 나는 조심스레, 당신을 믿는다는 얼굴을 한다. 막 태어난 새 생명을 다루는 듯 한 엑스맨의 손길이 참 감사하다. 니트릴장갑을 낀 손은 이미 내 서혜부를 지나는 중이다. 갑자기 흣, 애써 참고있던 신음이 터져나온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성감대. 무척이나 당황한 나의 입을 막기라도 하려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될대로 되라는 심보였는지 엑스맨의 손은 조금 더 완강해진다. 나의 신음이 본격적인 시연의 시발점이 된다. 그가 내 다리 사이에서 움직일 때마다 자연히 내 입에선 음표가 새어나간다. 엑스맨은 오선지에 음표들을 알맞게 이어붙였고, 그렇게 우리는 마에스트로와 연주자의 관계가 되어 웅장한 오페라를 그려낸다. 엑스맨의 완력은 우아하고 고혹적이다. 그의 장엄함에 나는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게 단잠에 빠진다. Moderato-Vivace-Lento-Andante dolce-Stringendo-Presto-Prestissimo energico-Allegreto-Grave grazioso-Largo-Tempo pri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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