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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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주의*
간단하게 추천 글을 쓰고 싶었던건데 쓰다보니 분량 조절 못하고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하핫 :P 며칠 전 오랜만에 티비를 틀고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케이블 영화 채널 캐치온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를 봤어요. "어!? 이 할머니, 그 할머니잖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2015년 어느 대학의 강연에서 했던 말이 sns를 통해 유명해지면서 최근에 그녀를 알게 됐습니다. 사실 그때는 인물보다 발언이 더 와닿아서 왜소한 몸집의 외국인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대단한 위인인지 잘 알지 못했어요. 그저 어? 하는 반가움에 채널고정 하고 보다보니 몰입하게 됐고 러닝타임이 98분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았는데 끝나는게 아쉽게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거에요. 아니 다큐에 이런 몰입감이라니...? 감히 단언컨데 웬만한 상업영화보다 재밌게 잘 만든 다큐멘터리에요. 다들 꼭 한번 보셨으면 합니다.
평생 법조인으로 살아온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법정 다큐멘터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법이라고 하면 굉장히 딱딱하고 재미없을 것 같지만 놉!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구성, 편집, 연출이 뛰어나서 지루하지 않고 영상 매체는 또 음악이 중요하잖아요? 음악감독님 완전 열일하셨어요. 게다가 실화 바탕인데 실존 인물의 서사가 워낙 드라마틱해서 다큐 한 편에 시련과 난관 속에서 이루어낸 업적은 물론 멜로, 감동, 유머까지 다 담아낸거있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미국 역사상 두번째 여성 대법관이자 올해 나이 만 86세로 미연방 대법원의 최고령 대법관입니다. 2006년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산드라 데이 오코너가 퇴임한 후부터 2009년까지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미연방 대법관 중 유일한 여성이었네요. 하버드 법대에서 공부하다가 컬럼비아 법대로 편입해서 공동수석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 대학교수와 법조인으로 활약하다가 60세 나이로 미연방 대법관에 임명되어 26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를 지키며 현재까지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하신 분입니다. 오늘날 '노터리어스 RBG'라 칭송되며 젊은 청년들의 존경과 열렬한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던 시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차별과 억압을 이겨내고 성차별이 만연했던 미국 사회와 꿈쩍도 하지 않을것 같던 사법체계에 변화를 일으켜 세상을 바꾼 영웅이기 때문이에요. 이 다큐에서 루스가 소송을 맡았던 4가지 주요 판례를 보여주는데 그가 여성 인권과 성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궁극적인 이유를 잘 설명해줍니다. 혹자는 이 작품을 페미니즘 영화로 정의하고 페미니즘은 돈이 되는 문화 상품이라며 이 영화를 후려친다고 해야하나? 너무 이념을 씌워서 작품을 평가하더라고요. 루스의 생애 자체가 페미니즘적 요소가 없다곤 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치우친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나 의아함을 느꼈습니다. 그저 올곧은 신념과 차가운 이성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한 인물의 일대기로 감명깊게 본 저로서는 그런 평가가 속상하기도 한데, 한편으론 이해도 되는 것이 현 시대와 맞물려서 더 그렇게 보여지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부정할수는 없는것 같아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이념과 사상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이익을 위해 정치나 상업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언제부턴가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항상 분노에 가득 차 있는 여성들이 과민반응하며 감정적으로 싸우려고 하고 여성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또 다른 혐오를 서슴치 않는 과격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데 루스가 추구하는 여성 운동은 많이 왜곡되고 변질된 페미니즘과는 그 결이 아주 많이 다르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그가 여성 인권에 목소리를 내고 꾸준히 활동하는 이유는 결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거에요. 합법적 성차별이 만연하던 1975년에는 아내를 잃고 경제활동 없이 아이를 홀로 키우던 편부 와이젠펠드의 양육수당 지급 소송에서 만장일치로 승소하는 선례를 남기고, 결론적으로 고착화된 성역할의 고정관념과 성별을 근거로 하는 차별은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가 될수 있다는 바를 시사했죠. '악명 높은'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RBG를 까칠하고 신랄하게 호통치는 고집불통 할머니 쯤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다큐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내성적이고 조용한 분이세요. 선봉에 나서서 운동을 이끌고 움직이는 행동파가 아니라 루스의 업적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보통 승소와 패소로 결과가 나뉘는 법정에서 '싸운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루스는 늘 판사들을 '설득한다'는 표현을 쓰시더라고요. '분노하면 제대로 토론할 수 없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항상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합니다. 고함치면 절대 이길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봐온 감정에 호소하고 열변을 토하는 변호인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죠. 다수 의견에 타협하고 합의점을 찾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필요하다면 나는 언제든 반대 의견(소수의견)을 낼 것'이라고 말씀 하신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원제는 [RBG]인데 한국 제목에 '나는 반대한다' 라는 문장이 붙은건 아마도 트럼프의 당선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보수 세력의 장악을 우려해 보다 진보 성향을 드러내며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행보와 "I dissent." 라는 그의 발언이 반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루스에게 평생의 반려자이자 든든한 지원자였던 남편 故 마틴 긴즈버그의 얘기를 안할수가 없는데요. 마틴이 아니었다면 '노터리어스 RBG' 로 불리우는 시대의 영웅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은 코넬대학에서 처음 만났는데 루스가 말하길, 마틴은 그 시대의 남자들과 달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준 유일한 남자였다고 해요. 1956년 하버드 로스쿨 신입생 500명 중 여성은 단 9명이었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도서관 출입 금지를 당하고 여자화장실도 없는 학교에서 '여자인 주제에 남자들의 자리를 뺏어서 차지한 이유가 뭐냐'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하니까요.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하고자 했지만 기혼 여성이자 아이의 엄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로펌 취업이 안돼서 결국 교직을 선택했어야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마틴이 암에 걸렸을 땐 투병하는 남편의 학업을 대신 해주고 자신의 학업까지 병행하면서 일을 해야 했는데 루스의 지극한 보살핌과 헌신 덕분에 마틴은 무사히 암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루스가 여성인권 소송을 맡으면서 기회가 찾아왔을때 아내의 사회적 가치와 사명을 직감한 마틴은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내를 대신해 자신의 외향적인 성격과 인맥을 적극 동원해서 전폭적으로 루스를 지원하고 아내가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발휘할수 있도록 헌신했습니다. 어쩌면 루스가 마틴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평범한 전업주부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네요. 이렇게 완벽하고 이상적인 관계가 있을수 있는건가 싶을 정도로 천생연분이었던 루스와 마틴. 서로에게 더할 나위없는 동반자였는데 2010년 마틴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요즘은 어떤 이슈를 들여다봐도 소통과 교감, 이해와 인정, 존중과 배려는 없고 다들 혐오를 안하면 죽는 병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 서로 물어뜯고 공격하기 바쁘더라고요. 물론 현실에서는 그 공격성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요. 사랑만 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인데 혐오의 시대가 된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꽉 막힌것처럼 답답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상과 지성을 가진 인물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는 다큐멘터리를 알게 돼서 굉장히 반갑고 기쁜 마음에 널리 추천하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레홀에 글을 써봅니다.
저는 사실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람이라 모든 인간이 동등한 조건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태생은 어쩔수 없이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타고난 조건 외에는 다른 위협으로부터 삶을 침해받지 않도록 더더욱 기회와 권리가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은 사는게 다 힘들어요. 그런데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성별 때문에 차별받고 혐오당하면서 인생이 더 힘들어야 한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해서 나아졌다곤 하지만 아직까지도 개선해야 할 부분은 많고 갈 길이 참 멀어요. 여성혐오와 성차별이 얼마나 당연하고 만연했으면 여혐인줄도 모르고 성차별인줄도 모르고 우리 삶에 위협이 되는 것을 스스로 방관해왔을까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를 여자로 보고 남자를 남자로 보는게 이상한건 아니지만 그 사람의 성별부터 보고 그 사람을 성별로만 보는 것이 바로 성차별의 시작이고 우리 모두 피해자가 되는 것이라는걸 알아야 해요. 성별, 성정체성, 나이, 출신 지역, 인종과 국적이 달라도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인류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으로 봐주는게 그렇게 어렵고 힘든걸까요. 나랑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차별하고 혐오한다면 언젠가 나도 똑같은 이유로 그 차별과 혐오를 당할수가 있다는 사실을 모두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어록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칩니다!
"여성들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목을 짓밟고 있는 발을 치워달라는 것입니다." "9명이 정원인 대법관 중 여성은 몇 명이길 바라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내 대답은 늘 같습니다. 9명 전원이요. 사람들은 놀라죠. 하지만 9명의 대법관이 모두 남성이었을땐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마틴은 본인이 능력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 능력이 본인을 위협할거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평전 '노터리어스 RBG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과 시대' 를 레홀 독서단에서 다음 도서로 읽어보시면 좋을것 같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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