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고 싶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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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노명우 지음)에 실린 한 에피소드의 발췌문입니다. ----------------------------------------------------------------------------------------- (전략) 사람들은 심성이 사나워서 투쟁할까? 투쟁이 공격적 태도를 갖는 싸움꾼들의 전유물이라는 사유의 습관에 젖어 있는 한, 우리가 떠올리는 투쟁의 사례는 길거리 취객들이 벌이는 개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인간은 물질적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투쟁에 나선다고 투쟁의 동기를 이해하는 한, 우리 머릿 속에는 부동산 가격 떨어진다고 이른바 혐오시설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만 떠오른다. 하지만 투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싸움을 즐기는 싸움꾼이 아니다. 투쟁하는 사람은 보다 많은 여물을 달라고만 요구하는 돼지와 같은 존재도 아니고, 돈을 받고 영혼을 저당잡힌 채 왜 싸워야 하는지 이유조차 알려 하지 않는 용역도 아니다. 싸워야만 하는 유전자를 내재한 싸움꾼도 아닌 정신대 할머니들이, 부당해고 당한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철거민들이, 폭력과 고문에 항의하는 인권운동가들이, 등록금에 절망한 대학생들이 대체 왜 길거리에서 그리고 크레인 위에서 투쟁하는지 궁금할 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책이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이다. (중략) 인간은 배부르면 만족하는 돼지가 아니다. 아무리 위장이 꽉 차 있어도, 자기 존엄이라는 그릇이 비어 있으면 인간은 만족할 수 없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개인의 욕구는 자기 밥그릇에 보다 많은 음식을 채워 넣으려는 물욕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정에 대한 절실함은 보다 많은 돈도 넘치는 권력도 아니라, 자기 존엄이라는 스스로 부여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정이 대한 요구가 부당하게 무시될 때 사람은 모욕감을 느낀다. 모욕은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개인에 대한 일종의 관념적 살인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고문이나 폭행은 단순한 신체적 학대가 아니라 자기 존엄의 추구를 짓밟는 행동이다. 인간은 신체적 고통뿐만이 아니라 인격에 가해진 무시에도, 그로 인한 정신적 모멸감에도 반응하는 존재다. 인간은 시민에게 응당 부여되어야 하는 권리에서 배제되었을 때 굴욕을 느낀다.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에 명시되어 있는 시민의 권리가 특정 집단에게 보장되지 않을 때, 자존감은 굴욕으로 변한다. 이러 저러한 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 개인의 상활 방식과 그가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가 무시되어 조롱의 대상이 될 때, 그 개인 혹은 집단의 명예와 품위는 무차별적으로 훼손된다. 투쟁은 모욕당한 사람이 훼손된 자기 존엄을 다시 획득하려 떠나는 기나긴 여행이다. (중략) 그래서 인정투쟁의 부제는 너무나도 적절하게도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이다. 무시와 모욕을 통해 존엄이 훼손된 개인 또는 집단이 명예 회복을 위한 행동인 인정투쟁의 원인은 탐욕도 트집도 투정도 아니다. 따라서 사회는 존엄을 되찾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이는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자기 존엄의 회복을 위해 인정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여야 비정상의 딱지를 떼어 버릴 수 있다. (중략) 통속이 지배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인정을 식별할 능력을 잃어간다. 통속에 흠뻑 빠진 인정의 개념은 성공과 단순 등치된다. 이에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명예와 품위를 훼손당한 사람들이 자기 존엄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투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에게 인정이란 사물로부터의 인정에 다름 아니다. 자가용의 크기, 명절 선물의 사치스러움에 인정 여부를 확인하는 사람들은 정작 자기 존엄에는 둔감하면서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물에 둘러싸여 있지 않을 때만 모욕을 느끼는 물신화된 심성을 지니고 있다. (중략) 사람들은 각자 자기 그릇의 크기로 타인을 이해한다. 배부른 돼지의 눈에는 모든 투쟁이 위장을 채워 달라 꿀꿀대는 소리로만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한 개인의 권리가 무참히 무시된 소설 도가니의 상황을 보고도 도덕적으로 분노할 능력을 상실했고,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깊은 속내도 알지 못한다. 정신대 피해자가 물질적 보상만을 받겠다고 여태 매주 수요일 집회를 하고 있겠는가? (중략) 인정 투쟁은 사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와 같다. (중략)생존권과 폭력에 대한 거부와 같은 원초적인 인정투쟁만을 수용하는 사회는 도덕적 고양과는 거리가 멀다. (중략)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인정투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개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중략) 분명한 사실, 악셀 호네트의 책 인정투쟁은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개가 아니라 존엄을 추구하는 사람을 위해 쓰였다. 사람만이 이 책의 핵심적 메세지를 해독해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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