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의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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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집은 어릴때 꽤나 부유한 측에 속했다 87년생이던 내가 초등학교때 플레이스테이션1을 이미 갖고 있었으니.. 당시에 아버지는 벌이가 꽤 괜찮은 기업 사장님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IMF 당시에 수입차가 2대 국산차가 1대를 소유하고 계셧으며 목동에서 정원 딸린 2층집에서 살았으니.. 남들 다 죽는소리 나는 IMF때도 우리집은 별 문제없이 생활했다 어릴땐 몰랐다 그게 복 받은거라는걸 중학생이 됬다 태어나서 처음 핸드폰이란걸 어머니한테 선물받았다 그때 당시 꽤 비쌋던 LG 싸이언 핸드폰이었다 그리고 구입하고 오락실에서 펌프를 하다가 4일만이 잃어버리고 혼났다 고등학생이 됬다 2002년 월드컵을 신나게 구경하고 깡패들한테 돈을 뜯겼다 꽤 많은 돈이었다 그때 같이 뜯긴 친구놈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20년 넘게 같이 지낸 친구다 키는 매우작았다 163정도.. 외모도 뛰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니까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단짝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심장마비엿다 넉넉치 못한 친구는 장례비가 없어 애를 태웠다 나는 사실 돈을 잘 쓸 줄 몰라 미련맞게 모아둔 돈이 꽤 있었다 친구한테 돈다발을 인출해서 전달햇다 만원짜리 20묶음 ?이거면 장례는 어느정도 될거같았다 경황이 없어하는 친구를 어머니 아버지도 많이 도와주셨다 나도 3일장 내내 자리를 지키며 운구까지 같이 하고 추모공원에 모시는곳 까지 따라갔다 친구가 말햇다 빌린 돈은 자기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갚겠다고.. 나는 그랬다 있어도 되는 돈이고 없어도 되는돈이니까 걱정말라고 갚지 않아도 된다 나는 니가 더 소중하다 내가 해줄수 없는게 많이 없어 미안하다 이렇게나마 너의 슬픔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다 라고.. 그렇게 더욱더 우리는 돈독해지고 군대도 함께 다녀오며 함꼐 전역햇다 성인이 되며 현 와이프를 만나 연애를 시작햇다 10년간 연애를 하고 결혼 하는날 친구가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렇게 서로 일상 생활을 하다 서서히 연락을 드문 드문 하게되었다 재작년 12월 25일 출근하다 사무실앞 빙판길에서 낙상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실려가게 되었다 CT를찍고 MRI를 찍었는데 뇌출혈이란다 심한건 아니지만 경과를 지켜보고 응급수술을 해야할수도 있다고 한다 4일을 입원을 하고 다시 찍었다 다행히 뇌에 발생한 출혈이 흡수가 되어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리고 후유증이 생겼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후각을 상실했다 매운맛 짠맛 신맛 단맛 혀에서 나는 기본적인 맛 외에는 느낄수 없으며 어느 냄새도 맡지 못하는 상황이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의사이신 이모부님께도 여쭤보고 이리저리 다방면으로 알아보았지만 답이 없단다.. 그렇게 후유증을 극복하며 현재도 냄새를 맡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일상생활을 영위하고있다 그리고 작년 10월 31일 악성 뇌종양 교모세포종으로 4년간 투병하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요양병원에 계신지라 마침 면회 가려고 준비하던 상황이었다.. 아버지도.. 동생도.. 그 누구도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혼자 외로이 먼길을 떠나시게 되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친족의 사망이다.. 친가 외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전부 생존해 계신 상황이라 정신이 없었다.. 장례지도사 님이 달려오셔서 장례 절차에 대해 설명해주시는데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인들에게 전달할 부고장 양식을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몇년간 연락을 드문드문 하던 친구들 동창들에게 머쓱하지만 연락을 보냈다.. 1시간뒤 그 녀석이 정장을 입은채로 엉엉 울며 달려왔다 이게 무슨일이냐고 왜 연락을 안했냐고.. 어머니 얼마나 힘드셧겟냐고 나한테 화를낸다 눈물이 난다 서로 먹고 살기 힘들어 연락을 못했다는 핑계를 댔다.. 30대 후반의 나이가 된 우리는 10년만에 만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어릴떄의 내가 한것처럼 친구놈도 3일장 동안 자리를 지켜주며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었다 그렇게 3일장 후 어머니를 용인에 모셨다 정신이 없어 장을 치루고 정리를 한 뒤에 집에와서 2일간 잠만잤다 마음 정리되면 연락하라고 친구놈이 연락을 남겨놓았다 ?와이프의 권유에 연락을 했다 같이 술 한잔 하며 이야기를 했다 본인 아버지상에 장례비용이 없고 경황이 없어서 뭘 어떻게 할지 모르는 상황에 나에게 도움 받은 이야기 본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본인 집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가 않아 힘든 상황 우리 어머니가 적지않은 돈을 기부를 해주셨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랑 상의 후 소유하시던 빌라에 무료로 6년가까이 살게 해주셨다 그 덕에 다시 재기를 할 수 있엇다고.. ?그러면서 갑자기 쇼핑백을 건낸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열어보란다 열엇더니 골드바 여러개랑 5만원권이 있었다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며 이걸 왜? 라고 물었다 어머니를 보낸 마음을 덜어주진 못하겠지만 가족이랑 여행이라도 다녀오란다.. 언젠가 갚을 날 만 생각하며 차곡차곡 모아뒀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술집에서 어린이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내가 박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하는 경우도 드물고 성인이 된 이후엔 더욱더 그랬다.. 알게모르게 여유있는 삶을 사는 나를 시기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늘 그러셧다 남들보다 우리가 여유가 있으니까 베풀며 사는것에 인색하면 안된다.. 라고 모임이 있으면 남들보다 더 쓰고 배려했다 알게모르게 시기하는 친구들이 많았다곤 들었다 실제로 못들을줄 알고 뒷담화 하는것도 들었으니.. 위선덩어리 라고 한다 고생 하나 안해보고 남들 위로만 해줄줄 안다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걸러졌다.. 솔직히 어머니 장례떄 친구들은 거의 안올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와서 위로해주고 생각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어머니 운구를 해주겠다고 남았다.. 많은 친구들이 어머니 입관할때 와서 오열 해주었고 몇몇 친구들은 실신까지 했다.. 가족여행 취소하고 달려온 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대감집 개가 죽으면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대감이 죽으면 손님이 안온다고 한다.. 나는 내가 참 박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보통 돈 때문에 접근한 친구들도 많았고 그로인해 피해도 보고 했지만 그들을 원망하진 않았다.. 이런생각을 했다 부모님 상 당햇을때 내 친구들 내 지인들 한명도 안오면 어쩌지.. 친구라고 말할만한 녀석들이 손에 꼽을정도니.. 이런 걱정을 하기도 햇다.. 하지만 아니었나보다 생각보다 내가 야박하게 산것같진 않은 모양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살면 될것같다.. 생각보다 더 잘 살았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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