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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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어록이다. 그는 여러번 실각의 위기를 겪었지만 군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했다. 특히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 마오의 한마디로 중국의 참새가 멸종했고 해충으로 대기근이 찾아왔다. 최소 3,000만명 이상이 기아로 사망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명 손상 기록이다. 한국전쟁의 중공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이를 비판하자 즉각 숙청했다. 후임은 충성스러운 린뱌오로 대체됐다. 그러나 린뱌오가 중소국경 분쟁을 계기로 군부에 세력을 확장하자 쿠데타 혐의를 씌웠다. 이에 린뱌오는 황포군관학교의 옛스승이었던 대만의 장제스를 옹립하고 마오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항공기로 소련으로 달아나다 몽골 상공에서 연료부족으로 추락사했다. 린뱌오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1971년 중공은 자유중국으로 전환될 뻔 했다. 그러나 마오는 군부를 철통같이 장악했고 사망 때까지 권좌를 지켰다. 한편 박정희도 군부 장악에 힘썼다. 그는 5.16쿠데타 이후 군부 복귀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대통령 선거에 나가려고 했다. 이 때 국방부장관과 삼군 참모총장이 모여 박정희에게 군부복귀 약속을 지키라고 압박했다. 특히 육군참모총장이던 김종오 장군은 6.25전쟁의 영웅으로 군부 내 명성이 높았다. 박정희는 김종필 등 친위세력의 도움으로 겨우 군부의 압력을 이겨내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이후 박정희는 국방부장관과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실력보다 개인적 충성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군부 내 친위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전두환 노태우 등의 사조직 하나회를 묵인했다. 박정희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군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억누르며 18년간 집권했다. 전두환은 육군 사조직 하나회의 수장으로 혼란을 틈타 대통령까지 올랐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전국민적 민주화 시위에 발동이 걸렸고 이한열 열사 최루탄 사망으로 민심이 폭발했다. 경찰력으로 진정이 불가능해졌다.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 박희도에게 전국 비상계엄을 준비하게 했다. 시위 진압부대로 특전사령관 민병돈을 호출했다. 민병돈은 제2의 광주 참극을 우려했다. 그는 육사동기 고명승 보안사령관과 논의했다. 고명승은 영관급 장교 다수가 전두환에 반대한다는 정보를 들려줬다. 민병돈은 전두환에게 장교들 반발로 강제 진압 불가를 직언하면서 만약 전두환이 거절할 경우 특전사 주력 707대대장 김익환 중령에게 청와대 기습 및 전두환 연금을 미리 지시해두었다. 의외로 전두환은 민병돈의 직언을 들으며 비상계엄 명령을 철회하고 며칠 후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수용하며 민심에 전면 굴복하였다. 미국의 압력이 컸다는 설이 있지만 군부 내 반발도 전두환의 후퇴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시도도 특전사와 수방사 요원의 소극 대응으로 무산됐다. 군의 합리적 판단에는 거대한 민심의 물결이 있었다. 군이 민심을 따른 결과다. 역사적으로 군심과 민심의 괴리가 심각할 때 비극이 컸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만 그 총구가 민중을 겨눌 때 역사는 후퇴했다. 권력은 최종적으로 민심에서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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