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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 별 볼 일 없는 날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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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계란을 삶다가 껍질이 깨졌다. 물은 이미 끓고 있었고, 나는 잠시 멈춰 서서 하얀 흰자가 냄비 밖으로 번져나가는 광경을 지켜봤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이미 늦었다는 판단 사이, 그 짧은 틈새에서 나는 묘하게도 웃음이 났다. 이런 순간들이 쌓여 인생이 되는구나, 하는
누군가 내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나는 대개 "그럭저럭"이라고 답한다. 이 답변이 불성실해 보일까 봐 가끔 "나쁘지 않아요"를 덧붙이기도 하는데, 사실 둘 다 정확한 표현이다. 특별히 나쁜 일도,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일도 없는 날들. 예전 같으면 이런 평온을 지루함이라 불렀을 텐데, 지금은 이것이 일종의 성취처럼 느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무사히 통과하는 것, 그것도 제법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내가 상상했던 어른과 실제로 된 어른 사이의 간극을 확인한다. 열다섯 살의 내가 그렸던 미래의 나는 훨씬 더 단단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무엇보다 '도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거울 속 남자는 여전히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거나, 혹은 이미 길을 잃었거나, 아니면 애초에 목적지 같은 건 없었다는 걸 깨달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상한 건, 그 얼굴이 생각보다 괜찮아 보인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나는 동네 마트를 산책하듯 걷는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형광등 불빛 아래 가지런히 놓인 상품들 사이를 걷는 게 나름의 명상이 되기 때문이다. 라면 진열대 앞에서 오래 서 있는 사람들, 우유 유통기한을 꼼꼼히 확인하는 손길,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찾느라 허둥대는 뒷모습. 우리 모두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저녁 식탁의 전부인 사람들. 이 역설이 나를 위로한다. 자존감과 무력감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산다. 아침에 일어나고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된 사람 같지만, 사람들의 말 틈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래요"라고 말하는 나는 사실 이 모든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마시고, 메일에 답장하고,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이 모순된 성실함이야말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의 본질이 아닐까. 우리는 의미를 찾지 못한 채로도 계속 걷는다. 그게 우습지만, 동시에 꽤 대단한 일이다. 저녁마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비록 연초를 끊었지만 전자담배마저 끊어야 한다는 생각과 내일 끊으면 되지, 하는 타협 사이에서 나는 매번 후자를 선택한다. 액상이 증기가 되어 사라지는 걸 보며 생각한다. 나의 계획들도, 다짐들도, 한때 품었던 야망들도 저렇게 흐릿하게 흩어졌구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씁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홀가분하다.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보이는 것들이 있다. 저 멀리 아파트 불빛들, 늦은 시간까지 켜진 누군가의 방. 우리 모두 비슷하게 살고 있다는 연대감. 사람들은 가끔 "너답지 않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애매하게 웃는다. 이게 성숙인지 체념인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으니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더 이상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서도, 내 작은 반경 안에서는 여전히 커피를 정성껏 내리려 애쓰는 것. 이 미세한 노력과 거대한 포기 사이 어딘가에, 나는 지금 서 있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는 말을 나는 이제 자조가 아니라 사실 확인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사실이 생각보다 견딜 만하다는 것, 아니 어떤 날은 심지어 아름답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터져버린 계란도, 엘리베이터 거울 속 얼굴도, 주말의 마트도, 액상 증기도. 이 모든 사소함이 모여 한 사람의 궤적을 만든다. 그리고 그 궤적은, 놀랍게도, 가끔 반짝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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