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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과정을 시로 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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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시집이라는 어딘가의 소개글에 혹해서 이혜미 시인이 쓴 시집 "뜻밖의 바닐라"를 읽었다. '사랑'에 대한 시다 알고 읽었는데도 잘 와닿지 않았다.  시집 말미에 평론가 오형엽이 쓴 해설을 보고서야 조금 이해가 갔다. 그는 이 시집을 교향곡에 비유한다. 물, 뼈, 빛, 소리, 네 가지 모티프가 어울려 사랑이 보여 주는 여러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읽으니 비로소 시와 어울릴 수 있었다. 시를 문자로만 이해하려 애쓰면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일과 같다. 내 경험과 생각이 시와 맞닿는 접점을 찾아 내가 시로 들어가거나, 시가 내게로 와야 시를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왜 시집 속 시들이 닿지 않았을까? 사랑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고 싶지만 상처가 두려워 멀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떠나는 나무

 물 깊을 홍이라 했다. 이름에 물을 지닌 자의 부드러운 쓸쓸함이 다가온다. 종이들이 풀어지고 나무의 몰두가 흩어진다. 가라앉는 수면. 떠도는 가지들을 본다. 혀 밑으로 구겨진 물들이 흐른다. 이름이 풀려 가는 넓이다. 

 손 닿자 수면이 물든다고 썼다. 얼룩진 셔츠의 문양을 따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던 여름의 물가. 두 손 가득 수면을 떠올려 건네면 몸속에서 울창해지는 숨, 같아지고 싶은 동그라미들. 몸이 기우는 속도를 따라 모래시계처럼 구르고 이르는. 너는 묻고 바라본다. 잘못해도 괜찮아? 도망가도 괜찮아? 

 물은 자라서 생각의 끝자리에 맺힌다. 귓속말이 흐르기 위해 습기와 대기를 참조한다는 게 믿어져? 나무가 우리에게 비밀을 건네기 위해 껍질의 무늬와 심장의 파문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물음표처럼 휘어지며 둥글어지는 비밀을 뭉쳐 건네면 목젖과 혀가 만나는 곳에서 궁금한 물들이 태어난다. 극심한 깊이다.

 지면을 더럽히는 다정들에 대해. 수면이 복기하는 키스들에 대해. 오래전 띄워 보낸 종이가 오늘의 물가로 선명하게 떠오를 때, 계속에서 차오르는 이름이 있다는 게 믿어져? 나는 출렁이는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이름에 나무를 심어둔 사람이 모르는 수심을 향해 나아간다고. 



 이 시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물'이다. 물은 스며드는 성질을 가졌다. 우리 몸에 물이 차면 부종이다. 무겁고 둔탁한 느낌이 들며 시선이나 관심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향한다. 타자와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어깨를 좁히며 움츠러든다. 원하지 않으니 행동하지도 않는 사람은 스스로 고독을 선택했으니 외롭지 않다. 원하되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두렵다. 속마음이 들킬까봐 두렵다. 마음이 드러났는데 거부당할까 두렵다. 도망치고 싶어진다.

 외로움은 허전함에서 오지 않는다. 내가 너무 넘쳐서 담을 수 없다는 실망감에서 온다. 자신의 과잉은 사랑에 있어 최대의 적이다. 마음이 내게로만 향하면 타인에게는 의문과 질문만 남는다. 과잉인 자아는 아무 것도 아닌 비밀들을 더 깊은 곳으로 감추기만 한다.


비파나무가 커지는 여름

 비파가 오면 손깍지를 끼고 걷자. 손가락 사이마다 배어드는 젖은 나무들. 우리가 가진 노랑을 다해 뒤섞인 가지들이 될 때, 맞붙은 손은 세계의 찢어진 안쪽이 된다. 열매를 깨뜨려 다른 살을 적시면 하나의 나무가 시작된다고. 그건 서로 손금을 겹쳐본 사람들이 같은 꿈속을 여행하는 이유.

 길게 뻗은 팔이 서서히 기울면 우리는 겉껍질을 부비며 공기 속으로 퍼지는 여름을 맡지. 나무 사이마다 환하게 떠오르는 진동들. 출렁이는 액과를 열어 무수히 흰 종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봐. 잎사귀들이 새로 돋은 앞니로 허공을 깨무는 동안.

 우리는 방금 돋아난 현악기가 되어 온통 곁을 비워간다. 갈라진 손가락이 비로소 세계를 만지듯이 나무가 가지 사이를 비워내는 결심. 서로가 가진 뼈를 다해 하나의 겹쳐진 씨앗을 이룰 때, 빛나는 노랑 속으로 우리가 맡겨둔 계절이 도착하는 소리.



 물에 부풀어 오른 살이 다 떨어져 나가면 뼈가 남는다. 달콤한 과즙이 배어 있는 열매를 먹으면 비로소 씨가 드러나는 이치와 같다.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과장된 겉치레를 벗고 진정한 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자아의 무게에 짓눌려 밖으로 나가지 못하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다. 과육 속 씨앗도 혼자서는 발아하지 못한다. 다른 곳에서 온 물과 만나야 생장을 시작한다. 진정한 관계는 본질끼리 만나야 시작할 수 있다. 뼈와 뼈가 만나야 씨앗의 발아처럼 새로운 관계가 싹튼다.


넝쿨 꿈을 꾸던 여름

 떨어진 능소화를 주워 눈에 비비니
 원하던 빛 속이다

 여름 꿈을 꾸고 물속을 더듬으면
 너르게 펼쳐지는 빛의 내부

 잠은 꿈의 넝쿨로 뒤덮여 형체를 잊은
 오래된 성곽 같지

 여름을 뒤집어 꿰맨 꽃
 주홍을 내어주고 안팎을 바꾸면
 땅속에 허리를 담근 채 다른 자세를 꿈꾸는
 물의 잠시(暫時)

 꽃은 물이 색을 빌려 꾸는 꿈
 옛 꽃들에 둘러싸인 검은 돌벽 위로
 생소한 돌기를 내뿜으며
 무수히 가지를 뻗는 여름의 넝쿨

 눈 없는 잎사귀들처럼
 뜨거운 잠의 벽을 기어오르면

 눈동자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의 손가락들

 입술을 뒤집고 숨을 참으니
 원하던 꿈속, 물꿈 속



  이 시는 시집에서 가장 밝고 서정적이었다. 어둡고 음습한 물의 이미지가 반전되었다. "꽃은 물이 색을 빌려 꾸는 꿈"이라니! 타자와 교감하면 내 안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 같다. 무겁고 짓눌려 암흑과도 같던 내면이 환해진다. 바깥이 둘러싸고 있는데 어떻게 안으로 빛이 들어올 수 있을까? 시인은 안과 밖을 뒤집는다고 표현했다. 내면은 외부로부터 들키지 않게 지키고 다치지 않게 보호하면 더욱 연약해지고 오히려 상처 입기 쉽다. 겉으로 드러내 외부 자극을 받아야 강해진다.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단단해진 내면이 누군가와 교감할 때 빛이 들어온다.


탑 속에서

 잠에서 깨어나 끝없는 계단을 내려왔다. 등불을 버리고 발꿈치를 붉게 적셔가며 나선형의 계단을 돌고 돌았는데...... 계단은 다시 시작되고 훔쳐온 금종(金鐘)이 점점 무거워졌다

 지나치게 많은 빛을 선물 받는다면 곧 얼룩 속에 들겠지 돌벽에 귀를 대고 먼 새들을 부르면 나무들이 온몸의 절망을 다하여 팔을 벌린다 어째서 나는 이 부재 속에 있는가 잠든 이는 아직 소용돌이치는 탑 꼭대기에 있는데

 훔쳐온 어둠을 담고 몸속으로 한없이 수족을 말아 넣으면 멀리에 심어둔 눈썹에 볕이 닿는 것 같다 올라가는 계단만이 이어지는 새로운 탑 속에 들어선 것 같다

 깃털을 뽑아 쓰고 싶은 것들을 모두 적는다면 곧 날개를 잃고 낙서들 위에 쓰러져 죽겠지 소리를 얻고 빛을 내어준 종탑의 짐승이 되어 나는 거대하게 자라난 종을 울린다 손가락이 바스러질 때까지 얼굴이 소리가 될 때까지 종에서 쏟아진 것들이 탑을 흔들다 이내 무너뜨릴 때까지



 중국의 작가 위화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고 했다. 천안문 사태 당시 그는 캄캄한 새벽에 사람들이 모인 집결지로 가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군중이 모인 곳으로 향하는데 그 곳에서 나오는 불빛보다 사람들이 외치는 함성과 노래가 먼저 들려왔단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대한 광경은 스펙타클했다.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고 노래할 때, 온 몸과 마음이 울렸다. 이유나 원인을 떠올릴 틈도 없이 감동이 솟구쳤다. 생물학적으로도 시각보다 청각이 더욱 근원 본능적이라고 한다. 시인은 빛이 교감이라면 소리는 탄생이자 창조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랑의 절정, 환희는 파괴적이다. 격정은 눈사태처럼 모든 것을 삼킨다. 이 상태를 어찌 시각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섹스할 때 오르가즘을 "종이 울린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청각이 더 알맞다. 절정이 지난 후, 어쩌면 우리는 갈증으로 다시 물을 흡수해 부종 가득한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물, 뼈, 빛, 소리의 단계를 다시 거칠 수도 있다. 물에 빠져 허우적 대는 채 변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물을 가득 몸에 지니고 있다. 상처 입을까 두려워 마음을 감추기만 했다. 그럴수록 더 아팠다. 나는 결국 다시 물 속에서 허우적대더라도 절정을 맛보고 싶다. 자 이제 어떻게 물을 비워낼까.
 
프롤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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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라마 2017-11-14 23:56:33
지난 여름에 이 시집을 읽고 감상문을 썼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 올려봅니다.
유스호스텔/ 움.. 과정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오르가슴이 청각에 알맞다고 말씀하신 것에 공감이 가네요ㅎ 하는 도중에 상대방에게서 '쌀 것 같아?' 라든가 '싸 줘' 와 같은 말(신음을 포함해서) 들으면 더 잘 느껴지게 되는 거 같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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