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본 글을 소개합니다(김은희, 자유주의 성윤리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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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자유주의자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많은 이들이 프리섹스(free sex)를 즐기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오직 결혼한 배우자와만 출산을 위한 섹스 위주의 성생활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성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의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비일관적으로 들리는가?"
10월 레홀독서단에서는 홍승희 작가의 '붉은 선: 나의 섹슈얼리티 기록'을 읽었습니다. 가정학대, 자위, 성적 자유, 성폭력피해, 성매매, 폴리아모리, 동성애, 퀴어플라토닉, 나아가 범성애(판-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주제로 저자의 경험을 고백하는 책인데요.(저자는 참 많은 경험을 했네요.) 저도 제 자신을 돌아보며 섹슈얼리티의 적절한 윤리 기준이 무엇인지 더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굳이 윤리 기준이 왜 필요해? 피해 안 주고 내가 좋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더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당연해 보이는 윤리개념이 포섭되어 있으니 우리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지 않는 한 각자의 기준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돌보는 셈입니다.
제목이 끌리는 논문을 발견하였어요. 서울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김은희 박사의 "자유주의 성윤리의 수정: 쾌락 중심에서 자율성 중심으로(한국여성철학 제19권, 2013)"인데요. (그의 <성의 철학과 성윤리>는 학생들이 매우 좋아하는 인기강좌라 하는군요.) 맨위의 인용문은 이 논문의 서론 첫 문단입니다.
처음에는 성적 행동을 선택하는 기준을 더 명확히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 논문을 읽었는데 뒤로 갈수록 실재하는 문제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보다 형이상학적 논의가 주를 이루어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삼을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섹슈얼리티의 지향점을 체계적으로 탐색하는 흥미와 함께 무엇보다도 개인의 선택보다도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어요. 이런 고답적인 논의를 왜 하나 할 수도 있지만 당장 퀴어축제만 해도 찬성과 반대가 극명하게 엇갈려 아수라장인 오늘의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부먹, 찍먹' 고르듯 취향에 따라 좋다 싫다 할 문제는 아니니까요.
발췌하여 정리해 봅니다.(논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편집, 소제목은 임의로 부여)
88쪽-94쪽
<보수주의 성윤리란 무엇인가> 보수주의 성윤리에서 섹슈얼리티는 출산이나 결혼 혹은 결혼을 염두에 둔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도덕적인 것이라고 본다.(보수주의 성윤리는 가부장주의와 구별된다. 가부장주의는 유독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무거운 도덕적 통제와 비판을 가하는 입장이다. 보수주의 성윤리는 남녀를 구분한 도덕적 요구를 하지 않는다.) 보수주의 성윤리를 이루는 사상의 원천은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① 목적론적 세계관(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자위 또는 동성애와 같이 신이 성기와 성욕에 부여한 출산이라는 목적에 어긋나는 행위는 부도덕함. <비판> 근대 이후 자연과학계에서 더 이상 인정되지 않음 ② 고전적 금욕주의(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 기독교 성윤리의 기본): '행복=실현/욕구'의 함수에서 욕구를 줄여 행복을 극대화 <비판> 이와 같은 함수에서 인간의 역사는 실현을 키우는 방향으로 발전 ③ 칸트의 성윤리: 인격의 수단화를 금지하는 정언명령의 관점에서 성행위는 성적 파트너의 인격을 수단화하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부도덕함, 다만 결혼은 인생을 서로 헌신하기로 약속한 것이므로 몸을 이용하는 허락을 포함하였기 때문에 성행위가 허용됨. <비판> 결혼 여부에 관계 없이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고 서로의 뜻에 따른 성행위가 왜 인격을 수단화하는 것인지 설명하지 못함 ④ 사랑과 성의 결합설(스크루턴 Roger Scruton): 사랑과 연결되지 않은 성은 인격의 파편화를 초래, 몸과 마음의 일치를 강조 <비판> 사랑이 목표여야 한다는 당위성의 한계 노출, 자발적으로 사랑을 최종 목표로 삼지 않고 성행위를 한 경우 인격이 파편화된다고 할 수 없음 95쪽-109쪽
<자유주의 성윤리란 무엇인가> 이에 반하여 자유주의 성윤리는 성행위와 성욕이 출산, 결혼, 사랑과 같은 목적과 연결되어야 도덕적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이들은 성의 본질을 쾌락에 두며 자율성을 중시한다.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성윤리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들에게도 해악 금지 원칙 등 일반적 도덕이 성행위에 적용된다.) 그런데 쾌락과 자율성이 충돌해 보이는 사례가 있다. 예컨대 자율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일방이 출산을 위해 성행위를 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성행위를 하는 것이다. 쾌락 중심의 자유주의 성윤리에서는 이런 사례를 성행위라 보기 어렵다. 과연? <성적 변태>
쾌락을 성행위의 핵심으로 보는 골드만은 통계를 바탕으로 한 성욕의 정상치 the norm에서 벗어나는지 여부로 '성적 변태' 개념을 제시한다.(예컨대 접촉 없이 바라보기만 하려는 욕구, 페티시즘 등) 많은 성윤리 이론가들이 성적 변태라는 개념을 사용하되 도덕적 비난은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소수의 성' 또는 '특이한 성'이 아니라 '성적 변태' 개념을 유지하는 한 윤리적 함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프리 섹스 free sex, 결혼, 질투>
버트란드 러셀은 부부는 서로의 자유로운 사생활을 인정해야 하고 이혼할 만한 사유라 할 수 없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자율적으로 합의하여 성적 배타성을 갖기로 하였다면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이 문제는 성개방형 결혼 open marriage 논의로 나아갈 수 있다. 다만 배우자의 질투는 제거되어야 할 감정이다. 러셀은 성적 질투는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태도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한다. 요컨대 보수주의 입장을 벗어난다면 부부 각자의 성적 자율성은 자율적으로 합의한 내용을 지키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이를 어길 때 약속 관계에 있는 상대방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는 부도덕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성과 사랑의 분리 sex without love>
바노이 Russell Vannoy는 섹스와 사랑은 서로 연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상반된 이상을 향해 가는 이질적 가치라고 본다. 이에 대해 많은 여성들은 사랑을 동반한 섹스를 선호하며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사랑의 가치를 결합한다는 비판이 있다. (그 이유는 여성에게 섹스는 폭력에 노출될 우려가 있는 행위라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헌신할 수 있는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에서 비롯했다는 시각이 있다.) 르몽첵 Linda LeMoncheck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관점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이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억압적이면서 동시에 해방적일 수 있다. 여배우가 성해방의 표현으로 포르노그라피적 행위예술을 하더라도 관객은 그 행위를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적 속박을 동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호혜성 reciprocity과 합의>
우리 사회에서는 상호 동등하지 않은 지위, 즉 A가 합의를 통해 얻어갈 몫이 100이고 B는 1이어도 합의한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양족 모두 아예 이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율성의 측면에서 서로 이익이 되는 호혜성의 개념은 도덕기준으로 충분한가? 벨리오티 Belliotti는 굿섹스 Good Sex에서 칸트적 윤리를 도입하며 상호 성적 착취가 있지 않은지 검토하고 여성주의와 맑스주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109쪽-119쪽 보수주의와 쾌락 중심 자유주의를 벗어나 자율성 중심의 자유주의르 지향하며 다음을 제안한다. <변태론 반대>
지칭 대상이 애매하거나 모호한 변태 개념은 결국 어떤 대상들에 대한 가치 위계질서를 함축한 가치평가, 즉 화용론적 역할을 하여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부정적 대우를 받게 한다.(중세의 '마녀'처럼) 자연스러운가 변태적인가 하는 기준을 벗어나 변태 개념을 해체하고 그에 포함된 행위를 재분류하여 정당한가 부당한가, 합리적인가 비합리적인가 기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부당하지도 비합리적이지도 않은 행위를 흔한가 흔하지 않는가를 기준으로 가치평가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 목적론에 정의로움 더하기>
보수주의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벗어나 성욕은 개인적 목적론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결혼 후에도 프리섹스를 원하는 사람은 이것을 상대에게 밝히고 상대방으로부터 진정한 동의를 얻을 경우 개인적 목적론을 수정할 필요가 없고 부도덕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의 의미부여의 방식은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나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정은 늘 변화에 노출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또한 이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의 삶과 섹슈얼리티는 아무런 좌표 없이 부여하여 떠도는 것으로 간주될 필요는 없다. 이제 성윤리는 각양각색의 개인적 목적론들의 상호 양립가능성과 공존가능성을 확보해줄 정의 담론을 필요로 한다. 일단 개인의 자율성을 잘 존중하기 위한 기본적인 규범들을 포함하게 된다.(해악을 주지 않기, 기만하거나 강제하지 않기 등) 나아가 롤즈 John Rawls의 정의관념을 고려하여 공정한 사회 협력체의 구조 자체가 참여자들 간의 동등성을 의미하는 호혜성과 정의로움을 충족하는지 거시적 구조적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 경우 사회적 약자 계층인 최소수혜자가 성윤리에서는 누구인가? 섹슈얼리티 분야에서 소외되고 부당하게 차별받아온 시민들을 궁극적으로 등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이끄는 특별한 정책이 포함되어야 한다.(예컨대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 인식 개선 캠페인, 여성에 대한 성적 제안이나 성적 농담이 피해일 수 있음을 알리는 성교육 의무화 등) <성욕을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힘> 자유주의 성윤리 담론을 받아들인다고 진정한 성적 자율성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의 성욕이 자연적이라는 생각은 그것을 억압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하지만 욕구 형성에 관한 논의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주요하게 성욕을 좌우하는 비가시적인 힘, 자본주의의 힘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여전히 우리 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이루는 가부장적 각본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요구한다. 이제 금욕주의는 욕구의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닌 욕구를 지배하는 사회적 힘들에 대한 저항과 욕구에 대한 성찰, 내스스로가 욕구의 주도권을 잡도록 하는 훈련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롤즈적 자유주의를 정의 담론으로 받아들이는 자율성 중심의 자유주의의 취지를 완성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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