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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두렵게 만드는 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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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Monty Python's The Meaning of Life] 어느 사회나 그 사회만의 독특한 도덕의식이나 윤리의식이 있다. 이런 의식들이 부모로 하여금 성에 대한 언급을 아예 회피하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점잖은 가풍 등도 올바른 성 지식을 전달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물론 관습이나 신념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 없이 억압만 할 경우 도덕이나 윤리마저도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요즘은 학교에서도 성교육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교육이 피임과 임신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생식기에 대한 설명을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임신이 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사실 피임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섹스를 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낙태 장면이 강조되면서 임신 당사자인 여자는 자신이 피해자처럼 느껴지게 되고 임신을 시키는 남자는 가해자처럼 인식하게 된다. 결국 성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 키워줄 뿐 진정한 성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은연중에 이런 남녀 간의 차별적인 성교육은 대등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랑을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섹스가 남녀 간에 교감을 나누면서 사랑의 깊이를 더해주는 행위로 이해되지 못하고 순전히 육체적인 문제이고 본능적인 충동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잘못된 성교육은 이런 사고에서 출발한다. 충동적인 성관계에 대한 예방과 피임만을 강조하다보면 성을 무시하게 된다. 그리고 섹스가 남자의 전유물이 되어 개인적인 권위나 정복욕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오해된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의 배설 수단으로 여자를 이용하거나 소유하는 것을 섹스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분명히 성욕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단지 성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그것도 남자의 배설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성욕 자체가 위험시되어 성욕을 억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남자의 충동적인 성욕을 막기 위해 여자가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성을 억압하게 되는 것이다. 성욕에서 사랑의 유대를 빼버리고 나면 섹스는 경직되고 억압되어 결국 원하지 않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성욕 자체도 변질될 수밖에 없고 결국은 성에 대한 경멸, 성병, 성적학대, 강간 등 여러 성폭력을 낳게 된다. 결혼을 해서 부부 생활을 하는데도 방해가 될 뿐 아니라 가정 폭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가정 내에 부부간의 평등한 관계보다는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인식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1960년대 성 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리섹스’라는 말이 등장한다. 성 지식에 대한 진지한 연구도 없이 단지 성의 억압에 반발하여 문란한 성생활을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여자의 성적 즐거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성에 대한 인식이 문란한 쪽이냐 아니면 성을 억압하는 쪽이냐 하는 식으로 개방과 보수가 나누어진 것은 문제라고 본다. 양쪽이 모두 섹스는 순전히 육체적인 문제이자 본능적인 충동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인식에서 성교육이 시작되다보니 섹스의 진정한 가치가 무시되고 단지 성욕을 해결하거나 억압하는 데만 급급하여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성에 대해 사회가 만들어놓은 잘못된 인식은 성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그 두려움이 부모, 선생, 사회에 의해 좋은 의미로 다음 세대까지 전해진다. 그래서 이런 교육을 받는 젊은이들은 성의 전체적인 모습과 흐름을 이해하기도 전에 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먼저 배운다. 성에 대해 자발적이지도 못하고 사랑의 기쁨이나 경의를 표현하는데도 불편해하고 어색해한다. 즉 성이 사랑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육체적 행위로만 남다 보니 성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이런 성교육을 받고 자란 젊은이들은 개방적이든 보수적이든 간에 모두 성 자체에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성에 대해 본능적으로 행동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애써 외면하기 때문에 성적 행동만 앞섰지 성과 사랑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것이다. “조심해. 사랑과 섹스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버리면 너만 상처를 입게 돼.” 성에 대한 두려움은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의 교감마저도 방해한다. 사랑을 키워나가야 할 남녀가 단지 성적 충동을 해결하기 위해 한쪽은 공격적으로 나오고 다른 한쪽은 그런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갈등의 관계로 전락한다면 처음 사랑의 의미마저도 변질하게 된다. 그래서 관계를 갖고 난 후에 이용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위 해방》을 쓴 베티 도슨은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꼬마 빌리에게는 페니스가 있고 꼬마 메리에게는 질이 있단다. 빌이 페니스를 질에 집어넣으면 아기가 생기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꼬마 빌리에게는 페니스가 있고 꼬마 메리에게는 음핵이 있단다. 이곳을 서로 세심하고 특별한 손길로 어루만지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단다.’ 우리는 성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베티 도슨의 이 말은 성교육이 피임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교육이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고 함께 성적 즐거움을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베티 도슨의 ‘함께 성적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성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성교육이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냐면 남녀 간에 성적 즐거움을 나누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그보다 먼저 성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아무리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남녀 간의 차별적이고 서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되어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원래 섹스는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분리된 외로움에서 벗어나 완벽한 친밀감과 일체성을 경험하기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또 다른 나의 만남, 반쪽과 또 다른 반쪽의 만남이라는 대등한 관계에서 하나가 되는, 그래서 온전해 질 수 있는 그런 신성한 행위가 될 때만 영적 충족감을 느낄 수가 있다. 섹스를 이런 가치관에 의해 교육하게 될 때 비로소 베티 도슨의 말처럼 남녀 간에 성적 즐거움을 두려움 없이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육체적인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충족감을 느낄 수 있어서 흔들림 없이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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