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자지에 담긴 자연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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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우리말도 탄트라 용어 못지않게 자연의 섭리를 담고 있다. 어떤 관념이나 편견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함으로 보자면, 굳이 신성의 의미를 부여하는 탄트라보다 우리의 말이 훨씬 더 맑고 투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 성기의 명칭은 ‘보지’와 ‘자지’, ‘씹’과 ‘좆’이다. 입에 담기도 거북한 이 명칭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터부시되고 금지된 언어’지만, 원래 이 명칭들은 국어사전에서 표준말로 표기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보지’, ‘씹’, ‘좆’은 비속어로 전락해버렸는데 ‘자지’는 지금도 남성의 외성기로 표기되고 있다. 여성의 성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하지만 성 담론이 활발해지고 아름다운 성적 경험으로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이끄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다른 이름도 모두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그러면 순수 우리말에 담겨 있는 자연의 섭리는 무엇일까?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국어학회’의 설명을 들어보자. <보지> 개정되기 전의 국어사전에서 ‘보지’는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를 지칭한 표준어”라고 되어 있다. 보지의 어원은 ‘볻’이 다. ‘볻’은 뿌리나 씨種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고어인데 동북아 일 대에서 아직도 변형되어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이 ‘볻’은 다시 ‘볼’이고 여기에 접미사 ‘옴’이 붙어 ‘보롬’이 되며 이것은 다시 ‘ㄹ’이 떨어져 ‘보옴’이 된다. ‘보옴’은 지금 우리가 현대어에서 사용하고 있는 ‘봄’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지’와 ‘봄’은 결국 같은 말이다. <씹> 개정되기 전의 국어사전에서 ‘씹’을 찾아보면 “성숙한 어른의 보지”라고 되어 있다. 같은 보지인데 ‘어른의 보지’를 ‘씹’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씹’의 어원은 씨의 입, 즉 남자의 씨를 받는 입이란 뜻으로 ‘씨’와 ‘입’의 순우리말 복합어다. 두 말을 붙여서 발음해보면 ‘씨입’, ‘씹’으로 소리 나는데, 후에 사용되면서 ‘씹’으로 굳어졌다. 즉 남자의 씨앗을 받아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성숙한 여인의 성기를 나타낸 순우리말이다. <자지, 좆> ‘좆’과 ‘자지’의 어근은 ‘잦’이다. 두 단어는 단지 모음의 차이일 뿐이며 같은 뜻의 단어다. 그런데 ‘ㅈ’은 ‘ㄷ’에서 변한 자음이다. 따라서 ‘좆’과 ‘잦’은 ‘돋’과 ‘닫’이 조어가 된다. 일 본 류큐어琉球語에서는 남자의 자지를 ‘다니tani’라고 하는데, 어근 ‘단tan’은 ‘닫tat’이 조어가 된다. 우리나라 말의 ‘닫’과 완전히 일 치한다. ‘닫’의 원뜻은 ‘씨種’다. 만주어에 ‘다림비tarimbi(씨를 뿌리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근 ‘달’이 씨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서 어근 ‘달’의 조어는 ‘닫’이다. 결국 자지와 좆은 ‘씨앗’을 의미하는 같은 말이다. <불알> 내친김에 ‘불알’의 어원도 알아보자. ‘볼’의 모음이 바뀌어 ‘불’로 변했는데, 남자의 생식기를 지칭하는 ‘불알’에서 사용되는 ‘불’이 바로 그것이다. ‘돼지 불을 친다’, ‘불두덩 한번 튼실하다’, 이런 표현들도 마찬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여성의 생식기를 뜻하는 ‘보지’와 남자의 생식기를 뜻하는 ‘불’이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점도 재미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여자의 생 식기를 ‘호도hoto’라고 하는데, 이 역시 어근 ‘볻pot’이 ‘보도photo’라는 과정을 거쳐 생성된 말이다. 이처럼 우리말 성기 이름에 담긴 의미는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탄트라처럼 거창한 의미를 싣지도 않고 욕망의 군더더기도 없다. 대자연이 암수, 음양 화합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에 여자와 남자가 서로 끌림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음양의 조화로움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주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신의 반쪽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보지’에 ‘뿌리’의 의미가 담긴 것은 왜일까? 생명이 모태에서 잉태되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머니의 자궁을 자신의 고향이자 뿌리라 여길 수도 있겠다. 좀 더 근원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근원, 뿌리에 대한 참 진리가 ‘보지’ 속에 숨겨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씨앗이나 뿌리는 생명의 처음이며 근본이 되는 것이니 결국 탄트라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 자신의 근원에 대한 진리가 성기 속에 담겨 있다는 뜻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우리말 ‘보지?자지’, ‘씹, 좆’에는 대자연의 이치에 따라 운행하는 음양의 철리가 담겨 있으니, 그 이름을 거리낌 없이 소리 내어 부르는 일은 잃어버린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고 순수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건강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소리는 자체의 파동이 있어 소리 내어 말하면 그 음파가 말 하는 언어의 본질적인 영역으로 데려간다. 성명학姓名學에서 설명하길, 이름은 잘 지어야 하고 좋은 이름은 자주 불러주어야 당사자가 잘 산다는 이야기와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겠다. 경상도 사투리 중에 ‘주딩이가 보살’이라는 말이 있다. 결혼 전에 선후배들과 어울려 놀러 간 적이 있다. 일행은 몇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이동하던 중 휴게소에 들렀는데 한 대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확인할 길은 요원하고, 사람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초조함을 참지 못한 나는 불쑥 “사고라도 난 거 아니야?”라고 내뱉었다. 그때 우리처럼 초조하기가 매한가지였던 리더 선배가 나를 보고 “말 함부로 하지 마라”라고 조용히 타일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모두들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지만 함부로 염려되는 상황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는 입을 닫았다. 말은 내뱉는 순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그대로 현실로 재현해내는 힘이 있다. 이에 대한 지혜가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 “아름다운 말, 부드러운 말을 써라” 등 생활 속의 가르침에 그대로 배여 있고, 법당의 주문이 모두 좋은 경구로 이루어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현대 과학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리와 파동 형태의 진동에 의해 창조된다고 설명하고 있어 소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말 자체가 가지는 현실 창조력만큼이나 그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말도 나쁜 의미로 사용하면 원래의 뜻이 굴절되어 왜곡되고 일그러진다. ‘보지, 자지’, ‘씹, 좆’과 같은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하면 부정적인 관념이 정화되어 성적 기쁨이 보다 빨리 깨어난다. 하지만 욕망에 눈먼 섹스나 육체적인 탐닉만을 좇는데 사용한다면 짜릿한 말초적 감각과 기묘한 스릴, 색다른 섹스를 즐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혼을 정화하지는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진실한 면모들을 만나더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비뚤어진 욕정만을 좇으면서 스스로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는 실수를 거듭한다. 이혼 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 하던 한 남성이 상담을 요청해온 일이 있다. 일반 상식을 벗어난 여러 형태의 성행위로 인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없어 괴롭다고 했다. 그는 ‘보지, 자지’란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성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감각을 가졌지만, 안타깝게도 연인과 관계를 맺는 일에는 실패를 거듭했다. 상담을 해보니 그는 일반적이지 않은 섹스에 몰두하던 헤어진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그녀처럼 아니 그녀보다 더 새로운 자극, 새로운 형태의 섹스만을 갈구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가 바라는 것은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적 관계였으나 그의 내면에서는 성욕을 충족시켜줄 새로운 자극제로서의 여성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동반자적 관계를 맺을 만한 여성이 나타나도 스스로 거부하고 자신과는 맞지 않다는 핑계를 대곤 하며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성기의 본래 이름을 불러준다 해도 이 남성처럼 올바른 관점과 건강한 관계를 전제로 한 섹스를 거부하면, 향후의 섹스는 왜곡된 방향으로 진행되고 한 사람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 ‘성’은 비밀에 싸여 있고 ‘욕망’은 금기시되는 만큼 치명적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모든 것이 명명백백 천하에 드러나면 비밀한 신비감이나 금지된 장난이 부추기는 희열로부터 자유로워져, 건강한 관계에 바탕을 둔 진실한 사랑과 섹스를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성기(의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자연의 철리를 이해하고 ‘보지’, ‘자지’, ‘씹’, ‘좆’이라는 용어를 건강하게 사용한다면, 법당에서 부처님의 법문을 읽는 것과 같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다. 그러하기에 진실로 깊이 신뢰하는 연인들은 이 말을 즐겨 사용하여 뜨겁고 농염하게 즐기면서도, 주변의 관계를 잘 조율하는 내적 통찰력을 가진다. 힐링섹스의 여러 코스에서는 성기를 지칭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 이름을 사용한다. 참석자들은 처음에는 어색해하고 주저하다가도 점점 횟수가 늘면 아주 후련해지고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성기의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것은 자연 에너지를 억압하는 것과 같아서, 몸과 마음은 그 에너지가 터지지 않게 붙잡고 있느라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마치 압력밥솥에서 김을 빼지 않은 채로 계속 불을 지피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모든 신경증의 원인을 ‘억압된 성욕’으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성기 이름을 소리 내어 뱉어내면 압력밥솥의 추를 눌러 김을 빼주는 것과 같은 작용을 한다. 갇혀 있는 에너지가 자동으로 풀려나가 내적으로 후련한 해방감을 느끼면서, 억압이 풀려나간 공간에 평화로움이 채워지고 평온한 기쁨이 뒤따른다. 처음 세션을 시작하고 몇 년간 나는 ‘요니?링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우리말로 바꾸자 나와 오래 함께해온 사람들조차 내 입에서 원색적으로 튀어나오는 ‘보지?자지’, ‘씹?좆’이라는 말을 몹시 불편해했다. 신성하고 거룩하던 성기가 갑자기 저속한 욕지거리로 전락해버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섹스는 아름다운 것이다”, “성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몸공부는 마음공부 중에서도 가장 최상위의 공부다”라고 당연한 듯 말하던 그들에게도, 성기나 섹스를 말할 때는 아직은 더 고상하고 우아하며 신성한 포장지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내가 분별력 없이 아무 데서나 ‘보지?자지’, ‘씹?좆’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무엇을 저어하는지 한동안 불편해했다. 나는 우리말의 파동이 그들에게 깊숙이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지속적인 작업을 했고, 곧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불편함 없이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세션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성기 이름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정화를 빠르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터부시하고 문젯거리라고 타박만 했던 자신의 성욕을 자연 에너지로 존중해주고 명확한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오랜 세월 억눌러온 자신의 성적 자아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의 길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은 성기의 제 이름을 바로 불러주는 일이 얼마나 요긴하고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우리의 성기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려고 한다. 다소 불편하고 거북함이 있더라도 성적인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 성기의 파동으로 몸을 완전히 깨우는 작업이라 생각하고 읽어주길 당부한다. 어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이긴 하지만, 섹스와 성기에 대한 관점을 바로잡아주고 우리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태도를 점검할 수 있도록 해주는, 퇴계 이황과 소년 이항복의 대화가 있다. 눈, 머리로만 읽지 말고 가슴을 열어 온몸으로 읽어보기 바란다. 조선 왕조 14대 임금인 선조 때의 일이다. 퇴계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선조의 부름으로 다시 입궐하게 되었는데, 퇴계를 맞이한 백관들은 입궐하기 전에 퇴계를 남문 밖의 한가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퇴계에게 성리학에 관한 온갖 현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좌정하고 있을 때, 어린 소년 하나가 성큼 들어와 퇴계에게 절을 하고 말했다. “소생은 이항복이라 하옵니다. 듣자 하니 선생께서는 독서를 많이 하여 모르시는 것이 없다고 하기에 여쭈어볼 말씀이 있 어 이렇게 왔습니다. 우리말에 여자의 소문小門을 ‘보지’라 하고, 남자의 양경陽莖은 ‘자지’라 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퇴계는 이항복의 질문을 받자 얼굴빛을 고치고 자세를 바로 한 후, 찬찬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소문小門은 걸어 다닐 때 감추어진다고 해서 ‘걸음 보步’, ‘감출 장藏’, ‘갈 지之’, 석 자로 ‘보장지步藏之’라 한 것인데 말하기 쉽도록 ‘감출 장藏’은 빼고 ‘보지’라 하는 것이다. 남자 의 양경은 앉아 있을 때 감추어진다고 해서 ‘앉을 좌座’, ‘감출 장藏’, ‘갈 지之’, 석 자로 ‘좌장지座藏之’라 한 것인데, 이것 역시 말하기 쉽도록 ‘감출 장’을 빼고 ‘좌지’라 한 것인데 잘못 전해져 발음이 변해 ‘자지’라 하는 것이다.” 이항복이 다시 물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보지를 ‘씹’이라 하고, 남자의 자지를 ‘좆 또는 좇’이라고 하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퇴계가 다시 대답했다. “여자는 음기陰氣를 지녀 ‘축축할 습濕’ 자의 발음을 따라 ‘습’이라 한 것인데 우리말에는 되게 소리를 내는 말이 많아 ‘씁’ 자로 된소리가 되었고, 이것이 발음하기 편하게 변해 ‘씹’이 된 것 이요, 남자는 양기를 지녀 마를 ‘조燥’ 자의 음으로 ‘조’라 한 것인데 이것 역시 된소리로 ‘좇(좆)’으로 변한 것이다.” “말씀을 듣고 나니 이치를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항복은 이렇게 말하고 천연덕스럽게 나갔다. 이항복의 거동을 지켜보던 백관들은 어이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뉘 집 자식인지는 모르나 어린아이가 어른들 앞에서 발랑 까져서 저런 싸가지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필경 버린 자식일 거요.” 퇴계가 이 말을 듣고 엄숙한 목소리로 이렇게 나무랐다. “당신들은 어찌 저 아이를 함부로 ‘싸가지 없다, 까졌다’ 하시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 이미 ‘자지’와 ‘보지’를 몸의 일부분으로 타고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또 말과 글을 빌려 그것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이요? 다만 음과 양이 서로 추잡하게 합하여 사람 마음이 천박해지는 것을 꺼리는 까닭에 그런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지, 순수한 마음으로 말할 적에야 백 번을 부르기로서니 무엇을 꺼릴 게 있겠소. 저 소년이 나를 처음 보고 음양의 이치부터 물은 것을 보면, 장차 이 나라의 큰 인물이 되어 음양의 조화와 변화에 맞게 세상을 편안히 이끌어나갈 사람이라고 생각되오.” 다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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