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럭척]
나는 선배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 살과 살의 물오른 소리와 당시의 풍광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A와 헤어졌던 그 날의 전말을 다시 한 번 꼼꼼히 되씹어보고 있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A에게 내가 싫어졌느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그녀는 말없이 티슈를 적시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더 이상 질문을 건 내지 않았다. 그저, 잘 마른 새 티슈를 A에게 쥐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날, A와 헤어지던 날이 지극히 슬프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따지고 보면 벅찬 감동이나 간질거리는 설렘을 동반한 만남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도 나처럼 외로움이라는 구현화되지 못한 감정들을 그저 육체적 불구덩이에 밀어 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별 뒤에 불어오는 슬픔은 이해라는 개념의 반대 방향에서 불어온다. 티슈를 적시던 그녀의 침묵이 이해가 되었다. A는 나와 헤어지고 난 뒤 선배와 도서관 건물 빛 바랜 곳에서 ‘어쩌면 내가 바래왔을지도’ 모를 행위들을 했다. 그러나 나는 딱히 그러한 사실에 대해 불온한 감정을 품을 수 없었다. 그저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나는 불완전한 방문자였고, 내가 그 둘의 성애 적 행위를 폄하 할 수는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
술집에 들어서니 선배와 재떨이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쌓인 담배꽁초들은 ‘내가 널 이만큼이나 기다렸어’ 라는 증거물과도 같아 보였다. 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라고. 그리고 선배는 진귀한 유물이라도 보듯이 나의 얼굴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며 답했다. 어서 와요.
술집 고유의 소란스러움을 누군가 말미잘의 흡착판으로 모조리 끌어간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저 <꿈의 대화>가 이름 모를 삼류 가수의 목소리로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어색함에 견디지 못해 말보로 레드를 한 개비 꺼내 피웠다.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나는 아, 하며 ‘선배님 담배 좀 피워도 될까요?’ 라고 물었다. 선배는 눈을 작게 오므리며 웃었다. ‘편하게 펴요. 괜찮아요.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요.’
한 잔 받으세요. 라며 선배가 나에게 술을 권했다. 나는 급하게 차오른 소주를 삼키고는 솔직히 말을 했다. 다 보았다고, 하지만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은 우연이었고 금방 자리를 나왔다고. 불쾌했다면 죄송하다고. 선배가 술을 자기 잔의 따르더니 자신의 입에 부었다. ‘오히려 불쾌해 해야 할 건 그 쪽인 것 같은데’ 나는 선배의 얼굴을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A는 여전히 그쪽 이야기를 자주해요. 저와 자주 한 잔씩 걸치곤 하는데. 결국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쪽의 이야기로 끝이나요.”
우리는 또 다시 오랜 시간을 말없이 소주만 마셨다. 나는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 한 채 그저 굴곡진 한 줌의 감정을 쥐며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직설적인 질문을 그 면상에 내리 꽂았다. 그래서 A와 선배는 지금 서로 사귀는 사이입니까? 아니면 그저 섹파일 뿐입니까? 글세요. 아마도 그쪽이 말하는 섹파겠죠? 우리는 사귀자고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했으니까.
나는 이 사람과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자리에 나왔을까? 이미 헤어진 전 여자 친구가 나와는 결코 하지 않으려 했던 야외 섹스를 즐기는 장면에 피가 역류해서? 아니면 그 둘이 그 후에 모텔에 들어갔는지, 그 자리에서 한 손엔 젖가슴을 다른 한 손으론 골반의 윗부분을 움켜잡으며 사정했는지를 알고 싶어서?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후론 어떻게 되었더라? 아마도 나는 병신 같이 소주를 따르고, 마시며 사실은 힘들었다고, A와 헤어져서 폐허가 된 표정들 속에서 빈집이 되어만 갔다고 하며 다시 울었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눈물이 많은 종자였으니까. 어쨌든 나는 이 선배를 이상하게도 미워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선배를 미워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선배와 나는 자주라고 하기 엔 적고, 가끔이라고 하기 엔 많은 애매한 횟수를 유지하며 술자리를 가졌다. 선배는 자연스레 반말을 했고, 나는 자연스레 담배를 피웠다. 나는 선배와 함께 힘겨운 과제를 협력하여 해치우듯이 여자와 섹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시간은 여자 친구와 오전 강의를 빼먹고, 학교 밑에 있는 모텔에서 침대 시트에 거친 촉감을 상기하며 밀어 넣는 한 낮의 관능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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