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를 찾아줘]
비밀은 비밀로 좋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비밀은 더욱 비밀이어야 한다
낡은 트럭을 타고 꼬불꼬불 절벽 산길을 가다가 핸들이 고장이 나서 차가 데굴데굴 굴렀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떠 보니 책상 위에 놓인 삐삐가 드르르륵 울고 있었다. 삐삐를 들여다 보았다. 음성이었다. 토요일까지 끝내기로 약속한 교정을 그놈의 날씨, 퍼붓는 5월 장마를 구경하느라고 마저 끝내지 못했는데 편집부장이 교정을 재촉하느라고 쳤을 것이다.
내일 오전까지만 하면 되잖아. 나는 투덜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0153687909 번호를 다 누르고 기다리는데 종무소식이다. 군대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하는 것처럼 삐삐는 번호가 좋아야 한댔다. 요즘 나오는 번호는 국이 네자리이면서 잘 터지고 오접속이 없다고 하는데 내 삐삐는 열번 걸면 한두번은 연결이 안 되고 엉뚱한 사람이 삐삐를 치곤하여 여차하면 다른 삐삐로 바꿀 참이었다. 사람인지 기계인지 모르지만 예쁜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삐삐호출은 1번 음성녹음은 2번.... 잽싸게 3번을 누르고 0521을 눌렀다. 0521은 내 음력생일에서 하나를 뺀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비밀번호를 주민등록번호나 아파트 호수 등으로 만든다. 누군가 조금만 노력하면 그런 번호는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두 번 꼬아서 음력생일을 고르고 거기에서 하나 더 뺀 것이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두 번 꼬았으니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게 뭐야. 웬 꾀꼬리 같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윤희야 나 인아인데 할 얘기 있으니까 빨리 삐삐치든지 전화해, 알았지?"
나는 화들짝 잠이 깼다. 목소리가 기막히게 차분하고 정감이 어리면서 허스키한 맛도 있었다. 알았지? 하고 끝을 올리는 곳에선 애간장을 녹일 만했다. 연거푸 대여섯 번을 들었다. 목소리 고운 것도 큰 재산이다. 나도 목소리라면 어디가서 기죽지 않는다. 맨 밑 옥타브까지 깔면 여성들은 성우 누구 같다며 감탄했다. 군대 있을 때 전화교환병이었다. 덕분에 두 세번 들은 목소리는 귀신같이 기억을 한다. 내 목소리가 좋다며 동생 삼자고 심심하면 통화 아닌 통화를 하던 중대장님 사모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면서 또 잠이 들었다.
드르르륵 소리에 잠을 깨보니 점심때가 되었다. 노총각은 일요일도 낮잠이나 잘 뿐 갈 곳이 없었다. 삐삐를 보니 웬 모르는 전화번호가 찍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번호였다. 또 잘못 걸려온 삐삐임이 틀림없었다. 귀찮아 삐삐를 팽개치려다 문득 장난기가 돌았다. 전화를 걸었다. 여자가 받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누구지? 내가 아무 소리 않자 그 여자는 재차 물었다.
"여보세요. 누굴 찾으시죠?"
알았다. 끄트머리 올리는 억양에서 그녀가 누군지 퍼뜩 생각이 났다. 아까 음성을 남긴 여자였다. 나는 놀라서 무심코 전화를 끊었다. 담배 한 개비를 태우며 나는 작전을 짜내고 있었다. 삐삐 음성을 다시 확인하니 그 여자가 확실했다. 그녀 이름은 인아. 친구는 윤희이고 윤희 삐삐 번호가 내 번호와 비슷했기 때문에 착각을 했거나 잘못 누른 것이었다. 음성을 남겨도 답이 없자 자기집 전화번호를 친 것이었다.
"여보세요 인아씨? 오랜만이에요."
나는 제일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옥타브로 한껏 모양을 내 접근을 했다. 누구세요?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호기심에 찬 목소리였다. 저 윤희 오빠에요. 윤희에게 오빠가 있을 확률은 30%도 안 되었지만 틀리면 또 어떠랴 싶었다.
"윤희가 외가집에 심부름을 가면서 삐삐를 두고 갔군요. 심부름 가면서 인아씨 만나야 한다고 투덜댔거든요. 음성은 비밀번호를 몰라서 답을 못했고 전화번호는 분명 인아씨일거라 생각했죠. 인아씨 맞죠?"
일부러 그녀와 같은 억양으로 끝을 애교스럽게 올려가며 물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었다. 잘못 걸었어요나 아무 말 않고 매몰차게 끊지 않는 것만도 절반은 성공한 것이었다. 나는 한 수 더 꼬아서 그녀가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를 만들었다.
"인아씨, 윤희가 전해 줄 것이 있다면서 나보고 전해주라고 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꿩 대신 수염 달린 닭이라도 만나지 않으시렵니까?"
교보문고 뒤 시인의 뜰이라는 커피숍에서 만나자 했다. 어떻게 알아보느냐는 물음에 내가 근사한 지팡이를 짚고 나갈 테니 얼굴을 보고 못생겼으면 모르는 척하라고 했고 그 대답에 그녀는 한 이 삼분은 허리가 끊어져라 웃었다. 그날 커피숍에서 두 시간, 술집에 가서 세시간 도합 다섯 시간을 함께 싸돌아 다니며 둘은 짝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 애인이 되기로 약속을 했다. 물론 윤희에게는 오빠도 없었고 처음부터 잘못 걸린 삐삐를 무기로 여자를 꼬시려고 내가 엉너리를 떤다는 것을 인아는 벌써 알고 있었고 그러면서 내 대담성과 점잖은 말투 근사한 목소리에 누군지 한 번 보려고 나온 것이었다. 그 뒤로 우리 둘은 실과 바늘이었다. 컴퓨터와 마우스였고 지포 라이터와 기름이었다.
애인각서를 써서 한 장씩 갖고 다니는 애인은 우리뿐이었을 것이다. 각서는 이랬다.
1. 상대를 완전 소유하지 않는다.
2. 상대를 가장 자유롭게 해 준다.
3. 떠나갈 때는 발목을 잡거나 울지 않는다.
4. 항상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애인이 된다.
물론 처음 세 항목은 내가 정한 것이었고 네 번째는 인아가 정한 것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부담없는 애인이 어디에 있담. 우리 둘은 십년쯤은 젊어져서 촐랑거리며 젊은 연인들 사이에서 뛰어 놀았다. 우리의 나이가 삼십을 바라본다는 것도 잊고. 그렇게 꿈 같던 시절이 세달쯤 지날 때부터 사건이 생겼다.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삐삐 오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러자 불같이 뜨겁던 인아의 키스도 식은 것 같았다. 그럴듯하지만 어딘가 요상한 느낌이 드는 핑계로 바쁘다고만 했다. 그러나 그때쯤 나는 심각한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인아를 정말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백퍼센트 소유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각서를 항상 염두에 두고 가장 자유로운 연인이 되려고 노력을 할 때에는 몰랐는데 인아를 완전 소유하려 하자 인아의 사생활을 알고 싶었다.
나는 중대결심을 했다. 인아 삐삐의 비밀번호를 알면 인아를 완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쳤다. 인아의 주민등록번호 앞 뒤 네자리 아파트 동호수 다이얼의 수자판에서의 조합.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넣어도 비밀번호를 알 수가 없었다. 열흘쯤 고생을 했다. 한 번 통화에 3번 비밀번호를 입력해 볼 수 있으니까 도합 사 오백 통화는 했을 것이다. 문득 새 번호가 생각이 났다. 인아는 늘 내 품 속에서 난 네 일부분이야 하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내 주위의 번호에서 비밀번호를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또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내 삐삐번호 7909에서 두 사람을 뜻하는 둘을 뺀 7907이 인아의 비밀번호임을 알아냈다. 컴퓨터해커가 된 기분이었다. 역시 나는 머리가 좋고 끈기가 있었다.
기가 찰 일이었다. 그녀의 삐삐에는 온갖 잡놈들의 온갖 더러운 속삭임이 있었다. 나와 만나고 정을 통하고 돌아간 날도 다른 놈을 만나서 키득거렸고 어떤 날은 네놈이나 만났다. 피가 거꾸로 솟았고 온갖 상상을 다했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고 싶어 일일이 전화를 해서 그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었다. 나 말고 만나는 놈들이 열 세 명이었고 적어도 그 중 네놈은 나 정도로 깊이 사귀는 것 같았다. 나는 인아 삐삐의 음성녹음을 카세트 녹음기를 이용해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출판사에서도 집에서도 하루종일 인아 삐삐를 도청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차츰 일도 팽개치고 밥도 걸러가며 인아의 사생활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만 만나라고 담판을 지어야겠다. 인아에게 만나자고 했다. 시간이 없단다. 그 순간 나는 이성을 잃었다. 인아의 삐삐에 인아가 만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주욱 읽어댔다. 인아가 듣고 기절초풍하겠지. 다음날 인아가 만나자고 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야 인아를 꼼짝 못하게 해겠구나.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인아는 다음말을 내뱉고 내 따귀를 한 대 갈기고 돌아섰다.
그게 무얼 말하는지 나는 잘 알았다. 그 사건 뒤로 나는 누구의 비밀도 캐려고 하지 않고 애인의 비밀번호를 알려는 사람을 보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있다. 비밀은 비밀로 좋은 것이다.
“준태씨 나는 당신이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라도 건강한 마음이 좋아서 사랑했어요. 이제 보니 당신은 마음이 병든 환자에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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