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연애관을 가진 남자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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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워크] 대개 사람들은 성향을 갖고 태어난다. 그 성향과 성장 배경, 과정, 경험을 토대로 삶의 질을 위해 많은 가치를 선택을 하고 맞아떨어지는 큰 틀과 무리를 골라 생활하기도 한다. 20대 중반인 나는 아직까지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연애/사랑 이라는 항목이기에 내가 느낀 성찰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ㅣ보수적인 연애관에 대한 의견 성별을 떠나서 이상형이나 취향을 물어보면 이런 흔한 대답하는 사람 많다. “자상한, 좋은, 착한.” 거기서 더 자세하게 설명해도 “편안한, 잘 통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이 사람들은 분명 확고한 취향이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언어 표현력이 부족한 걸까? 아니다. 이 중에 분명 취향이 저런 단어 몇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사람들은 ‘보수적인 연애’의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이다. 지레 겁을 먹고 쉽게 그 틀을 깨지 못해서이다. 올바르다며 사회가 주장하며 정립되어있는 관계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미디어가 그들의 연애관이나 사고방식을 일반화에 목을 매도록 옥죈 것이다. 아버지, 혹은 더 아버지의 세대에 인기 있던 드라마부터 2000년 초의 드라마까지 놓고 보아도, 조금 먼 과거 드라마의 클리셰를 보면 따듯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두툼한 월급봉투를 쥐여주고, 남자 혼자서 어떠한 큰 결정을 혼자서 하더라도 존중하고 지지하며 밥만 차리는 어머니. 또는 조금 미래로 와도 자극적이지만 올곧고 차별과 불의에 맞서는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들과 대립하다 어느새 손도 못 쓰고 의지하며 끌려다니는 형국을 보여준다. 극에 갈등이 생겨도 남자가 모두 인내하고 받아들이며 수용하는 것으로 끝나기 일쑤다. 이렇듯 일례인 드라마도 남자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대쪽같고, 여자는 그에 반해 안락함이라는 미끼로 의문과 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도 못하고 멀어지는 인식을 심어준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할.저씨 들은 모두 중견 탤런트 같지 않고, 청.장년들은 꽃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배우들과 다르며 그만한 돈도 없고, 갈등도 관계를 난도질하면서도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태산처럼 많고 무겁다. 그럼에도 미디어에서 보이는 것이 진실이고, 이룰 수 있는 꿈이라고 극단적인 인식이 사고방식에 박혀버린다. 보수적인 연애를 찾는 여성은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보호받는 연애를, 남자는 진중하고 속 깊고 압도하는 연애를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뜻대로 안되고 갈등이 생기면 그 보수적인 연애가 주는 강박이 당사자를 압박한다. 그 연애 방식이 모두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생각이 서로 맞지 않는 인연에게도 적용되는 사례가 더러 생기는 것이 문제다. 주체가 되고 싶은 여성이 보수적인 남성을 만나서 자신만을 품어주는 자상함이 그녀에겐 강압적인 태도로서 이골이 나고, 여성의 진취적인 솔직한 존중이 보수적인 그에게 우러러보지 않는 비정상이라고 느끼며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자격지심이 생기는 경우 등. 보수적인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이 만나 자신들만의 평안을 얻는다면 해도 된다. 다만 자신에게 탐탁지 않고, 표현을 해소할 수 없는 답답함이 연애에 있다면 당장 보수적인 연애를 그만 둘 것을 권한다. ㅣ진취적인 연애관에 대한 고찰 서바이벌 예능이 있었다. 각기 다른 캐릭터를 가진 머리 좋은 사람들이 장난감 화폐를 모으기 위해 두뇌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그중에 무척 반사회적이고 고집스럽고 유난한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협력에서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플레이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일각에선 반응도 좋고 팬도 많았다. 대략 팬 중에 2할 정도가 그의 팬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 저런 잡놈을 좋아한다니.’ 충격이었다. 그저 광대처럼 극의 묘미인 갈등을 주는 존재로서 그 축을 담당하는 이에 대한 열광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 종잡을 수 없고 광대처럼 날뛰는 모습 속에는 솔직함이 있었다. 광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그런 광기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은 순수함이었다. 순수함과 솔직함은 편안하다. 예상 밖에 벗어나더라도 그건 그의 그런 순수한 모습이 불러들인 과실이다. 반면 진지한 남자의 진실은 단어조차도 무겁다. 책임과 의무를 동봉해서 받고 주어야 할 것 같고, 바위를 업은 듯 금방이라도 쓰러질까 위태위태하기도 하다. 해서 진취적인 사람들은 그런 편안함을 추구한다. 남녀 관계에서 줄다리기로 얼마나 더 상대의 의존을 더 끌어오는가, 자신이 어떻게 더 빛나고 잘난 존재로 비추고 싶은 욕망을 숨겨야 하는가. 신여성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어색한 시대다. 그만큼 동등한 입장이 당연시 되어야 하고 당연한 때가 되었다. 성적으로는 강압과 마찰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정서적인 교류를 할 때마저 강압이 담긴 남자의 앞서 말한 부담스럽고 보수적인 진심, 상대가 자신의 자존감만을 채우기 위한 존중 없는 배려를 원하는 여성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복잡함과 미묘함, 부조리함에서 순수하고, 솔직하고, 충동적인 사람들은 벗어나게 해준다. 방어기제 가득한 사회에서 순수한 모습으로 자신의 허물을 벗겨주며,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열정을 솔직하게 일렁이며, 본능에 충실히 원하는 것을 단번에 선택하고 쫓아 쥐어내는 충동적인 모습까지. 사회에서 정해놓은 윤리나 도덕에서 벗어난 과감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 흔히 말하는 “잡놈, 난년이 연애를 잘한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이를 바로 행하는 태도의 진취적인 모습이 큰 매력이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점은 있다. 한 발라드 가수가 tv 프로그램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 것 나는 네 것, 이런 것이 연애의 묘미다.” “내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은 이 남자를 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등의 말을 했다. 아마 진취적인 연애를 꿈꾸거나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순수를 모독하고 편안함을 해하는 무척 불편한 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에서 관계가 성립된다면 어느 정도의 도의적인 헌신은 요구되기 마련이기도 하다. 나는 그렇다. 타인이 나에 대해서 알겠다는 것보다 모르겠다는 말이 나를 더 심오하고 깊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줘서 으쓱해지고,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무조건 옹호하고 품고 싶은 사람이다. 반면 그 무겁고 진중하고 모르겠다는 말은, 관계와 자리마저 억제하는 불편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고, 주관 없이 옹호하고 품으며 의지가 되어주고 싶다는 말은 일단 상대를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해 주겠다."라는 생각부터가 기만하는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엔 중용이 중요하다. 모두 매력 있는 자신을 억제하지 않으며, 뛰어놀 수 있는 구속감 없는 울타리를 짓고 사랑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글쓴이ㅣ무하크 원문보기▶ https://goo.gl/HFSkQ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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