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본 어떤 사진에 두 눈이 모니터 속으로 온전히 빨려 들어갔다. 아메리칸 어패럴의 바디슈트 셔츠(Body Suit Shirt)였다. 소매와 깃, 앞섶은 새하얗고 빳빳한 여느 셔츠와 같았다. 골반 언저리를 감쌀 즈음부터 그런 거친 면은 닿을 수 없다는 듯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었다. 따뜻하게 쓸어내리듯 아래로 가면 작은 리본과 레이스 장식이 달렸다. 앙증맞고도 야무지게.
정신없는 사무실의 셔츠 차림에도 자신에 대한 사랑만큼은 잊지 말고 간직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갑작스러운 어느 순간에, 숨이 가쁜 상대방은 생각지도 못할 밋밋한 속옷에 신경쓰지 말고 온몸을 마음 가는 대로 내맡기라는 뜻일까. 불편해 보이면서도 사려 깊었고, 단정하면서도 퇴폐적이었다. 공적이지만 은밀하다고 해야 할까.
얼핏 성숙한 여인들만 입을 것 같지만, 언뜻 뒷모습에서 아기들의 일체형 옷이 떠올라 보호심리를 자극한다. 바디슈트라는 이름부터 생소하다. 어떻게 입는 걸까. 언제 입는 옷일까. 팔을 들 때 난처하지는 않을까. 그때마다 저 옷을 입은 여자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덤덤할까. 누군가는 대중교통의 손잡이를 잡으며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미소로 애써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을까. 안에 속옷을 입어야 하나? 촉감은 어떨까. 원래 가터벨트처럼 단정한 옷차림을 위해 만든 옷이 아닐까. 내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이 셔츠 바디슈트야."라고 말하면 어떨까. 아무렇지 않은 척 "아 그래?"라고 대답하면서도 끌리듯 저 셔츠 밑단의 굴곡진 끝을 상상하지 않을까.
모니터 앞에서 욕망보다 왠지 모를 설렘에 가슴이 얼핏 저리다. 소년이어야 할지 성숙한 남성이어야 할지, 보호받아야 할지 보호해야 할지, 마조히스트여야 할지 사디스트여야 할지 헷갈린다. 바디슈트를 입은 평면 속의 여인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싶은 이 안달 난 호기심은, 어릴 적 성숙한 누나들을 올려다보던 동경인지, 처음으로 여자 친구의 손목을 묶었던 날 빨개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던 그녀를 계속 내려다보던 일탈 섞인 애정인지 알 수 없다. 문득 그 짜릿한 혼란 속에서 또렷이 기억나는 건, 그녀들의 뺨에 살짝 엉긴 옆머리다. 그건 분명, 욕망보다는 설렘이었다. 떨리는 손길은 아무렇게나 뻗어지지 않았다. 그 부드러운 뺨을 긁지는 않을까, 손끝은 천천히 닿을 듯 스러져 내려갔다. 그렇게 설렘 속에서 탐미는 파괴를 넘지 못했다.
단정함과 은밀함을 넘나든다. 그걸 보는 내 안에서는 욕망과 설렘이 뒤섞인다. 그 긴장만으로도 바디슈트 셔츠는 여느 미술작품처럼 한참을 바라볼 가치가 있다. 문득 바디슈트 셔츠에 대한 한 가지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 모든 옷에는 고유한 가치가 있어서 원피스 수영복과 닮았다는 이유로 내 멋대로 젖게 할 권리는 없다.
+ D`Angelo 의 ‘Feel like makin` love’를 들으며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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