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피기 좋은 날> 중
남자B와 여자K는 서로 알게 된 계기를 기억하지 못했다. 술을 마시면 이성의 마비와 기억의 상실이 대부분인 B. 여자를 안고 싶어 하는 남자로선 그닥 낯선 일도 아니었지만, 남자를 만나는 일에 있어 하물며 남자와 침대에 눕는 순간까지도 정숙하길 바라는 K였다. k의 평소의 행동으로 봐선 만남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번호를 저장해 둔 것은 굉장히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작은 K였다.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낯선 남자의 번호.
이름과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저장된 번호를 삭제하던 평소와 다르게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아무리 애써도 기억하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자 K는 B에게 전화를 걸어 "누구시죠?" 라는 상대가 들었을 때 어이없는 질문을 던지고 만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연애 비슷한 만남으로 4년 정도 이어졌다. 각자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을 때에도 그들은 함께 만나 술을 마셨고, 마음이 동한 날에는 아침까지 함께 있기도 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정력가였다. 항상 정숙하길 바라는 그녀지만, 누구 못지않게 섹스를 사랑하는 여자이기도 한 K는 그와의 섹스는 항상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원하는 어떤 체위도 가능했으며, 몇 시간이고 원하는 만큼 솔직하게 좋아하는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상대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단코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술자리 친구? 침대 파트너? 두 사람 중 누구도 그 관계에 대해서 정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쿨하고 편한 관계를 유지하던 K는 날벼락 같은 전화를 받는다.
전화의 발신인은 B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대단히 화가 나있었고, K를 창녀취급하며, 유부남을 꼬셔낸 발칙한 년을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K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B의 회사, B가 사는 동네, 심지어 B의 여동생이 언제 결혼했는지까지 알고 있었으면서 정작 B가 유부남이었다는 중요하고 엄청난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자그만치 4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애인이라는 간판은 없었어도 애인 못지않은 훌륭한 인간관계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가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하긴 B는 자신이 총각이라고 속인적은 없었다. 그저 결혼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후에 들은 이야기는 K와 만나는 도중, B는 결혼을 했고 사생활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했다. K는 표정 없이, 가책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내뱉는 B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갈겨주고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을 남기고 그와의 길고 애매했던 관계를 정리했다.
돌아 나오며 K는 자신의 무관심이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는 생각에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쾌락에 치우쳐 도덕적으로 살고 싶던 K의 인생을 지극히 부도덕한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운 좋게도 B의 부인은 간통죄를 묻진 않았지만, 엄연히 범죄였다. K는 범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침대 속에서 아무리 테크닉이 뛰어나, 다시 자고 싶은 남자일지언정 그에게 부인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이건 도덕과 비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그건 범죄다. 가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유부남이라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여자들을 본다.
그들의 위대한 사랑은 부인이라는 방해물 덕분에 더욱 소중하고 애틋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여자들에게 꼭 이야기 해주고 싶다.
“당신이 결혼했을 때, 꼭 당신 같은 여자가 당신의 남편 애인이 되길 고대합니다.” 라고.
바람은 언젠가는 멈추기 마련이다. 집에 토끼 같은 자식과 어여쁜 마누라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남자들은 결단코 이혼은 생각지도 않는다. 하룻밤 젊은 여자와 자고 싶다는 욕망, 자식 낳고 삶에 찌들어 자신이 아닌 아이들부터 챙기는 부인이 아닌 오롯하게 자신만 좋아해주는 새파란 여자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 그 철없는 생각은 현실과 싸워 이기는 법이 없다. 항상 그들은 현실에 지고 가정으로 돌아간다. 간혹 현실과의 싸움에서 이겨 그 남자를 쟁취했다고 해도, 남의 남자 뺏은 여자, 가정파탄자라는 주홍글씨는 벗어나기 힘든 굴레가 될 것이다. 또 그런 남자들은 한 번 했는데 두 번이 어려 울 리도 없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으로 잠시 잠깐 들렸다가는 휴게소 같은 휴식의 감정을 사랑으로 미화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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