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와 나는 연인이 아니었다. 한번도 파트너라는 말이 언급된 적은 없었지만 그는 한번도 내 손을 잡은 적이 없었고, 우리는 키스보다 섹스를 한 횟수가 더 많았다. B는 괜찮은 파트너였다. 갈색 뿔테안경과 그 너머 시니컬하고 지적인 눈매는 내 안의 소녀적 감성을 깨웠고, 균형 잡힌 몸매와 매끄러운 연갈색 피부는 보고 있으면 만지고 싶었고 만지고 있으면 입을 대고 싶었다.
나는 B를 만나고 나서야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들을 이해하게 됐다. B는 상대방의 인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애로 가득한 남자였다. 문제는 그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는 점이다. 그런 B의 양면성은 많은 여자들을 설레게 했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좋다 싫다 말하지 않는 그가, 만나지 못하게 되어 아쉽다고 얘기해 주는 것이 얼마나 설렜는지. 단순히 예의를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 뻔했던 ‘허리선이 예쁘다’, ‘가슴이 예쁘다’, ‘조그만 입술이 생각난다’와 같은 말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솔직히 나는 그를 정신 없이 좋아했다. 그 괴로운 감정이 외로움 때문에 타인을 만났던 것에 대한 벌처럼 느껴질 만큼 말이다. 그가 내 감정을 알았을까? 알았을 것이다. 나 이전의 수많은 여자들이 그랬을 테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 관계가 대책 없는 짝사랑보다 좋았다. B를 만나기 위해 우연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고, 그를 몰래 쳐다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편했다. 나는 그의 따뜻한 손길이 마치 진정인 양 몸을 나눴다. 그리고 결국 사랑에 대한 갈망의 정점이 섹스라면, 나는 가장 좋은 것만 얻은 것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혹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가 나를 파트너 이상으로 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헛된지 안다는 것, 그래서 항상 쿨한 척 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 서글펐다.
우리는 연인보다는 친구처럼 필터 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가 썼던 기괴한 소설, 발랑 까진 후배와의 첫 섹스, 그리고 다른 여자와 있었던 섹슈얼한 모험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 그리고 그의 판타지도. 그의 판타지는 흥미롭게도 상대방의 그 부분을 왁싱하는 것이었다. 판타지는 실현시키는 순간 별 것 아닌 추억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B 였으니까.
평소의 B는 여유가 넘쳤고, 나는 그 앞에서 계속 얼굴이 빨개졌었다. B는 그런 나를 벗기고 내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못할 만큼 애무하고, 흥분한 나를 짓궂게 놀려서 다시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 하지만 왁싱하기로 한 날은 B가 처음으로 느긋함을 잃었다. 그는 빨리 따뜻한 곳(?)으로 가서, 왁싱을 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런 그가 신기하고 귀여워서 일부러 느리게 걸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텔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태어나서 가장 오래도록 누군가의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어야 했다. 그는 그곳을 따뜻한 물로 적시고 가위와 눈썹 칼(누나 화장대에서 집어왔다고 씩 웃었다)로 짧게 깎은 후, 쉐이빙폼을 바르고 면도기로 부드럽게 밀었다. 총 세 시간쯤 걸렸는데, 한 자세로 있으려니 온 몸이 뻐근했고 날카로운 도구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도 피곤했을 텐데, 무척 부드럽고 다정했다. 아프다고 하면 멈추고 내 몸을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줬고, 더 조심했다. 끝나고 나서는 따갑고 화끈거리는 피부를 준비해온 보습제로 진정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섹스를 했다.
느낌은? 세 시간 동안의 긴장감으로 날 선 감각과 그 지겨운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그 부분에서 느껴지는 매끈하고 축축한 감촉 덕분에 쾌감이 폭죽처럼 온 몸을 훑어 내렸다. 한 마디로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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