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랜드]
나와 섹스를 한 여자들 중 오르가즘을 제대로 느낀 사람은 단 한명 뿐이다. 가장 최근까지 만나다 헤어진 여자친구 A가 그 주인공이다. 속궁합이 좋았기 때문인지 그녀와는 연애 초반, 하룻밤 사이 섹스를 연달아 3번까지도 했다. A는 섹스가 끝난 후 "못 일어나겠어"라면서 부들부들 떨며 한 동안 침대에 누워있기도 했다. 난 그 모습이 신기했고, A의 그런 모습에 자신감을 얻어 다양한 성적 시도도 해볼 수 있었다.
그 외에 내가 만났던 여성에게선 이런 반응을 보지 못했다. '얘가 오르가즘을 느꼈구나'라고 생각할 만한 경우는 있었지만, A처럼 명확하게 오르가즘을 느꼈다고 볼만한 적은 많지 않았다는 의미다. 섹스를 할 때 여자친구의 귀에 대고 "창녀처럼 해도 돼"라며 좀 더 솔직한 육체적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해 봐도 오르가즘을 느낀 것으로 보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A와 헤어진 이후 가장 최근 나와 섹스를 했던 한 친구도 살면서 한 번도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나와의 섹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오빠랑 하는 게 좋은데?"라며 둘러댈 뿐이었다.
이렇게 내가 만난 여성 중 1명만 오르가즘을 경험했다는 것은 비율로 따져보면 상당히 낮은 것이다. 30대 미혼 남성인 내 나이가 적지 않은 만큼 꽤 많은 여자들과 사귀었고, 한국 남자 평균 수준보다는 조금 더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된다는 점에서다.
나를 거쳐 간 여자들이 왜 대부분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했을까. 여러 생각을 해봤다. '내 스킬이 부족한가?', '성적 매력이 떨어지나?' 등 남자로서 약간의 죄책감이 들거나, 내 능력에 대한 자괴감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해답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연히 내가 그녀들의 오르가즘을 이끌어내지 못한 능력 부족 탓도 있겠지만, 그녀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점 등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성감대가 독특한 지점이라 내가 찾아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여자로서 성 생활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첫 섹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오르가즘과 연결되는 신경계 일부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섹스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난 그녀들로부터 한 가지 공통적인 부분을 뽑아냈다. 대체로 서서히 자신의 성적 적극성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초반엔 소극적으로 섹스를 하다가, 나중엔 조금이나마 섹스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얘기다. 물론 A처럼 오르가즘을 느끼고, 그걸 내게 표현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들은 왜 조금씩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줬을까. 단순히 '처음에는 부끄러웠을 거고, 나중에는 친해져서 적극적으로 바뀐 것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너무 1차원적인 접근이다.
개인적인 경험 측면에서 볼 때, 난 그녀들에게 사회적으로 강요돼 온 '소극적 성욕'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나와 관계를 맺은 여성들은 대부분 80년대생이었고,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여성이 가장 어렸다. 대부분 초기 밀레니얼 세대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 기준으로 밀레니얼 세대는 1980~2000년 초반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고 초기 밀레니얼 세대는 과거 보수적 틀에 갇힌 교육과 남성 중심의 마초적 문화를 거의 마지막으로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거창한 학술 논문이나 연구 결과를 들이대지 않아도 한국 땅에서 계속 살아 온 이 세대는 안다. 그 시절 어머니들은 딸들에게 '여자는 이래야 돼'라고 교육했고, 여자들은 '처음부터 잘 하면 쉬워보인다'와 같은 생각을 친구들과 공유했다. 일부 남자들은 여자가 섹스에 적극적이면 '너 왜 이렇게 잘해?'라며 알 수 없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사족을 덧붙이자면, '미투' 열풍 이후의 최근 사회 분위기와 달리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태우는 여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에는 남녀가 뒤섞인 술자리에서도 남자들끼리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일이 흔했는데, 여자들은 어떤 얘기를 하는지 다 알면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식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변수는 많지만, 이런 마초적 분위기의 사회 속에서 살며 만들어진 '강요된 조신함'이 그녀들을 '오르가즘 모르는 여자'로 만든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물론 2000년대생이 20살이 넘은 지금의 20대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다.
성 평등이라는 가치를 궁극적 목표로 하는 미투 운동이 최근엔 조금 비뚤어진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이 운동의 파급력과 성 평등을 외치는 목소리는 여전히 강력하다. 진정한 성 평등을 이루려면 여성들에게 사회적으로 강요돼 온 '소극적 성욕'도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여성에게 조신함을 강요하고 섹스를 불경시하는 분위기, 남성들이 섹스에 적극적인 여성들에게 보내는 불편한 눈빛, 남자친구 앞에서도 오르가즘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여성들의 심리까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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