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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뉴욕의 가을 - 당신은 ‘선수’와 커피를 마셔 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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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뉴욕의 가을]
 
뉴욕에서 직장을 다니는 지인이 가을이니 뉴욕에나 한번 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뉴욕에서 오래 살았지만 뉴욕의 가을, 구체적으로 센트럴 파크의 가을은 아무리 봐도 멋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이 땅에 칙릿(Chick-Lit: 젊은 여성을 뜻하는 구어 ‘chick’과 문학 ‘literature’이 결합된 신조어로 20, 30대 여성들을 주 독자로 한 대중소설)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뉴욕은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에게 요원한 바탕화면, 혹은 미니 홈피 배경화면이 되어 버렸다. 어쩐지 마포구 신수동의 가을이나 구파발의 가을보다는 맨하탄의 가을이나 센트럴 파크의 가을이 멋지게 들리는 건 이국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혹은 열등감 때문인지. 어쨌든, 뉴욕의 가을이라는 낭만 단어의 조합을 접한 직후, 나는 문득 이 영화 ‘뉴욕의 가을’이 생각났다. 

이 영화를 처음 봤던 이십대 후반, 그땐 뭐 이리도 재미없는 영화가 다 있나 싶어 보다가 반은 졸았던 기억이 난다. 20대 초반의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가 40대 후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었고, 공감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는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30대에 접어들고 보니 40대 남자들의 매력을 알 것 같다. 그건 그들의 나이 영역에 가까워진 탓도 있겠지만, 남자를 보는 눈 자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남자들은 꽤나 좋겠다 싶다. 여자들은 대부분 20대와 30대를 지나면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 중성적인 상태로 인식되는데 비해 남자들은 20대에서 40대까지, 아니 조금만 관리하면 50대까지 폭넓게 ‘남자’로 들이밀 수 있으니 말이다. 하긴 이러한 들이밀기의 차이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일 것이다. 유럽영화를 보면 로맨스의 주인공 자리를 40대 여자가 꿰차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엄마나 아내의 역할을 갖추지 않은 40대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기만 할 뿐, 로맨스의 주인공 자리는 결코 주지 않는다. 줘봤자 불륜 역할 뿐, 밝고 맑은 연애는 택도 없다.

텔레비전에 노처녀로 등장하는 나잇대는 대부분 20대 후반이다. 20대 후반의 여성들에게, 당장 내일 결혼 못 하면 완전 쭈구렁 할매가 될 거라는 압박을 해 대니, 30대와 40대의 여성들이 어디 명함이라도 내밀겠는가? 사회가 주입시키는 노화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노화보다 훨씬 더 빠른 셈이다. 
 
 
윌 케인(리차드 기어)은 뉴욕에서 가장 잘 나가는 레스토랑의 사장이자 뉴욕에서 가장 인기 많은 독신남이다. 수많은 여자들과 짧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나이 마흔 여덞이 되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샬롯 필딩(위노나 라이더)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샬롯의 나이는 스물한 살- ‘내가 첫 사랑에 실패하지만 않았어도...’를 굳이 늘어놓지 않아도 될 정도로 어린 나이일 뿐 더러, 알고 보니 샬롯의 엄마는 한때 윌을 열렬히 짝사랑하기도 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들이 아무런 편견 없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겠지만 뉴욕이라 그런지 아니면 영화라서 그런지 그들은 전혀 거리낄 것 없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처음에는 바람둥이 길들이기 버전으로 전개되던 영화는 갑자기 숨겨진 샬롯의 병이 알려지면서 짝퉁 러브 스토리로 바뀐다. 샬롯이 심장에 자라는 종양 때문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윌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중년 남자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붓는다. 
 

영화 [뉴욕의 가을]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의 ‘러브 스토리’ 짝퉁 버전 이야기 보다는 마흔 여덟 살의 아저씨인 ‘윌’의 선수 적인 행동에 관한 것이다. 그는 젊어 한 때 양다리를 걸친 여자와의 사이에서 딸까지 하나 낳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이나 한 여자에게 전속 계약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 고독한 작업남의 세계에 꿋꿋이 남은 사람이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는 그를 향해 “네겐 진실이 없어. 구제불능이야. 외롭게 늙어 죽을 거야.”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날리지만, 윌은 애인은 짧게 만날수록 좋고,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는 것이 아니라는 연애 원칙을 고수해 나간다. 재밌는 것은 대다수의 여자들이 그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만난다는 것이다. 그건 단순히 그가 최고의 레스토랑을 경영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스물 한 살의 여리디 여린 처녀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정도니 그 내공이 얼마나 눈부시겠는가? 

자, 그럼 여기서 윌을 통해 ‘선수의 조건’을 한번 짚어보기로 하자. 


영화 [뉴욕의 가을]

첫째, 선수가 되기 위해선 집요한 노력이 필요하다

윌은 레스토랑에서 샬롯에게 반한 다음 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모자를 주문한다. 그녀가 모자 디자이너라는 사실은 전날 레스토랑에서 들었다. 아마 그녀가 모자 디자이너가 아니라 가방 디자이너라면 가방을 주문 했을 것이고, 혹 병아리 감별사라면 좋은 병아리가 들어왔다며 감별 좀 해 달라고 꼬셨을 것이다. 

그는 샬롯이 모자를 들고 나타나자 그 모자를 그녀에게 선물한 뒤, 파티에 데리고 간다. 놀라운 건 샬롯이 입을 드레스까지 이미 준비해 뒀다는 점이다. 

결혼에 골인한 A양이 지금의 남편에게 결정적으로 반하게 된 것은 처음으로 영화를 보러 간 날이었다. 일요일 오후, 갑자기 약속을 잡게 되면서 무슨 영화를 볼 지는 정하지 않고 일단 멀티플렉스 극장앞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그때까지는 연인 관계도 아니어서 상대가 이 영화를 봤는지, 혹은 저 영화는 아직 못 봤는지 그런 정보조차 전혀 파악이 안 된 상태였다. 매표소 앞에 서서 한 참을 상의한 끝에 영화 하나를 고른 다음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 남자가 A양의 팔을 잡더란다. 이미 집에서 모든 표를 예매해 왔다고.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 이후에 상영되는 영화 일곱 개를 전부 예매해 왔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매진이라는 아픔을 겪지 않고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안 보는 영화는 20분 전에만 해약하면 그만이라 손해 볼 일도 없다며 수줍게 웃는 남자에게 A양은 무한한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사실 여자들이 판단하는 건 데이트의 품질보다는 데이트에 임하는 남자의 자세다. 남자가 성의를 갖고 최선을 다한다면 비록 그 날의 데이트가 머피의 법칙처럼 끝난다 하더라도 집에 돌아와 이불속에서 살그머니 웃게 되는 것이다. 

그냥 길에 폼 잡고 서 있기만 하면 여자들이 차례로 품 안으로 쓰러져서 선수가 되는 건 결코 아니다. 겉으론 우아하게 있어도 물 밑에서 열나게 다리를 저어대는 백조처럼, 온 시내를 다 헤매 드레스를 고르고 집에서 열심히 클릭질 해 예매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선수권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물론 여자들에게도 해당된다. 내 친구 중에는 사귀는 남자가 좋아하는 야구팀의 선수 승률까지 줄줄 외우는 멋진 선수도 있다. 
 

영화 [뉴욕의 가을]

둘째, 특기가 있어야 한다

윌은 레스토랑 경영자답게 요리가 특기이다. 영화 속에서도 그 어떤 모습보다 그녀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가장 멋져 보였다. 특기라고는 게임방에서 죽치고 앉아 맞고 치는 것 밖에 없거나(타짜라면 제외), 온 종일 등이 아프도록 시체놀이 하기 밖에 없다면, 선수가 될 생각은 안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내가 본 선수들은 죄다 자신의 삶을 반짝거리게 하는 특기 하나씩은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특기는 굳이 누군가와 함께 가 아니라도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에게 우리는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 [뉴욕의 가을]

셋째, 꼬리를 내릴 때가 언젠지를 알아야 한다

윌은 샬롯을 만나면서 제 버릇 개 못 주고 한번 바람을 피운다. 친구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샬롯이 아래층에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애인과 옥상에서 놀아났던 것. 그 사실을 알게 된 샬롯은 그를 떠난다. 여기서 윌이 ‘그래, 이제 다음 여자를 물색해야지.’하고 샬롯을 포기 했더라면, 그는 바람둥이는 될 지언정 진정한 선수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여기서 바람둥이와 선수의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바람둥이의 본질이 ‘체인징 파트너’에 있다면, 선수의 본질은 ‘행복한 연애’아닐까나? 아님 말고!) 

그러나 그는 결국 샬롯에게 돌아가 용서를 빈다. 상처를 준 대상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흔치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키면 도망가고, 마주치면 꿩처럼 고개를 처박고 상대가 사라질 때 까지 숨어 있을 생각만 한다. 스스로에게 느끼는 수치심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마주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수가 되지 못하는가 보다. 

샬롯에게 죄를 고백하고 꼬리를 내린 윌은 결국 진정한 사랑을 얻었고, 샬롯의 표현에 의하자면 사랑으로 구원받았다.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을 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지금까지의 방식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만이, 흔히 오지 않는 ‘진짜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뉴욕의 가을]

한 낮엔 후텁지근하지만, 먼 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한걸 보니 가을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십년도 훨씬 전에, 아버지와 차를 타고 낙엽 떨어지는 가을 거리를 달린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사연 많은 여인처럼 한숨을 푹 쉬며, 
“아부지, 낙엽 떨어지는 거리를 코트 깃 휘날리며 걷고 싶어요.” 했더니, 
아부지 왈, “걸어라.”. 

그래서 냉큼 그랬다. “코트가 없어요.” 혹시 한 벌 사 주실까 싶어 해 본 말인데 아버지는 바로 맞받아 치셨다.

“세탁소 가면 빌려 줄거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올 가을엔 삼사십 대의 외로운 영혼들이 코트 깃 휘날리며 마포구 신수동과 구파발의 가을 거리를 채워줬으면 하는 것이다. 

등산조끼 차려 입고 단체팀에 끼어 내장산에서 동동주만 마시지 말고, 혹은 관광버스 안에서 술냄새 풍기며 아줌마 댄스만 추지 말고, 센트럴 파크의 리처드 기어처럼 멋진 연애 좀 해 줬으면 좋겠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코트는 세탁소에 가면 빌려 줄지도 모른다.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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