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Drive]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땐가 듣던 노래가 있다. 제목이 one night lover. 그 당시에는 뭔 뜻인지 몰랐지. 이제 어떤 뜻인지 잘 아는 내가 밉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는 나의 원나잇 러버 이야기다.
원나잇이라곤 해도, 클럽에서 몸을 덩실거리다가, 혹은 술집에서 알딸딸~하게 취해 있다가 합석을 하고, 눈이 맞아 하룻밤 섹스를 한 후 한 명이 깨기 전에 떠나는. 그런 원나잇 이야기가 아니다. 그게 아니면 뭐냐고? 나도 모른다.
아나운서 S(곧 씨리즈에 나온다)를 닮은 외모에, 180보다 190에 가까운 키. 슬림한 몸매. 성격까지 모든 게 좋다.
J와는 온라인에서 만났다. 게임이나 어플 등이 아니고, 동호회 같은 거다. 아무튼 거기서 만난 J는 한국에 살지 않는 사람이다. 처음엔 댓글로 놀다가 쪽지를 하고, 카톡으로 넘어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약 10개월간.
어느 날, J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고기 사진. 질세라 나도 고기 사진을 전송했더니 바로 여러가지 한국 음식 사진이 밀려들었다. 한국이냐고 물었더니 비밀이란다. J는 YES란 대답 대신 항상 비밀이라는 대답을 하는 사람이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ㅇㅇ동이란다. 오란다. 이미 조금 취해 보이는 목소리였기에 조금 찜찜해하며 시동을 걸고 ㅇㅇ동으로 향했다.
끔찍한 ㅇㅇ동의 주차비에 혀를 내두르며 J가 있는 술집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기에 기대를 엄청 했다. J는 기대에 110% 만족하는 상태로 나를 맞았다.
내가 기분 좋을 때 지인들에게 하는 배꼽인사로 그에게 첫인사를 했다. 근데 J는 좀 취해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J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J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살짝 스친 음흉(?)한 표정들까지. 마지막으로 J와 가장 친하다는 친구 하나와 나, 그리고 J만 남았다. 그 친구가 악수를 청하며 부탁할게요-라며 사라졌다. 갑자기 둘만 남았다.
그 친구가 사라지자마자 J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깍지를 꼈다. 그리곤 긴 다리를 이용해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이 불편했다.
"아휴 좀 천천히 가요!!!!!!"
J가 우뚝 멈춰 서버렸다. 관성에 의해 그의 넓은 등판에 헤딩을 했다.
"어우 ㅆ..아 아니 미안해요 괜찮아요?"
"발 작다. 발 사이즈 뭐예요?"
"발이요? 내 발 사이즈? 음 미국 사이즈로 5.5? 6? 되려나?"
"사람 발이야 그게?"
이런 시부렁 밤탱이가 아까 술자리서부터 계속 딴지를 걸고 깐족댄다. 목구녕까지 차오르는 욕을 간신히 내리며 방긋 웃어줬다. J가 물었다.
"내 발 사이즈 뭐게요. 맞춰 봐요. 맞추면 뽀뽀해 줄게."
"10. 한국 사이즈로 280."
"틀렸어. 10.5야."
그러냐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더니 날 빤히 쳐다보더니 내 머리를 붙잡았다.
"왜..왜이래욧!!"
"맞추면 뽀뽀 해준댔지. 틀렸으니까 키스 할 거야."
여성 여러분. 키스할 때 주위 소리가 음소거가 되는 환상을 겪어보신 적 있는가? 나는 겪어 봤다. 번화가와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강남 한복판에서. 차가 많이 다니는 그 길가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오직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J의 차갑고 건조한 손이 내 볼을 감싸고 있는 느낌과 의미 없이 꿈뻑대는 내 눈 뿐이었다. 진한 소주 냄새가 배인 뜨거운 혀가 내 입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분명 거부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그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그간 대화로 이 사람을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게 되어서?
얼마나 지났을까. 내 얼굴을 잡던 J의 손은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갈 곳 잃은 내 손은 J가 사 준 탄산수 병만 꼭 쥐고 있을 뿐이었다. J가 입술을 떼곤 말했다. 같이 있자고. 지금에 와야 후회하는 거지만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호텔에 가서 체크인을 하는 순간, 카드키로 문을 여는 순간, 넓은 호텔방 현관에서까지. J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도망 안 간다고, 손에 땀이 나서 그런다고 잠깐만 놔 달라고 해도 J는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욕실에서 이를 닦는 순간에도. J가 침대에 걸터앉아 자기의 상의를 벗겨 달라는 순간에도. J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어르고 달래 겨우 손을 떼 놓고, 초여름에 흘린 땀을 씻어냈다. 젠장. 짝짝이구나. 하필 색깔마저 짝짝이라니. 이 사람과 호텔에 올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속옷에 신경을 안 썼지.. 젠장맞을. 타올로 된 가운을 걸치고는 살금살금 욕실을 나왔다.
J는 잠이 들어 있었다. 이제서야 J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 눈썹이 짙구나, 볼에 작은 점이 있구나, 턱선이 날카롭구나- 등등. 찬찬히 뜯어봤다. 그러고선 입술에 눈길이 갔다. 아까까지 내 입술에 붙어 있던 입술. 그 입술이 너무 섹시해서 나도 모르게 다가가버렸다. 잠에서 깼는지 J는 입술을 달싹여 내 입을 받았다. 그리곤 꽤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이번엔 내 손도 J의 얼굴, 어깨, 손. 모든 곳을 누볐다.
J와의 섹스는 말 그대로 황홀감이었다. 숨쉬기가 곤란할 만큼 나에게 완전 밀착한 상태로, 내 온 몸을 끌어안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귓가에는 보고 싶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너무 보고 싶었어-" 좋았다.
솔직히 기억은 안 난다. 그냥 좋았다는 것뿐.
이 사람의 스킬이 어떻다 저렇다는 전혀 생각나지 않고 그냥 좋았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J는 내 안에 사정했다.
섹스가 끝난 뒤. J는 내 손목을 잡고 잠들었다. 휴대폰을 열어 배란일을 확인했다. 어찌어찌 세이프. 안도감의 한숨을 쉬곤 J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창 밖의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져 오고 있었다.
J와의 섹스. 내 소정의 목적(한번 자고 싶은 남자)을 달성했다. 하지만, 내 옆에 있어 줄 사람은 아니다. 몇 달 뒤에 다시 떠날 사람이고,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장거리를 할 수 있을까? 부터- 하루 즐겼으면 됐어-라는 생각까지 전부 했다.
J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욕실로 가서 몸을 씻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곤 호텔에 있는 메모지에 한마디만 쓰고 나왔다. 아 이건 드라마에서 본 거다.
Maybe.
한참 멀리 세워둔 내 차로 와서 주차비를 지불하곤 집으로 왔다. 그리곤 잠을 청했다.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은 커녕 문자 하나 없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던 J와는 끝났다. 아니 시작도 한 건 아니니까 끝났다는 건 어폐가 있지만 그냥 다이렉트로 섹스로 갔으니 끝났다고 할 거다. 차곡차곡 쌓아왔던 감정이 하룻밤의 섹스로 끝이 났다. 일주일쯤 뒤에 연락이 오긴 왔다.
취해서 실수를 한 것 같다고 말이다. 혹시나 다른 마음 있었으면 미안하다고 했다.
내 친한 친구는 이 이야기를 듣더니 나보고 "차였다"고 했다. 근데 말야, "차였다"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에게 호의를 표시하고, 호의를 받은 사람은 그 호의에 거부감을 표시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지 않나? 나 안 차였다.
나를 잘 아는 내 친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야, 좀 차인 것 갖다 뭘 그래. 한두 번이냐?"
그래, 뭐 살다 보면 차일 수도 있고 찰 수도 있는 거지. 근데 이번에는 내가 오만방자했다. 이 사람도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을 거라 자만했던 거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나 차이지 않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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