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gone girl]
아무 말 없이 치킨집에 들어가서는 '반반무'를 시키고 생맥주를 주문했다. 마카로니 과자랑 생맥주가 먼저 나오고, 나는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피곤하고 나른한 몸에 정오부터 저녁 9시가 넘을 때까지 내 속은 비어있었으니 시원한 맥주가 식도를 따라 위장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생각 같아서는 원샷으로 다 마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갑자기 마셔 버리면 힘들 것 같아 반쯤 마신 뒤 잔을 내려 놓았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치킨 무를 싸가지 없어 보이는 알바생이 퉁명스럽게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는 휙 돌아 가버렸다. "치킨무에 고추가루 뿌려먹으면 맛있는데......" 그녀가 처음으로 말을 했다. 나는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래요?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라고 말하고는 벌떡 일어나 주방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고춧가루를 조금 얻고는 치킨무에 살살 뿌려서 먹어보았다. 오묘한 맛이었지만 그런대로 맛이 괜찮았다.
우리는 이런저런 동네 이야기 근처 맛 집 이야기, 가까운 곳에 공원이 있다는 이야기와 외국 여행 다녀온 이야기 등등 대화를 했다. 그녀는 말이 참 많았던 것 같았다. 맨 처음 경계를 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두 사람은 오래된 초등 동창생을 만난 것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한참 했다.
그녀의 나이는 33살이었고, 꽤나 이름 있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가녀린 몸에 자세히 보니 그리 좋은 피부는 아니지만, 밤에 본 모습이라 그런지 그런대로 봐 줄만은 했다. 또 그녀는 담배를 정말 많이 피웠는데, 아까 그 싸가지 없어 보이는 알바생이 재털이를 몇 번 갈아 주었다.
피곤함이 몰려들었었지만, 시원한 맥주와 달콤짭짜름한 치킨이 어울려져 나른하고 따듯한 기운이 온몸을 휘 감았다. 그녀는 홀짝홀짝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의외로 술을 잘 마셨다.
살면서 이런 적 처음이라는 둥...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아서 치한이라고 생각했다는 둥. 또 완전 바람둥이 아니냐는 둥.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실 때 마다 쉴새 없이 아주 약간 돌출된 입술로 계속 떠들어 댔다. 그녀 입술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녀에게 격정적으로 키스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변 소음은 점점 사그라 들고 조명마저도 서서히 어두워지며 연한 스포트라이트가 그녀만 비추는 것 같았다. 피곤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야릇하고 황홀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는 힘들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힘든 내색 하지 않으려 애쓰고, 여리디 여린 마음 이지만 겉으로는 강한 척 아무일 없는 척 하고, 또 실연의 아픔도 있지만 꼭꼭 숨겨둔 채 마음으로만 삭여가며, 이따금씩 떠나는 외국여행으로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려 하는 회색 도시 속의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내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그녀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침묵했다.
집에 혼자 두고 온 강아지가 걱정이 된 건지 헤어진 옛날 애인이 생각이 난 건지. 그윽하게 바라만 보는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양념에 후라이드가 대충 섞이고, 일회용 위생봉투가 싸여진 닭뼈와 휴지가 가득한 차가운 스테인레스통만 바라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나는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는데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타이밍상 나갈 타이밍이 되자 피곤이 몰려왔다. 전화번호를 교환했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기회를 봐서 또 보고 싶었지만, 문득 오늘이 아니면 안될 것만 같았다.
나는 "우리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실래요?" 라고 물었다.
그녀는 크게 놀라면서 "예????" 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도 지금 분위기가 좋다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피곤함이 함께한 불금의 늦은 저녁시간에 집에 혼자 돌아간들 그 허탈함이 더 심할 것이 불 보듯 뻔할 것을 알았기에, 나는 과감하게 물었다. '싫다고 하면 다음에 또 보면 되지 뭐.. 어차피 오늘 너무너무 피곤한 날이 아니던가...' 라며 속으로 애써 거절에 대한 합리화를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
"저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거든요?" 라며 그녀가 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하 하 하" 나는 크게 웃고는 와인병을 손으로 가리키며, 간단히 와인만 한잔 하자고 이야기 했다. 그녀는 "집에 강아지도 혼자 있고, 트레이닝복만 간단히 입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고 쑥스럽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네요. 그러고 보니 옷차림이 비슷하네요.." 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며. "그래도.....오늘....처음 봤는데 집은 좀............"라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 나서 "갑시다." 하고는 그녀의 물건들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내 봉투와 함께 들고 그녀의 팔을 끌어 당기며 일어났다.
치킨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가 사는 오피스텔이 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수줍어 하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뒷짐을 지고 짝 다리를 하고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등을 기댄 채 교무실에 불려가는 문제 학생 처럼 그녀의 하얀색 운동화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