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서브컬쳐] 로망포르노 제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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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일천구백칠십팔년 산이 많은 땅의 민족이 다 그렇듯, 운명론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초연하며 외세의 침략에 맞선 것이 그들 역사의 전부인 아프가니스탄. 그들의 현대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 잉태된 군부 쿠데타는 78년 4월의 일이었다.
78년, 지독히도 더웠던 이 해에 일본에서는 더위로 사망하는 사람이 속출했었고, 전국적으로 인플루엔자가 창궐해 300만의 감기 환자가 발생했던 미증유의 한해였다. 미 하원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한국 중앙정보부의 짓이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 역시 78년. 이 해 일본에서는 '미래소년 코난'이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미지와의 조우', '스타워즈', '애니 홀', '미스터 굳바를 찾아서'등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존 트래볼타가 눈부신 디스코 춤을 보여준 '새터데이 나잇(국내 개봉명 '토요일 밤의 열기')'도 이 해에 개봉되었다. ㅣ조감독 공모제도 또한, 78년은 무하마드 알리가 스핑크스에게 리턴매치로 타이틀을 되찾은 해이기도 하다. 70년대 초반의 로망포르노가 중년 남성을 타겟으로 하여 주연급의 여배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70년 후반의 니카츠는 또 한번의 변신을 꾀하고 있었고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도약으로 멋지게 발전한다. 70년대 초반의 로망포르노 전반에 흐르는 에로티시즘은, 여배우들의 카리스마를 자양분으로 발현된 것이라 그런지 여배우들의 성향과도 매우 밀접했었다. 날라리, 2류 문화, 룸펜, 불량소녀 등등. 그러나 70년대 후반기부터는 주연급 여배우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는 방식을 탈피한 작품이 출현하고. 니카츠와는 계약 관계에 있을 뿐인 프리랜서 감독과 배우들이 자주적인 제작 시스템을 통해 영화를 찍어내고 있었다. 이것을 용인하고 그들의 작품을 사서 자신들의 직영관에 건다는 것은 고고한 니카츠의 프라이드로서 그리 간단한 결정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은 니카츠의 조감독 공개 모집 제도였다. 이것은 이미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던 인재들을 '시험'이라는 행위를 통해 정규직으로 바꾸고자 시작 된 제도였지만 예상외로 많은 인재들이 전국에서 모였고, 그들이 니카츠의 새로운 감독들로서 니카츠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중요한 '젊은 피'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 계약직 사원들은 여전히 계약직으로 남길 원했고, 이들은 때로는 니카츠와 대립하면서 실험적인 작품을 겁 없이 찍어 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새 시대의 트렌드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얻은 첫 결정판이 78년의 4월 29일에 개봉하여 대 히트작이 된 '복숭아 엉덩이 아가씨(桃尻娘/Hip Up Girl)' 였다. 감독 오하라 히로유키(小原宏裕)감독도 그런 신세대 감독 중의 한사람이었다. 하시모토 오사무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복숭아 엉덩이 아가씨' 는 적당한 누드신과 적당한 섹스씬이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청춘물로써 히트했다. 또한 이 작품의 주인공 다케다 카호리는 단 한 작품으로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다. '복숭아 엉덩이 아가씨'의 스틸컷 ㅣ대학가 영화연구회 70년대 초, 일본 대학가의 학생 운동은 정점에 달했다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각 대학의 영화연구회도 이런 커다란 조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과거의 활동들이 이념적 선전 선동이 주 내용이었다면 학생 운동의 폭풍 후에는 좀더 다양한 세계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들, 대학가의 영화연구회 출신들은 니카츠뿐만 아니라 유수의 영화제작사와 프로덕션으로 진출하면서 '신세대 감독군'을 형성하여 일본영화사에 새로운 활력을 안겨다 준다. 과거의 로망포르노 선배 감독들이 '이것은 포르노다, 포르노답게 찍는다.' 라는 강박 관념 속에서의 창작을 해 나갔다면 신세대의 감독들은 그냥 담담하게 여배우의 나신과 섹스를 담아나갔다. 그것은 분명 섹스 자체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는 새로운 세대가 문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신호탄이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복숭아 엉덩이 아가씨' 는 흔해 빠진 '처녀성 상실물'이 아닌, 어둡고 우울했던 '시라케'의 시대에서 벗어나 밝고 가벼운 세계로의 전진이기도 했다. (시라케 : 본 기사 11회 참조) '복숭아 엉덩이 아가씨'는 대히트 뒤, 바로 시리즈가 탄생했다. '복숭아 엉덩이 아가씨/러브어텍', '복숭아 엉덩이 아가씨/프로포즈 작전'이 그것이다. '복숭아 엉덩이'는 경제 발전으로 일본 여성의 체형이 바뀌어 펑퍼짐하게 처진 일본 여성의 엉덩이가 올라가면서 생긴 유행어로 추축된다. 아무튼 78년을 계기로 로망포르노는, 이제까지의 메인 타겟이었던 중년남성에서 보다 젊은 층으로 확대어필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복숭아 엉덩이 아가씨/러브어텍'의 스틸컷 ㅣ신인 감독들 1978년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였다. 니카츠의 경쟁사였던 쇼치쿠(松竹)는 '오렌지로드 익스프레스'를 개봉해 대호평을 얻어내는데, 이 영화의 감독은 당시 26세에 불과하던 오오모리 카즈키(大森一樹) 감독이었다. 아직 동경의과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신분이었던 오오모리는 74년에 16mm로 찍은 독립영화 '어두워 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로 이미 젊은 영화인들 사이에는 호평이 나있던 상태였다. 오오모리가 쓴 '오렌지로드 익스프레스' 가 쇼치쿠가 주관하던 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자 쇼치쿠는 전례대로 자기들이 영화화 할 권리를 갖고자 했다. 하지만 오오모리가 자신이 감독을 하지 않으면 팔 수 없다고 우겨 결국,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78년에 PFF에 입상한 모리타 요시미츠(森田よしみつ) 감독, 이시이 소고(石井そうご) 감독도 70년대 대학 영화연구회 출신의 감독이다. 이시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8mm 카메라를 다루고 있었던 시네마 키드였다. 그가 대학시절에 찍은 학원 폭력물을 니카츠에서 리메이크 한 것이 '고교 대패닉'이다. 이시이는 이미, 전술한 오오모리, 모리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타였고, 나가사키 준이치(長崎俊一), 야마카와 나오토(山川直人), 데츠카 신, 이마세키 아키요시, 등과 함께 독립영화계에는 잘 알려진 존재였다. 대학가 영화연구회보다는 현장에서 일을 배운 '피와 뼈'의 최양일, '쉘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도플갱어', '도레미파 소녀, 피가 끓는다'의 쿠로사와 기요시 등이 그들과 같은 세대 감독들이다. '오리온의 살의/정사의 방정식'의 네기시 요시타로(根岸吉太?) 감독 역시 니카츠에 등장한 신세대 감독으로써 넘치지 않는 담담한 연출력으로 새로운 니카츠 로망 포르노를 이끌어 나간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신인 감독들이 등장한 1978년부터 80년까지가 니카츠의 로망포르노가 성숙을 맞이한 시기로써 충실한 작품을 만들어 낸 마지막 시기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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