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화장실에서 만난 뽀르노그라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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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는 화장실이라는 공간과 아트가 결합하는 방식에 대한 일반론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회에서는 개별 작품들을 보면서 그 특징을 알아보자.
1. 화장실 아트의 특징 그럼 어디까지를 화장실 아트라고 규정해야 할까? 화장실 아트에는 내가 여기서 다루려는 특정한 주제 외에 정치 현안에 대한 시덥잖은 촌평부터, 신상을 비관하는 내용의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노트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화장실 아트의 꽃은 항상 야설/야화이다. 그 만큼 화장실의 묘한 구조가 특정 주제를 둘러싼 창작에 적합하다는 얘기이다. 벗겨진 하의, 밀폐된 4면과, 텅 빈 벽면 즉 Tabula rasa(완전한 백지 상태)! 하물며 아랫도리에는 배설물을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즉 하나의 중요한 생리적 욕구가 실행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 생리 욕구는 근친한 욕구를 발현시키기 충분해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화장실 아트의 범주를 어디까지 그어야할 지에 대해 얘기했다. 화장실 벽면에 쏟아지는 '잠재된 관념의 배설물'은 소설 형식을 빌린 문학, 드로잉이 대부분인 회화, 그 둘이 결합된 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더러는 그림을 그려놓은 후, 흥분을 못 이겨, 어설프게 재현된 이미지 위에 자신의 이물질(체액)을 묻혀놓는 행위예술도 마다하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종합 복합 예술형식>이라는 얘기이다. 그러고 보면 화장실 아트는 난해한 현대미술이 가는 길을 그대로 노정하고 있는 듯도 하다. 창작자와 관객의 상호소통과 작업의 진화, 이야기 나누듯 끝없이 꼬리 달기, 그 결과 창작자와 관람자의 존재론적 차이점이 사라지게 된다. 이 즈음해서 이미지 사례를 보면서 화장실 아트의 특징에 관한 이해를 돕도록 하자. 2. 개별 작품 감상 및 연구 [사례 연구 1] 응전의 연속 - 덧칠과 덧칠을 넘어 덧칠과 덧칠, 창작과 재창작.
그 속에서 우리의 화장실 아트는 변증법적 발전을 거듭한다.
두개의 유사한 이미지가 보인다. 이 작품은 내가 X대학 중앙도서관 남자 화장실에서 2003년 상반기에 약간의 시간을 두고 촬영한 것이다. 왼편이 원본이고, 한참 후에 본부 직원의 사주로 짐작되는 덧칠이 있었다.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났을까? 그림선의 양식적 차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원작자는 아닌 듯하고, 제 3의 창작자가 지워진 원본의 밑그림을 토대로 또 하나의 이미지를 덧칠된 면 위에 구현해냈다. 둘 사이의 다른 점은 기본적으로 선(線)의 맛이 다르다는 점 말고도, 그림 속 여자의 머리통이 남자의 불알로 변형된 것이 보인다. 원판이 리얼리즘에 충실했다면, 복구 카피판은 초현실적 요소까지 갖추었다고나 할까? 이렇듯 화장실 아트는 작품의 충실도와는 무관하게 창작자가 익명으로 남게 된다. 그러다 보니 창작품에 대한 훼손이 좀 더 손쉬워지고, 제 3자의 개입에 무방비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무방비한 '열림'이 있기에 화장실 아트는 존재한다. 무한한 덧칠과 끊임없는 복구 사이의 실랑이가 화장실 아트에게 존재감을 실어준다. 그런 이유로 위쪽 그림의 경우 지금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유실된 작품이고, 나는 그 원판의 사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가이다. :-)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공공장소'에서 진열 전시되고 있는 이상 온전할 수가 없는 처지이다. 따라서 작품성이 뛰어난 작업은 그때 그때 카메라로 기록해두는 것이 보존자의 현명한 자세이다! [사례 연구 2] 응전 방법도 아티스틱하게... “제발 낙서 좀 하지마 씨댕아.”삭제되기 원작에 써있는 항의 글 전문이다.
이런 텍스트 분노에 대해, 창작자들은 하나가 되어 반격을 가한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제동협동 작업 “니 에미가 빌어도 안될 판에”라는 단서와 함께, ‘청교도 항의자’의 꼬추를 거세함과 동시에 항의자와 그의 모친 사이의 근친상간까지 주선한다. 이들은 이런 ‘처벌’에서 조차 욕망을 즐긴다. 또 다른 검열이 행해진 경우이다. 여기서 관건은 원본이 지워졌다는 일차적 검열말고, 지워지기 직전 그림 속에 나타나는 익명의 화자들의 응전과 재응전의 생동감이다. 이들은 역동적으로 포착되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그림을 잘 보자. 남자 화장실에서 여성이 묘사되는 아주 전형적인 양식이 있으니, 여성을 발라당 눕혀놓고 가랑이를 벌려놓은 M자형 와상(臥像)이 그것이다. M자 와상을 비롯 신성한 화장실을 욕되게 한 일련의 창작집단을 준열히 꾸짖고자 동일한 변기를 사용하는 제 3자가 훈계가 나섰다. “낙서 하지마”라는 비교적 온순한 항의표시. 그러자 이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 이뤄진다. 방법은, 익명의 항의자에게 '니 애미 보지나 빨 놈'이란 견뎌내기 힘든 텍스트에 이미지까지 보완해서, 또 하나의 아트로 화답 하는 식을 취한다. -_-;; 그림 속에서 안경낀 범생이 또라이로 묘사된 항의자는 꼬추가 거세되는 수난에 처해진다. 물론 우리 범생이군의 실제 꼬추는 건재하다. 다만 그림 속에서만 잘려나간 것이다. 이렇듯 현실에서 실현시키지 못할 욕구불만이 화장실 공간에서는 ?아트?라는 방법론을 통해 실현된다. (삭제되기 전까지) 검열로부터 최대한의 자유 확보, 낭만주의를 뺨치는, 혹은 그것의 선조 격에 해당되는 '과장' 그 자체인 묘사법, 그것이 화장실 아트의 미덕이다. 화장실 아트 탄생의 비밀은 바로 현대미술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장소특정성 (site specific)에 있다. 쉽게 풀어 말하면, 어떤 특정 장소에만 어울리는 그런 작품 창작이라는 얘기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후의 화장실 걸작을 발견했다고 한들, 그것을 뚝 떼어다가 전람회장에라도 꽂아놓게 되면 옮겨지기 전의 화장실 아트가 갖고 있던 모든 문맥이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화장실 아트는 똥 오줌 싸대고, 익명의 수 없는 사람들의 궁둥이살 도장이 찍혀진, 냄새 찌든 공중화장실에 놓여졌을 때, 그 본래 취지와 조형미를 온전히 살려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자고로 이 작업들은 1차 배설을 위한 순수한 시도의 부산물인 것이다. 아~ 이 지겨운 놈들. 화장실 내 알루미늄 관물대 벽면 접촉부위에 ‘꼬추’를 그려 넣었다! 이 좁디좁은 공란도 이 넘 들에겐 텅 빈 캔버스다. 3. 화장실 아트 뭐가 남 다른가? 하지만 전시장이 아닌, 공중 화장실을 작업장 겸 전시장으로 고수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화장실 아트는 일반 아트와 뭔가 다른 점을 갖고 있다. 고급 아트가 작가의 독자성을 강조하는데 반해, 화장실 아트는 거의 철저하게 '작가'가 스스로를 드러내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여파로 원본에 대한 훼손과 원본 위에 덧칠하기라는 비도덕적인 방법이 빈번히 그것도 별 반성없이 발생한다. 즉 훼손도 일종의 화장실 사용자의 당당한 권한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이런 경향 탓에 여러 화장실 유저들이 배변자에서 관람자로, 더 나아가 창작자로 변신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거친 검열이 가해지면 그 보다 10배는 위력있는 거친 반응으로 응전하는 것도 좀 다른 점이다. 즉 검열에 대한 최소한의 두려움이 없다. 관객들은 더 강한 노출과 상상력을 요구한다. 어지간한 노출 이미지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 사태가 속출하자, 몸통만한 자지와 보지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전혀 사실무근인 듯한 창작자의 '희망사항'에 가까운 여성편력기가 화장실 벽을 장식하게 된다. 평소 자신의 역량으론 결코 달성될 수 없는 성애담이 화장실 벽면에서 사실로 구체화된다. 상상력이라기보다는 자가당착에 가까워 보이는 이들의 창작물에 그래도 화장실 유저들이 환호하는 것은 자신들의 내부에 억압된 리비도를 익명의 상대방이 대신 해소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한편으로 보면 좀 끔직한 현실이기도 하다. 생각 해보라. 평소 멀쩡해 보이던 선배, 동기, CC 남학생의 머리 속에 이런 저질 개X랄에 육박하는 공상들이 가득 들어 차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참으로 화장실 아트를 감상하노라면, 여기야 말로 (삭제되기 전까지는) 검열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비상업적, 비영리적 창작공간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이 좁은 창작공간이야말로, 여권의 침해를 최소화한 채(여권 침해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화장실 청소담당은 남자용이건 여자용이건 대개가 용역 아줌마들 몫이기 땜에 이 온당치 못한 이미지를 변기 청소 때마다 마주쳐야하는 나이 지긋한 아줌마들의 심기는 과히 편치 못할 것이다.) 창작자의 열의와 예술혼을 불태우고 전시할 수 있는 곳이다. 간혹 어떻게 생겼을 지 안 봐도 뻔한 고리타분한 인간들이 그런 아트에 대한 성토의 글을 옆에 남기곤 한다. 하지만 그런 불쾌감을 표현하는 화장실 사용 남학생들은 아마도 극히 소수일 듯하다. 앞서 예시를 통해 살폈듯이, 그들은 창작자의 도덕성과 정신상태를 질타하고 더러는 그림들을 훼손하는 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이 정도 불만은 남자화장실의 욕구불만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다. 화장실아트에 묘사된 작업들은 하나같이 혈기방장한 남성들이 평소 늘 머리 속에서 그려내는, 상업용 포르노그래피에서나 목격되는 여러 '장면'들이다. 그리고 이 장면들 각각은 기실 일반인들에겐 쉽게 실현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누가 서너명의 모델같은 여자들과 실외 수영장에서 정사를 벌일 수 있겠는가? 화장실 아트의 작가들은 없는 실력을 총동원해서 그림 속 여자들을 최대한도로 쭉쭉빵빵으로 묘사하려다 결국은, 대개가 오바의 오바를 거듭하고 만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것에 관대하다. 아니 그들은 그런 '오바 액션'을 원한다. 이들의 창작활동을 방해하는 공무원들의 노력은 그래서 무모해 보인다. 지워진 그림 위에 순번을 바꿔가며 또 다른 엇비슷한 사고방식의 아티스트가 등장하여 공상물을 남겨대기 때문이다. 이들의 릴레이 창작은 계속될 것이다. 가혹한 검열이 가로막아도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창작욕의 자취들! 바로 세상의 모든 남자화장실에서 지금 현 시간도 부단히 제작 중에 있다. “빨고 박고 싸고” 화장실 아트는 이렇듯 단순한 3박자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이런 단순한 템포로 인해, 화장실 아트는 그 특유의 속도감을 얻는다. 글쓴이ㅣ미술평론가 반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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