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푸른 바람의 노래>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리 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이적의 3집 앨범 2번 트랙에 수록된 <다행이다>의 가사다. 최근에 가진 술자리에 남편의 친구가 가져온 CD에 들어있던 이 곡을 듣고 난 후 우리 부부는 요즘 이 노래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아름다운 멜로디, 유치한 듯 하지만 명료하고 서정적인 가사가 이적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어우러져, 가만히 듣고 있자면 한동안 잊은 듯 했던 연애 시절의 감성이 새록새록 솟아오른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사랑의 감정이 물씬 느껴지곤 했던 시절. 손만 잡고 앉아 있어도 옥시토신이 무한히 솟아 오르던 시절, 살짝 스치기만 해도 파르르 떨던, 온몸이 성감대이던 그 시절.
살짝 느슨해진 연애 감정에 석유를 붓는 심정으로, 많은 남자들은 그래서 이적의 <다행이다>를 화이트데이 선물로, 또는 프러포즈용으로 가장 많이 이용한다는 인터넷 신문 기사를 봤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특히 이미 단 물이 다 빠진 장기 연애 커플이나 결혼 한 지 3년 이상 된 부부들의 경우 이런 사랑 노래에 너무 깊은 감명을 받다 보면 늘 예기치 못한 불화를 겪게 된다.
'이적이 먼 곳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들려주려고 하룻밤 사이에 만든 곡이래. 그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제 결혼을 했으니 불륜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가슴 설레는 연애를 할 수 없는 걸까?’, ‘내 인생에는 왜 이적 같은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 걸까? 머리에 비듬이나 털면서 방귀를 껴대는 저 남자는 도대체 나를 여자로 생각하기나 하는 거야?’같은 류의 불순한(?) 생각이 스멀스멀 뇌를 잠식하며 결국 죄 없는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눈을 흘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다 할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을 하고, 로맨스는커녕 함께 있으면 꾸벅꾸벅 졸기나 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던 나 역시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땅이 뚫어져라 한숨을 쉬어댔다.
그런데 남편의 반응이 의외다. 나의 맘을 헤아렸는지, 이적의 노래에 로맨틱한 필을 받은 건지 간만에 (대표적인 연애 행각 중 하나인) ‘운전 중 남는 한 손으로 내 손 꼭 잡기’ 권법을 구사하는 게 아닌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는 늘 남편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마음이 눈 녹듯 녹아버린다. 부부 싸움 후, A4용지로 다섯 장이 넘게 할 말을 준비해놨다가도 남편이 꼭 안아주며 ‘미안해.’라고 한마디만 하면 준비했던 바가지 멘트 들을 순식간에 까먹는다. 대부분의 따지기 좋아하는 여자들도 다 마찬가지다. 그러니 남자들은 같이 맞수를 뜨기보다, 덥석 안아주거나 키스하는 방법으로 말문을 아예 막아버리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얘기가 잠깐 샜다. 아무튼, 나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남자의 입장이 되어 이적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이적도 결혼하면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을걸?.’ ‘그 여자랑 헤어지면 다른 여자한테 더 좋은 노래를 만들어 줄 지도 몰라.’ ‘어쩌면 이적도 나이트에 부킹하러 다니고, 접대부 나오는 룸싸롱에 출입할 지도 몰라.’ ‘혹시… 이적 같은 남자도 안마시술소에 가 봤을까?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 두 번쯤은 다 가본다잖아?’
위안 삼는답시고 혼자 하던 생각이 엉뚱하게 도를 넘어 ‘한국 남자들의 유흥 문화’에 관한 데까지 이르자 나는 공연히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은 거기까진 참아내지 못했다.
그날 우리는 결국 부부싸움을 했다. 다 이적 때문이다.
다르미 | 2017-09-18 04:0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