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 로지>
가끔 아주 가끔 '아. 그때 잡았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하는 생각이 나게 하는 남자가 있다. 따져 보니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다.
배낭 하나 매고 홀로 세계를 누비던 나의 화려했던 시절! 사실 배고프고 시커먼 배낭족에 불과했지만 아무런 제약이나 설명 없이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와이였다. 계획한 2개월간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동네 클럽에서 일 하던 시절, 그를 만난 곳.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두루두루 괜찮은 남자였다. 전 부인 얘기를 가끔 했으니 이혼한 건 알았지만, 프로포즈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일곱 살이나 먹은 애가 있다는 얘기는 안 했었다. 그래도 별로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괜찮은 남자였다.
그 남자랑 결혼하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는 한국에 두고 온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당시의 내 남자친구가 바람을 밥 먹듯이 펴댔다는 사실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홀랑 결혼 소식을 알리는 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라는 기특한(?) 생각을 했더랬다.
아... 뭣 때문에 그랬을까? 한동안 땅을 치며 후회했다. 남편도 아니고 남자친구 때문에, 그것도 만성 바람둥이 남자친구 때문에 나를 죽도록 사랑해주고 궁합도 딱딱 맞고 돈도 겁나 많고 생긴 것도 그만하면 괜찮고 삶을 즐길 줄 아는, 애 하나 딸린 것 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먹어주는 30대 중반의 일본계 미국인 전문직 종사자 남편을 가질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다니.
그가 프로포즈 하던 날, 앞으로 함께 살 집이라며 보여주던 하와이의 바닷가 하얀 저택. "당신은 크게 될 사람이니 공부를 더 하는 게 좋겠다."며 대학 입학 원서를 들고 찾아왔던 일. 딱 일주일만 있다가 오라며 공항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그의 모습. 모든 여자들이 꿈에 그리는 로맨틱 럭셔리 라이프의 청사진이 아니었던가.
그 당시 왜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찢어버리고, 맘에도 없는 말로 그 남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다시 잘 해 볼 수 있는 일말의 여지마저 끊어버린 것인지지 한동안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기도 했다. 삶이 힘들고 괴롭게 느껴질수록 내가 놓쳐버린 화려한 삶의 이미지가 안타깝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십 년이 흘렀다. 그 때 런어웨이 브라이드 처럼 도망쳐 온 이유를 생각해본다. 아마 나는 거저 얻어먹는 인생이 나한테는 잘 안 어울린다는 걸 내 자신도 인식하지 못 하는 사이에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조건이 너무 크게 다가오는 사람과 결혼 한다는 건 너무 로맨틱하지 못 한 거 아닌가 하는 쓸데없이 겉멋을 부렸던 것 같기도 하다. 지나고 나니 인생은 다 생각하는 대로,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대로 가는 것 같다. 어울리지 않은 인생을 억지로 살다 보면 결국 불행해진다. 참 신기한 게 한 때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함께 삶을 보낼 계획을 짜기도 했던 그 남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한 번쯤 보고 싶던 마음도 사그라 들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빚을 졌고, 돌려 주려고 하니 연락처를 잃어버린 것처럼 답답하고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하다. 언젠가 살면서 그땐 정말 미안했다고. 정식으로 사과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혹시 이런 생각을 하는 내 마음 한 구석에, 사과를 구실로 다시 만나 어떻게 한 번 해 보겠다는 불륜의 의지가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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