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포르노 18. 그런다고 결말이 바뀌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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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그런다고 결말이 바뀌지 않아. “하하하하.” 변창수는 반기철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도 한참을 웃었었다. 반기철이 인상을 썼다. “웃지마 인마. 난 정말 심각해.” 반기철이 맥주 잔을 단숨에 비웠다. 변창수가 입가에 남아있는 웃음기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 여자 그냥 샤킹 한 거 아닐까?” “샤킹?” “너랑 빠이빠이하고 싶으니까. 남편 핑계를 대는 거지.” “나도 그게 의심스럽기는 한데...” “한데?” “며칠 전만해도 나랑 살림이라도 차릴 것처럼 착착 감기던 여자가 느닷없이 왜 변심을 했냐 그 말이야?” 반기철은 진지하게 턱을 어루만졌다. “어느 날 갑자기 돌변했으면, 그 여자 말대로 남편한테 제대로 걸린 거네.” “얘기가 그렇게 되나?” 순간 반기철 낯빛이 썩어 들어갔다. 아무리 궁리해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나 이제 어떡해야 하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회사직원인데 꼴통 짓이라도 하면?” “신경 쓰이면 짤라 버려.” 변창수가 손 날로 허공을 그었다. 반기철은 한가한 소리나 지껄이는 변창수가 못 마땅했다. “장난 지금 나랑하냐?” 위급사태에서도 농담할 여유가 있은 걸로 봐서 아직 급한 똥은 아닌 듯 보였다. “아니면 진급이라도 시켜 주던지. 구멍동서도 사돈은 사돈인데.” 변창수는 반기철을 골려 먹기로 작정을 한 것처럼 터무니없는 소리만 늘어 놓았다. 반기철은 슬슬 부아가 끓었다. “진급은 개뿔. 호구 잡힐 일 있어?” “그럼. 답 나왔네. 짜르지도 못하고, 진급도 안 되면. 딱한 길만 남았네.” “그냥 놔 두라고?” “답답하긴.” 변창수가 혀를 찼다. 그는 맥주로 입을 축인 뒤에 말을 이었다. “권력이 왜 권력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떳떳한 게 권력 아니야?” “...?” “네가 맨날 아버지 욕하는 게 뭐야? 결정은 자기가 해 놓고 책임은 임원들한테만 묻는다며?” “...?” “사고는 네가 쳤지만 책임은 서대리린가 뭔가 하는 인간이지는 거지.” “어떤 식으로 책임을 전가 시키라는 거야?” “지방으로 전출 시켜버려.” “그러다가 깽판이라도 치면?” “과연 깽판을 칠 수 있을 까?” “이거 헷갈리네.” “딜을 할 때 하더라도 사실여부는 따져 봐야지. 불륜을 알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널 찾아 올 거 아냐. 쇼부는 그때 쳐도 늦지 않아.” “모르면?” “그냥. 잣 되는 거지. 마누라 잘 못 둔 죄로.” “그 땐 한가희가 찾아 오겠네?” 반기철 입가에 비열한 웃음기가 번졌다. 변창수가 손가락을 튕겼다. “넌 역시 스마트해서 좋아.” 며칠 뒤. 서용하는 출근하자마자 날벼락을 맞았다. 전출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전출지는 경북영주였다. 그곳엔 반도실업 수입창고가 있었다. 풍력기자재를 수입했다가 타산이 맞지 않아서 그대로 방치해 둔 야적장이었다. 말이 수입창고지 고철장이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창고지기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이건 좌천도 아니다. 유배였다. 영주창고를 심하게 비꼬는 사람들은 그곳을 ‘나라야마부시코’라고도 불렀다. 골짜기나 다름없는 외진 산골인데다가, 거대한 강철구조물들이 사람 뼈다귀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영주는 사원들의 순장터였다. 사표 쓰라는 말보다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영주창고 발령이었다. “이번 달 안으로 업무 인수인계하고 다음 달에 옮기도록 해.” 부장은 서용하에게 전출명령서만 달랑 전달했다. 서용하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사유가 뭡니까?” “나도 몰라.” 부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꽁무니를 빼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그날 밤 외출했던 한가희가 현관을 열고 들어왔다. 구두를 벗던 그녀는 거실에 서 있는 서용하와 눈이 마주쳤다. “일찍 들어 왔네요?” 서용하는 대답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져 보였다. “일찍 오면 온다고 말을 하죠. 마트라도 들렀다 오게.” “그럼. 다녀와.” 서용하는 목소리도 맥이 빠져 있었다. 서용하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들 승우가 식사를 먼저 끝마쳤다. “엄마. 나 들어가서 게임해도 돼?” “오늘은 한 시간 만이다.” “알았어.딱 한 시간만 하고 공부할 게.” 승우는 신이 나서 제 방으로 뛰어들어 갔다. 지켜보던 서용하가 식탁에서 일어났다. 밥공기가 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녀는 걱정되는 눈으로. “이게 다 먹은 거예요?” “응. 별로 생각이 없네.” “어디 아파요?” “아니.” 서용하는 양치질도 하지 않고 거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한가희가 설거지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그는 그 자세로 TV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그가 제일 싫어하는 홈쇼핑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눈은 화면을 보고 있지만 생각은 딴 데 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한가희가 바로 옆에 앉았다. 그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서용하 손에 있는 리모컨을 빼앗았다. 그는 그제서야 그녀를 쳐다봤다. 그가 손을 벌렸다. “내 놔.” 그녀는 리모컨을 반대쪽 손으로 옮겼다. 그의 손이 미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쥐고 있던 리모컨을 엉덩이 밑에 깔았다. “아프지도 않은 사람이 왜 그리 힘이 없어요?” “...”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서용하는 마른 입술을 몇 번 축이더니. “사실. 당신한테 할 말이 하나 있어.” 서용하는 지방발령 사실을 한가희에게 털어놨다. 그녀는 머리가 핑 돌았다. “당신은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어요?” 서용하는 그녀가 답답했다. 아무리 직장생활 경험이 짧다고 조직생리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는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듣고만 있지 그럼. 회사에서 결정 난 일을 가지고 따져?” “따질 수 있으면 따져야죠. 가만히 있다가 좌천 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경북,영주면 주말에도 올라오기가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서용하는 이미 포기했는지, 넋이 나간 건지. 무심하게 읊조렸다. “그만 두란 얘기지.” 한가희는 기가 찼다. 회사 내에 남편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지 않고서야... 반기철? 그녀는 가슴이 먹먹했다. 부사장이 꾸민 음모라면 남편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남편을 훑었다. 반기철이 떠오르자 그에게 말을 걸기가 두려웠다. 그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TV만 바라봤다. 너무도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자신과 부사장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맞나 싶었다. 배후가 반기철이 아니라면...? 그녀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누가 결정한 거래요?” “알면 뭐하게.” 서용하가 그녀를 돌아 봤다. 눈빛이 차가웠다. 아내가 나서서 해결 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한 마디 따뜻한 위로였다. 해결할 능력도 없이 따지듯 파고드는 한가희가 야속하기만 했다. “부사장한테 직접 찾아가기라도 하려구?” 그의 음성은 모래바람처럼 거칠고 건조했다.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투였다. 한가희 심장이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아무리 자신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미 용서받고 끝난 일이다. 서용하 본인부터 부사장을 다시 거론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못 박은 일이다. 그녀는 밀려오는 모멸감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당신. 언제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 셈이죠?” “그게 무슨 소리야?” “부사장을 찾아 가라고요? 나더러.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한가희가 발끈했다. 서용하는 그녀가 왜 성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발령권자가 누구냐며? 가르쳐 달라고 해서 가르쳐 준 거잖아. 난 알아도 번복할 힘 없어. 자신 있으면 당신이 직접 찾아가 보던 가.” “부사장하고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고 말 했잖아요.” 한가희는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질러 버렸다. 서용하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부사장하고 관계가 끝났다니? 언제 시작이라도 했어? 말해 봐.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는 거잖아. 둘이 언제부터 뭘 시작했냐고?” “언제 시작했냐고요? 그걸 다시 내 입으로 말해야 해요? 콘돔호텔이 마지막이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다섯 번이 적으면 열 번으로 할까요? 그걸 원하는 거예요?” 벙찐다더니. 서용하 표정이 딱 그 짝이다. 그의 머리 속은 한가희가 던져 놓은 단어들을 재조립하고 있었다. 서용하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부사장이랑 콘돔호텔에서 같이 있었다는 거잖아 지금. 그것도 다섯 번이나.” “몇 번을 말해야 돼요? 다섯 번이 끝이라구요.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결별선언까지 한 사람을 지금 와서 내 발로 찾아 가라구요? 그걸 지금.” “그만.” 서용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듣고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장난이라고 보기엔 한가희가 너무 진지했다. 그는 몸에서 열이 나는지 셔츠 단추 한 개를 풀었다. “다시 정리해 보자.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인지.” “...” “요약하자면 당신이랑 부사장이랑 바람을 폈다는 거잖아.지금 그거잖아. 내 말이 맞아?” “바람은 아니였어요. 그냥.” “어쨌든.” 서용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같이 잤다는 말이잖아.” 서용하가 눈을 부릅떴다. 한가희는 울고 싶었다. 죄책감이 아니다. 억울해서다. 흉악범이라도 일사부재리 보호는 받는다. 모든 걸 잊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다짐까지 해 놓고, 마치 아무 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아픈 상처를 찌르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잠깐 외도 한번 한 것 가지고 평생 죄인 취급 당하고 사느니 깨끗이 갈라서는 게 나을 지 몰랐다. 그녀는 서용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누구 때문에 부사장하고 잤는데.” 한가희가 다부지게 반격을 가했다. 서용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여자가 지금 뭘 잘했다고...” “내가 부사장이 좋아서 잔 거예요? 당신한테 티끌만큼이라도 불이익이 갈 까봐.” “...” “당신이 그 회사만 안 다녔어도, 내가 부사장 마수에 걸려 들 일이 없었을 것 아니예요.” 한가희는 자기 방어를 넘어, 책임까지 남편에게 전가했다.서용하는 더 이상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더 이상 추궁할 필요가 없었다. 아내 외도는 무조건 사실이었다. 한가희가 왜 묻지도 않은 사실을 잠꼬대하듯 털어 놓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궁금해도 지금은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아내 말대로 그녀 상간남이 부사장이라면 자신이 좌천된 이유는 또 뭔가? “좋아. 시발 내가 좆 나게 무능해서 마누라 몸뚱이나 팔아서 먹고 사는 개자식이라고 치고.” “...” “마누라까지 상납을 했는데, 내가 왜 물을 먹냐고? 그 이유나 좀 알자.” “그걸 내가 어떡해 알아요.” 한가희는 이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서용하는 명치 끝이 따끔거렸다. 가정 상비약으로 우황청심환을 구비해 놓는 이유가 있었다. 심장마비로 급사해서 한가희 복권 당첨되는 꼴 보지 않으려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난 솔직히 당신이 부사장과 놀아났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지방으로 밀려났다는 것도.” 한가희는 남편이 측은하기만 했다. 부정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용하가 감았던 눈을 지그시 떴다. “그러니까.” “...?” “당신이 수습해.” “...!” “당신하고 부사장이 당신 말대로 내연관계였다면, 일은 당신이 저지른 거잖아. 사고쳤으니까. 수습도 당신이 해야지.” “수습을 하라니... 그게 무슨 의미예요?” “부사장 만나서 내 자리 원래대로 돌려 놔.” 그녀는 야멸차게 고개를 돌렸다. “난 죽어도 못 만나요.” 서용하가 그녀를 끌어 당겼다. “섹스까지 했다면서 왜 못 만나? 당신이 부사장 만나서 인사명령 철회시키면 내가 믿어 줄 게. 당신하고 부사장 관계.” ‘이게 말이야 똥이야. 증명할 일을 증명하라고 해라.’ 한가희는 서용하란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다. 이럴 땐 자신도 막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당신 자리만 원위치로 돌아오면, 나와 부사장이 다시 시작해도 상관없다. 그 말이에요? 지금.” “맞아. 어차피 같이 잔 거, 또 잔다고 문제 될 것 없잖아. 닳는 것도 아닌데.” 서용하 눈에 핏발이 섰다. 한가희는 그가 악마처럼 보였다. “당신 정말 미쳤군요.” “그래 미쳤다. 마누라 도둑맞고, 회사에서 짤리게 생겼는데. 안 미칠 놈이 어딨냐? 뺏긴 마누라야 다시 찾아 오면 되지만 회사는? 짤리고 나면 대책 있어? 니가 나 벌어 먹일 거냐고?” “...” “결자해지야. 가서 잠을 자든, 살림을 차리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내 자리나 원래대로 돌려 놔. 알았어?” 서용하가 한가희 멱살을 움켜 쥐었다. 서용하가 이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인 줄은 몰랐다. 그녀는 실망을 넘어 절망을 했다. “그 말 진심이죠?” “당연히 진심이지. 지금 농담하게 생겼어?” 서용하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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