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乏의 관계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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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섹스를 통해 그 애는 채울 수 있었을까. 아니면 비울 수 있었을까. 애초에 섹스를 통해 채우거나 비우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었는지 이제는 모르겠다. 또 사정 못 한 섹스. 징크스가 되려나.
그럼 나는? 섹스는 애초에 내 도피처였다. 기억을 더듬어 첫 섹스였던 15년 전의 그것은 한없이 약하고 작은 나를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었고 그 안에 사랑 비스무리한 건 결코 눈을 씻고 찾으려야 없었다. 사랑을 섹스와 분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첫 단추가 그러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관성은 내 섹스를 허황된 팽창으로만 이끌었고 그리하야 내 섹스는 오롯한 쾌락으로 점철될 수 있었던 거겠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나는 섹스로써 사랑 받았던 적 없었다. 이제는 나를 부풀려야 할 이유 같은 게 없어진지 오래고, 다만 몸의 쾌락만 남은 그것을 나는 저버릴 이유 또한 없어서 기회가 닿는 족족 나와 너를 달랬다. 뒤집어서, 나를 달래야 하는 일이 생기면 나는 족족 기회를 만들었지. 겨우 그런 게 내 섹스였다.
내가 겪은 상실은 안락한 적 없었던 내 도피처를 함께 앗아갔다. 직후에는 사람의 문제겠거니 했는데 또 다시 보니 아니었다. 그 애와의 무지막지하게 반가운 재회 가운데에 섹스를 놓아도 나는 이제 편치가 않게 됐다. 내 당혹스러움을 그 애는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다그치거나 실망하거나 미안해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큰일났다. 이제의 나는 섹스로 도망갈 수 없게 됐다. 어디에서 무엇을 언제 왜 어떻게 하는지보다도 나는 ‘누구’와 함께인지가 항상 중요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누구’도 통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엉엉 울고 싶어졌다. 울진 않았다.

그 애의 숙소는 우리 집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는데, 그 애를 향해 가는 길에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바라는 것이 거기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있을 거라는 기대보다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믿음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때가 분명 있는데, 그 날이 꼭 그랬다.
내가 바라던 것은 섹스가 아니라 결국에는 대화이자 눈맞춤이었고 또 팔베개였으며 그것들을 통칭하면 온기쯤 되겠지. 대화도 눈맞춤도 포근했다. 그건 분명 그 애도 나와 마찬가지로 느꼈을 것이다. 이건 오만함.

“어떻게 하고 싶어?”
가지런하게 벗은 둘 사이의 주제는 바로 잠자리.
“뭘?”
“자고 가고 싶어?”
“너 내일 몇 시에 나간댔지?” 좀체 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법이라 나는 상대의 의중을 부단하게 살필 수밖에는 없었다. 항상 그랬다. 몇 시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어라 대답하는 그 애의 말을 가볍게 흘려 보내고는 또,
“상관 없어.”
금기어를 기어이 꺼냈는데 그 애는 호통치지 않았다. 단지,
“음.” 하고 꽤 오래 골몰했다는 것.
“너랑 같이 있고 싶어. 근데 너가 만에 하나 불편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안 서운해. 그럴 수 있어. 알지? 반대 입장이어도 너도 그럴 거잖아.”
“응. 고마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그래.”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우리는 그대로였다. 우리는 여전히 방황하는 중이었고 또 그 전처럼 각자의 고통을 짊어지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것을 동일하게 느낄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당면한 것들에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또 다르다고 해도 비난하거나 서운하거나 실망하지도 않았다. 시간은 덧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우리 사이에서는 그랬다.
아! 정말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었다.
“응, 나 혼자 있고 싶어. 미안해.”
“어어- ‘미안해’ 금지.”
“미안해.”
“죽는다.”
쫓겨난다는 생각 안 했다. 가느다랗긴 했지만 예상보다 짧았던 팔베개도 그 품도 여전히 뜨거워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제나 지금이나 나는 같은 걱정을 했다.
“너 너무 뜨거워. 너가 너무 뜨거워서 내가 차갑게 느껴질까 봐.”
“시끄러워.”

알람까지 맞춰두고도 시간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조금은 어영부영하게 되어 버렸다.
“택시 얼마나 나와?”
“어, 한 오만 원.”
“이거 가져가.”
어디서 언제 꺼냈는지 모를 지폐뭉치를 그 애는 내 품에 욱여넣으려고 했다. 꼭 늦은 시각, 어느 먹자골목 고깃집 앞의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야! 너 이거 화대야.”
“개소리야. 받아.”
“너 이거 나 주면 바닥에 던질 거야.”
“아, 좀 받으라면 받아라.”
“뭐야, 새해라고 주는 거야? 너 세배도 안 받았잖아.”
“내 전재산이야! 빨리 받아.”

넓은 거리에 사이렌이 고요하게 퍼지더니 연이어 커다란 소방차 몇 대가 좁은 골목 속으로 순차적으로 사라졌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나는 담배를 피웠고 그 애는 그동안 종말에 대해 종알거렸다. 백두산이나 지구온난화, 범세계적 사막화 같은 것들. 그 애는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멋졌다. 나는 하려고 시도 조차 하지 않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행하고자 하는 모습이 눈부셨던 것 같다.

택시가 곧 가까워졌고 그 애와 작별이랍시고 떠들었던 건,
“사람 너무 좋아하지 마.”
“좋은 걸 어떡해.”
“얼굴에 티 좀 덜 내든가. 좆밥처럼.”
“해 볼게.”
“열심히 살 동력을 얻었어. 이기적이게도.”
“나 소비해서 얻은 산물이면 나는 고맙지.”
“그래, 잘 살자.”
“응, 꼭. 나 간다. 고마워.”
“또 연락할게.”
안 해도 된다는 말이 그렇게나 매섭게 눈을 뜰 이유가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그 애는 그 날 낮에 다녀온 전시에서 찍어 온 사진 몇 장을 보내 왔다. 글과 향. 글을 읽는 동안에는 조금 먹먹했고 향 사진을 보면서는 코끝에 향내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다녀오지 않은 전시에 나는 이렇게나 잠겨 버리고 마는데, 그 애는 오죽했나.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더없이 따뜻해서 좋았다. ‘미안해’ 대신에 애가 쓰인다고 했다. 귀엽고 고마웠다. 상관 없지 않았다.


현금 사용을 잘 하지 않는 까닭에 그 애가 쥐어 주었던 현금은 내 지갑 속에 빳빳하게 자리하고 있다. 쓰지도 않을 돈을 보면서 드는 감정이 이렇게나 든든할 수가 있구나. 어쩌면 비상금 같은 거.

“행복이 뭔진 몰라도 행복해야 해.”
“행복 뭔지 우리는 알아, 본능적으로.”
“행복 뭐여, 난 몰라. 어려워.”
“아니까 아득바득 발버둥치는 거 아니겠어, 행복 찾으려구.”
“그런가.”
“응, 그리고 우리는 찾을 거야.”
“그래, 그러자.”
또 만나자고 그랬다. 4년 전의 어느 날처럼, 더 멋진 사람이 되어 있자고 꼭 잡았던 손 놓으며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줘도 줘도 모자란 안녕이었다.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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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3-04-26 17: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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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3-02-11 17:23:35
드댜 완결까지 봤다 ..그럼 얼굴에 좋아하는 티좀 덜 내던가 좆밥처럼 ㅋㅋㅋㅋㅋㅋㅋㅋ 왜케 공감가냐 ㅆ ㅋㅋㅋㅋ
익명 / 좋은 걸 어떡하냐는 내 마음에도 공감해 주세요 ㅜㅋㅋㅋ 아님 어쩔 수 없구~
익명 / ㅋㅋㅋㅋㅋ 마음도 알죠 제가 좆밥이거든요 ㅋㅋㅋㅋ
익명 2023-01-30 00:10:45
고기는 소중해
익명 / 나도 ㅋㅋ 그냥 감사한 마음 잊지 말기
익명 / 사냥이라는 제의를 없앤게 죄를 짓고 있는걸지도 몰라
익명 / 그 친구가 선택한 단죄 아닐까 마음은 좀 가벼워질 걸?
익명 / 달아날 자유마저 박탈했는데 선택이 어딨는거지
익명 / 아 비건 친구 ㅋㅋ 저는 고기 얘기
익명 / 달아남에 자유가 어딨어 ㅋㅋ 요 ㅋㅋㅋ 그건 포기지
익명 / 사냥 당하는데 달아날 자유가 왜 없지 그걸 말살한게 인간인데 사육하잖아 ㅋㅋ 요 잡히고 나서야 포기하는거지
익명 / 허얼
익명 / 동상이몽 동문서답했다 내 짧음
익명 2023-01-29 21: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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