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하고 싶은 인간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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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의 살을 만진다는게 결국은 나의 쾌락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다. 어쩌면 성적 만족이라는 그것은 환각적이었을지 모를 일 아닐까.
어떤 사람의 사상에 미의 절정은 죽음이라 했던 것을 곰곰히 들여다보면 과연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성행위는 완연한 충족의 지향성이고 동시에 그것에서 달아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던가. 또 그것을 이루어 줄 타자는 존재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으며 만족의 순간 그것을 택할지도 의문이라는 것은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면 택해야 할 것은 해소로써 빠르게 도달해야 할 정점이 아니라 최대한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로 섹스라는 행위에 있어 슬로우 섹스는 더없이 좋은 향유일지 모른다. 한없이 지금을 늘리고자 하는, 축적되어 터져나오는 오르가즘이 아니라 한없이 거기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 그래서 그나마 할 수 있다면 감각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슬로우 섹스 아닐까 하는 생각. 마음에도 어떤 얼굴의 상기됨이 있다면 육욕의 발화점에서 시작되는 정신적 쾌락은 어쩌면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욕동이 어느쪽으로 향해야 하는지는 밑 빠진 욕망을 끝없이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위를 지향하는 것이라 생각하는게 조금은 덜 괴로울 방책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철학가도 섹스하고 싶다는 변명을 길게 늘여놓은 것 일수도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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