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 익명게시판
꽉 차 텅 빈  
0
익명 조회수 : 2203 좋아요 : 0 클리핑 : 0
1-1. 여행 안 좋아한다. 가봐야 물가만 드럽게 비싸고 내실은 없어서. 집에 와서도 또 쉬어야 돼. 근데 누구랑 가는지는 또 다르지. 이제 긴 휴가 같은 거 없을지도 모른다며 내 대신에 들떠준 또라이 하나. 기사 자처해줘서 고마워. 술은 내가 마실게, 운전은 누가 할래? 그건 바로 너.
1-2. 여행지에서 만나게 될 기적 같은 인연? 그딴 거 환상에나 존재하는 법이고 나는 극사실ㅋㅋ주의ㅋㅋ
1-3.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고, 연락이 닿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초현실에 잠깐 살게 됐다. 울었던가? 그건 기억 안 난다. 반갑기만.
1-4. 습관 같은 섹스 뒤의 공허는 내가 알아서 할 몫인데. 근데 그거 뺏겼다. 잠깐이나마 가득 찬 것처럼 느꼈다. 착각이었을까.
1-5. 공항에 바래다 주면서 걔는 환시幻視에 대해 고백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먹먹하게 밀려오는 이걸 어떻게 다뤄야 좋을까, 고민할 뿐이었다. 오만하게도.
1-6. 첫 섹스라는 걸 한참
은 아니고 꽤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근데 왜 너 잘해? 이건 내 우스개. 걔는 웃지 않았다. 
2-1. 또 온데간데없이 홀연해졌다.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하지 않아도 나는 괜찮았다. 세상에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걔도 그 중 하나였을 거라고 믿었다. 대체적으로 나와 걔의 시간은 달랐는데 아주 잠깐의 때가 우연하게 맞아떨어졌을 거라고, 그러니 나에게는 그마저도 복이겠거니.
근데 이 오지랖은 정말 어찌 할 방도가 없는 게, 걱정되는 마음을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내려놓을 수나 있는 건가.
2-2. 답장 안 해도 괜찮아. 숫자 사라지는 기능이 불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문자로 보내. 왠지 나라도 그럴 것 같아서. 그냥 살아만 있자. 죽지 말자.
2-3. 그로부터 오래 뒤에 나는 한강 작가의 <흰>을 읽었고 그 안에서 떠오르는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에 걔가 없지 않았다.
3-1. 다시 걔를 봤을 때엔 조금 처연해 보였다. 그리고 걔 눈엔 내가 안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고. 안 보인다고 믿고 싶었을지도. 그래서 나도 알은 체를 하지 않았다.
과장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왜 나는 가여웠을까. 여부없다. 싸구려 동정이겠지.
3-2. 그리고 이젠 내가 홀연해졌다. 걔가 사라졌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인사는 안 했다. 그럴 만한 이유? 알아서 뭐하게?
4-1. 공허해.
4-2. 지겹다.
4-3. 무뎌지고 싶다.
4-4. 익숙해지면 좋겠다.
4-5. 이젠 괜찮다.
4-6. 즐겁다. 아주 조금.
4-7. 나는 뭘 기다리는 거지. 왜 기다리는 거지.
4-8. 즐거워도 되나. 괜찮을 자격이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건 좋다.
4-9. 모르기는 몰라도 편안히 숨 쉬는 게 얼마만이지.
4-10. 그리고 안녕! 영영.
5-1. 죽을래? 너 왜 허락도 없이 내가 보내준 사진 쓰고 있어!
이뻐서 그랬어 미안해.
그치 고마워 반가워. 근처 올 일 있으면 연락 줘.
이 날 돼?
아니 이 날 말고 저 날은 돼.
그럼 누나도 볼 겸 이쁜이도 볼 겸.
응 우리집에서 자도 돼.
5-2. 이쁜이 이제 없어. 와도 못 봐. 그리고 내 컨디션 장담 못 해. 너한테 책임 지우기 싫어. 너 그래야 할 의무 없어. 나한테도 그럴 권리 없어.
혼자 회복하기 힘들지.
6-1. 설마 섹스할 줄을 몰랐을까. 걔나 나나. 근데 나는 안 하고 싶은데 어떡하지? 누구한테든지 죄 짓는 기분이야.
그래서 너 눈 앞에 있는 그 사람은 내가 아닐 걸.
6-2. 다시 1-4. 내 몫을 뺏겼던 이유에 대해서 풀어보자.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너는 섹스를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거라고 그랬다. 나는 아니었는데. 그 오래 전 그 날, 너는 그렇게 내 몫의 공허를 빼앗아가서 자해했다.
지금의 손목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말하지 못 했다. 볼 자신이 없었다. 이미 다 시들어 메마른 사과를 과연 누가 무슨 면목으로 쥐어줄 수 있겠는가.
6-3. 괜찮아, 이젠 괜찮아. 누나 탓 아니야.
6-4. 그럼 이번엔 내가 너 몫만큼 뺏어도 돼? 허락을 빙자하는 고지. 우리 둘의 관계는 딱 그랬다. 안 된다는 말을 할 수도 없게. 예를 들면,
불 켜도 돼?
물 마셔도 돼?
화장실 써도 돼?
쌀국수 먹을까?
산책 갈래?
더 걸을 수 있어?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싫다고 할 수도 없게. 의견은 결코 교환될 수 없었고 배려와 존중이라는 미명 하에 아무것도 섞이지 못 했다.
개잡소리: 당연하게 되는 것들을 앞에 두고서 나는 꼭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지더라. 슈퍼잼민이 애새끼. 어? 하고 당황하던 얼굴.
6-5. 쉬운 쾌락이 싫다는 내 말에 걔는 끄덕끄덕. 싫긴 뭐가 싫어, 개좋아해, 그거. 쾌락은 좋은데 그 뒤에 따르는 공허가 좆 같단 거지. 공허감 없이 향락하고자 하면 나는 얼마든 할 수 있어.
존나 얼마든지.
다 잊거든. 그럴 수 있거든, 나는.
6-6.
7-1. 걔가 집어든 책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 어렵다며 금방 덮길래 그럼 이건 어때? <떨림과 울림>. 이것도? 그럼 <사람, 장소, 환대>. 아까 너 어렵다던 책이 여기 프롤로그에 나와. 난 둘 다 완독 못 했어, 아직. 읽기 어려우면 아무것도 안 읽어도 돼. 나 여기 있는 책들 중 완독한 거 아무것도 없어.
꽤 오래 읽네. 내일 나 출근하고 심심하면 더 읽다 가도 돼. 근데 빌려주지는 않을 거야.
아, 나는 무슨 책 읽고 있었지. 아마도 애도와 관련한 책. 롤랑 바르트는 아니고. 저자가 누구였더라. 역자는 기억난다. 초등학생 때, 나를 지독하게도 괴롭히던 어떤. 높은 확률로 같은 인물은 아닐 것이다.
7-2. 비 오는 날에 산책하는 거 좋아해?
아니 나는 산책이 어려워.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너가 부럽고 멋있어.
나갈까? 나 동네 구경시켜줘.
바람이 거셌고 비는 어느 새에 그쳤다. 처음 먹은 쉑쉑은 버거보다도 한치프라이가 훨씬 좋았다. 회음부에 땀띠가 생길 때까지 걷고 걷고 걷고 걷고 웃고 걷고 걷고 웃고 걷고 걷고 걷고 걷고.
7-3. 나는 덤덤했고 걔는 울었다. 집에 있는 모든 것들에 흔적이 덕지덕지라서 나는 덤덤했고, 집에서 보이는 모든 흔적들에 걔는 울었다. 내가 덤덤한 게 오히려 더 슬프다고 말했다. 왜?
7-4.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언제든지 또 와도 된다고 덧붙였다. 이건 썅년이 되기 싫은 내 거짓말일까.
걔는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또 오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우리 둘 중 누구도 ‘살아 있음’을 언급하지 않았다.
8-1. 누나 나 이제 나왔어. 덕분에 잘 쉬고 잘 먹고 잘 놀았어. 퇴근하고 오면 책상 위 확인해. 이제 쓰레기 분리수거하러 가는 길. 에어컨은 끄고 나왔는데 창문 여는 건 깜빡했다. 미안.
8-2. 책상 위에는 화대인지 부조인지 모를 지폐 몇 장. 편지를 떠올린 내가 병신 같아 보이더라도 별 수는 없지.
8-3. 편지 기대했어? 펜이랑 종이를 못 찾겠더라고.
8-4. 지금쯤이면 도착했겠다. 갈 땐 비 안 와서 다행이야.
8-5. 노란색 숫자 1 여러 개. 다시 2-2? 아니. 그럼,
이젠 살아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9-1. 자위적인 섹스. 섹스와 자위의 차이. 눈을 보는 일. 섹스하기 이전의 키스. 시공간의 공유. 공명. 다시 떨림과 울림. 그리고 페터 슐레밀.
9-2. 네 몫만큼의 공허를 빼앗는 데에 나는 성공했을까. 그럼 너는 그 때의 나처럼 가득 찬 상태로 얼마간은 버틸 수 있는 힘이 날까. 아주 잠시간이더라도.
근데 또 힘이 나는 것이 아니더라도, 가득 찬 상태라고 느끼는 것이 설령 착각일지라도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다.
10-1. 걔가 간 다음날 퇴근길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바래다줬고,
10-2. 그 다음날은 같이 저녁을 먹고 싶다는 누군가와 함께였고,
10-3. 그의 이튿날에는 아주 오랜만에 헬스장에서 꽤 오랜 시간의 여유를 보냈고 심한 근육통을 호소했다.
10-4. 또, 집들이에 참석해야 했으며,
10-5. 당직야근과 활동명상과 이발 이외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편지지 12장.
10-6. 나한테는 여름휴가가 없다. 가고 싶은 곳도, 함께 갈 이도, 그럴 시간도, 명분도 목적도.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서 가지 않기로 했다.
10-7. 애초에 봄을 잘 보내지도 못 했다. 그럼 겨울은? 아니 가을은?
10-8. 올해 첫 매미가 울던 날을 나는 죽어서도 잊지 못 할 것이다. 어쩌면 시각까지도.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http://redholics.com
    
- 글쓴이에게 뱃지 1개당 70캐쉬가 적립됩니다.
  클리핑하기      
· 추천 콘텐츠
 


Total : 31345 (181/209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8645 폭염이라 좋다... 익명 2023-07-27 1548
28644 나에게 이른 퇴근을 허하라 사장이여.. [2] 익명 2023-07-27 1947
28643 조만간 만나요 [11] 익명 2023-07-27 2479
28642 하핫 익명 2023-07-27 1603
28641 나는 솔로 보시는 분 계신가요? [9] 익명 2023-07-27 1961
28640 내가 [4] 익명 2023-07-27 1881
-> 꽉 차 텅 빈 익명 2023-07-26 2206
28638 외롭다 [11] 익명 2023-07-26 1963
28637 그럼 여기 왜 있는지도 말해보자 [5] 익명 2023-07-26 2502
28636 섹스 판타지 공유해봅시다 [18] 익명 2023-07-26 3197
28635 야톡 혹은 야댓 하실분~ [14] 익명 2023-07-26 2596
28634 성향 있으신분들만!! [4] 익명 2023-07-26 1796
28633 외로울땐. 어떻게 감정을 다스리세요 [21] 익명 2023-07-26 2113
28632 성향 가지신 레홀분들 많으신가요?? [33] 익명 2023-07-26 3658
28631 여기 왜 왔는지 말해보자 [9] 익명 2023-07-26 1656
[처음] < 177 178 179 180 181 182 183 184 185 186 > [마지막]  


제목   내용